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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임재 속으로 |
▹찬양으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나갑니다. |
찬송가 546장 / 복음성가 : 주님은 신실하고 | |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
시편 12:1-8 (진실한 약속)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상의 모습을 보면 각기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첨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경건하고 충성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합니다. 하나님만이 이 경건하고 충실한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위에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원까지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서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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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약속 [성경본문] 시편 12:1-8 ᄆ 말씀 Scripture I 본문을 3번 정도 읽으며 전체적인 뜻을 파악하기/ 내게 다가오는 말씀들을 적어보기 [개역개정] 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새 번 역] 1. 주님, 도와주십시오. 신실한 사람도 끊어지고, 진실한 사람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2. 사람들이 서로서로 거짓말을 해대며,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서 말합니다. 3. 주님은, 간사한 모든 입술과 큰소리 치는 모든 혀를 끊으실 것이다. 4. 비록 그들이 말하기를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은 우리의 재산, 누가 우리를 이기리요" 하여도, 5.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 6.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 7.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8.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 [본 문 이 해] [패역한 세태에 대한 탄식 1:1-8] 의로운 자가 넘어지고 패역한 자들이 일어서며 악이 횡행(橫行)하는 현실 상황 속에서 발해지는 탄식과(1-4절) 영원히 진실하며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5,6절) 대조되고 있는 본시는 공의의 섭리와 구원의 역사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현실적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2절]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성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 수 있고 그의 응답함을 체험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까닭은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경건하고 충실한 자가 하나씩, 둘씩 없어져 가는 현실은 슬프고 안타깝고 또 그런 현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이게 보인다. 또 사람들은 서로 거짓말을 하며 아첨의 말을 하고 또 두 마음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데 능숙하고 또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를 매우 미워하시며(잠 6:19) 아첨의 말은 사람을 멸망시킬 것이다(잠 26:28). 그래서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했다(엡 4:25). 이런 현실에서 참 성도가 어떻게 즐거이 신앙과 경건, 정직과 충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신앙과 정직을 지키며 또 고난을 각오함이 없이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때 성도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렵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또 오직 경건과 선함과 진실함으로 말하며 행하자.
[3-4절]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사람의 거짓과 교만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거나 재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자기를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죄악되고 병든 인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실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거짓된 아첨의 말이나 자랑의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한 공의로 사람들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말 한마디까지도 공의로 갚으실 것이다.
[5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성도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눌림을 당하고 탄식하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 가련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은 정한 때에 일어나셔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실 것이다.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구절에서 ‘그 원하는’이라는 원문(야피아크 로 וֹל י)은 (1) ‘그가 그에게 입김을 뿜는다’는 뜻이거나 (2) ‘그가 그것을 열망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 경우라면, 어떤 영어성경처럼(KJV나 NIV가 비슷함) “그에게 거칠게 말하는 자로부터 그를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뜻이며, 두 번째 경우라면, 한글 번역처럼 “그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는 뜻일 것이다(NASB). 안전 지대는 더 이상 원수의 핍박이 없고 싸움과 위협이 없고 오직 평안함만 있는 곳을 가리킨다. 우리는 아첨의 말에 감동받지도 말고 자랑의 말에 위축되지도 말자. 하나님은 아첨의 입술과 자랑의 혀를 끊으시고 성도를 건져내셔서 안전지대에 두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한 말만 하자.
[6-8절]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습니다. 이 세상은 매우 악하다. 악인들은 곳곳에서 활보하고 있고 비루함, 저질스럽고 무가치한 일이 인생 중에 높아지고 있다. 주께서는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다(마 12:39).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했고(롬 12:2) 또 참된 경건은 우리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1:27). 악인들의 말은 악하고 거짓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순결한 은같이 불순물, 즉 불결함이나 거짓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여(시 19:7-8)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하다. 5절에서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그는 예전에 경건한 롯을 심히 음란한 소돔 성으로부터 구원하셨다.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순결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거룩하고 선한 길을 걷자.
