정진규 3
* 이별 - 정진규
서러워 말자
나는 늘 경계만 헤맨다
넘어가지는 않는다
너를 드나들지는 않는다
넘어가면 내 집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나는 안다
너 또한 그러하리
우리는 위험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별을 익혀왔다
간절해지면 겨우 경계까지 가기는 간다
경계만 헤맨다
해질 때까지 거기서 놀다가 돌아온다
그래, 나는 경계를 가지고 논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경계는 이어진 곳이 아니라,
넘어가는 다리가 아니라
나를 지켜주고 있는 극단이다
이별이 허락하는 극단의 내 집이다
극단의 약이다 극약이다 부드러운 극약이다
나는 이 극약을 먹으며 논다
맛있는 슬픔, 오래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있고 네가 있다 *
* 이별 2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벋어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제 몸이 허공이 되지는 않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고 허공과 제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있고
늙은 소나무가 거기 있었다
서러워 말자 *
* 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 화(和)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 맨발
풀잎은
영혼의 깃털
고맙다
쉬고 있다.
허락하고 있다.
* 몸시 26 –자안(字眼)
입술이든 자궁이든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다른 곳으론 들지 않겠고
오직 네 눈으로만 들겠으며
세상의 모든 빗장도 그렇게 열겠다
술도 익으면 또록또록 눈을 뜨거니
달팽이의 더듬이가 바로 눈이거니
너와 함께 꺾은 찔레순이
바로 찔레의 눈이거니
아, 자안(字眼)이란 말씀도 있거니
글자에도 살아 있는 눈이 있거니
모든 것엔 눈이 있거니
나는 오직 그리로만 들겠다 *
* 몸시 32 -풀잎
내가 그들을 먹은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먹었다
기쁘다!
먹힐 수 있음의 기쁨을 아느냐
오랜만에 나는 아주 잘 먹혔다
나는 요즈음 먹힌다 이렇게
어딜 가서나 먹힌다 누구에게나
내가 참 맛있게 되었나 보다
소여물을 썰면서
작두에 풀을 먹이면서
아버지는 풀잎이 잘 먹힌다고 하셨다
고마우신 아버지
맛있는 아버지
고마우신 풀잎! *
* 눈 내리는 숲이 되어
아직은 이른 저녁
참으로 이런 눈은 오래간만이라서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한 잔의 생맥주를 혼자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첫번째로 꺾게 하고
다시 눈 내리는 숲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두번째로 꺾게 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을
눈 내리는 밤의 다른 추억들도
내리는 눈으로 다 지워지고
그렇게 눈 내리는 숲으로만 갔다
그렇게 가서 나도
한 그루 가문비나무로 서 있게 되었다
붙박이로 서 있게 되었다
눈 내리는 숲이 되었다
즐겁게 그쪽 몸이 되는
즐겁게 그쪽 몸이 내 몸이 되는
아름다운 굴종을 알았다
네가 어서 와서
그렇게 나를 안아주길 기다린다
눈 내리는 숲이 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