ᄆ 묵상 Mediatation I 말씀 안에 머물며 하나님 경험하기 /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깨달음과 교훈, 감사, 책망 회개)
ᄆ 적용 Application I 내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와 구체적인 실천 찾기
ᄆ 기도 Prayer I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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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주위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충성된 하루가 되게 하소서
교회: 큐티 나눔 소그룹을 통해 회복과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더 많은 지체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소서
선교: 김현주/송민경/송하(남아프리카공화국) – 남아공 영주권을 신청할 기회를 주셔서 더 안정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로 읽을 말씀
살전 5:16~19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의 읽을 말씀
주님을 부르는 것은 영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적 호흡임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먹고 몇 번이나 마신다 할지라도 쉬지 않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쉬지 않고 호흡하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쉬지 않고 하는 기도가 호흡과 같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호흡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는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수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이것이 호흡하는 것, 즉 끊임없이 기도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이름을 무르기를 실행해야 한다. 사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호흡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는 그 영을 호흡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세움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그분을 사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자연히 그분을 산다. 만일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스스로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인 깊은 호흡임
주님 앞에서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것은 아주 깊은 호흡인 영적인 호흡이다. ---우리가 날마다 깊은 호흡을 실행한다면, 우리의 모음 건강하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하는 깊은 호흡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불타게 하며 미치게한다.
우리가 참되게 주님께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 여러분이 부르면 부를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주님의 공급을 얻게 된다. 여러분이 더 많이 부를수록 여러분은 그분으로 더 적셔지게 되며, 여러분이 더 부를수록 여러분은 그분으로 더 충만하게 된다. 주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분은 만유의 주이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분을 누림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영 안에서 주님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을 누리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주님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영이 저절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걸을 때 의식적으로 팔 다리를 쓰지 않아도 팔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이처럼 깊은 속에서부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영이 저절로 움직인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주님을 누릴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는 그 영을 따라 행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극적인 것들이 물러간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특징이 있어야 한다. 다소 사람 사울이 대제사장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받았다는 사실을 볼 때, 1세기의 믿는 이들의 특징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오늘날의 믿는 이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 안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알려져야 한다.
시편 1 서언
시편 1편 메시지
이장에서는 최근 집회에서 다루었던 시편에 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네 가지 중요한 요점들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경륜은 신성한 삼일성을 위한 유기체를 낳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율법은 죄인들의 죄 많은 본성과 악한 행위를 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은혜는 사람이 그에 의해 누림과 공급으로 영접한 하나님의 체현입니다.
네번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은혜를 체험한 결과는 새예루살렘으로 총결되는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시편에 대한 라이프스타디를 시작하기 전에 네 가지 주된 요점을 갖고 이번 집회를 열게 해 주신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인해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네 가지 중요한 요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은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신을 시냇가에서 자라며 언제나 번성하는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1편 다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2편이 있습니다. 또한 시편 3편의 제목은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다윗의 시입니다. 시냇가로 상징된 율법을 누리며 자란 그가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가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그처럼 율법을 즐거워했던 자가 의도적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과연 율법이 그 기능을 발휘했습니까? 율법은 그 기능을 발휘하지만 다윗의 방식대로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들어내는 일을 합니다. 율법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기 위해 모함한 다윗을 극도로 폭로했습니다. 율법이 그 기능을 발휘했습니까? 발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시편 1편에 있는 다윗의 개념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신약에 있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율법이 그 기능을 발휘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인간의 죄 많은 본성과 악한 행위를 폭로하기 위해 신성한 계시의 중심 노선에 더해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에 이러한 신성한 개념에 근거한 율법에 대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윗이 살았던 구약 안에 있지 않고 신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본질 = 교리나 가르침의 책이 아님
시편은 교리나 가르침의 책이 아닙니다. 시편의 글들은 찬미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찬미들은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이해로서 구성되지 않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정서와 느낌과 감동과 체험을 표현한 책입니다. 시편은 경건한 사람들의 정서와 느낌과 감동과 체험을 표현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열쇠를 찾아내지 못하면 이 책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핵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더 많은 실수 입니다.
시편은 이야기 책이 아니고 여덟까지 것들에 관한 경건한 사람들에 정서와 느낌과 감동과 체험을 표현함으로써 신성한 계시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덟까지가 무엇인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과 그분이 사람을 다루시는 길.
두번째, 신성한 계시가 있는 거룩한 말씀인 하나님의 율법.
세번째, 하나님의 집과 성전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의 중심이 되는 성전이 세워진 시온산. 네번째, 하나님의 집을 둘러서서 보호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
다섯번째,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열방 중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
여섯번째,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 하나님과 그들의 교통.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하나님의 다루심 아래서의 그들의 고통과 환경.
일곱번째. 그들의 포로됨.
여덟번째, 그들이 맛보고 누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감사와 찬양
시편 기자들은 경건한 사람들로써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전을 사랑하고 거룩한 성을 사랑하고 거룩한 백성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들은 추방당하여 포로 되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후 율법의 결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비참한 포로상태와 유랑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거듭 포로 되고 거듭거듭 추방당하는 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바벨론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 중 아주 적은 수많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땅에 남아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았으며 도리어 애굽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가서 유랑생활을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의 결과는 완전히 포로 됨이었습니다.
첫 언약을 이행하는 데 실패함으로 일어난 결과는 포로 됨이었습니다. 옛 언약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 했습니다. 심지어 초기 사도들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 신약의 믿는 이들은 새 언약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에 남아 있음으로써 포로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천주교는 신약과 구약의 혼합물입니다. 그들의 의식들과 형식들은, 심지어 사제의 의복조차 구약과의 혼합물입니다. 오늘날 오순절파 사람들 역시 구약과 신약의 혼합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믿는 이들도 구약의 율법과 그 실행을 지킴으로써 포로로 사로잡혀갔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시편 기자들은 자신들이 즐거워하는 율법을 누리는 데에서 그들이 사랑하고 추구하던 하나님을 누리는 데로 돌이켰습니다.
시편의 두 종류의 관념에 따라 쓰여졌음
시편은 두 종류의 관념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요점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편을 합당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기자들의 인간적인 관념 [관념(觀念)[명사]1.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
2.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
3.<불교>마음을 가라앉혀 부처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시편에 나오는 첫번째 관념은 거룩한 기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관념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관념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본성에서 생겨났고 그들의 거룩한 전통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거룩한 성경의 가르침들로 조성되었고 거룩한 생활의 실행에 의해 권장 돼 왔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관념들이 그들의 거룩한 정서와 감동에 표명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경건한 시편 기자들에 인간적인 관념을 이루는 구성요소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족속이고 모세오경 즉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룩한 족속의 전통이 그들의 인간적인 관념을 형성하여 많은 시들이 그것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
시편은 또한 신성한 계시인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신성한 계시인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은 그리스도를 경륜의 중심성과 우주성으로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신성한 관념은 또한 신성과 인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생명 분배와 시에 산출과 부활과 영화롭게 됨과 승천과 영광 안에서 나타남과 영원한 통치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요점들이 시편에 명백하고도 상세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 신성한 관념은 또한 그리스도의 표현을 위한 그분의 충만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을 위한 왕국 안에서 영원 안에 있는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위한 땅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마음의 갈망 곧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성한 관념이 경건한 시편기자들의 글에 구분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기자가 인간적인 개념과 신성한 개념을 둘 다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1편과 2편의 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적용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분깃 (分-)[명사] 유산을 한 몫 나누어 줌. 또는 그 몫.
시편 1편은 어떠한 관념에 따라 쓰여졌습니까? 시편 1편은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이 시편은 물로 좋지만 인간의 관념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여기에서 기자는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자들은 형통하게 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고난을 받았습니다. 시편 73편에서 기자는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난과 징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깨끗이 한 것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그는 모든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괴로워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계시를 받았고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취할 것이 없는 상태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산 분깃이라고 선포했으며 율법이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만이 그의 분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시편 1편이 좋긴 하지만 잘못된 관념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지킴으로서 형통하게 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시편 1편의 기자 다윗은 율법에 의해서 그가 살인자이며 또한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은 자임이 들어났습니다. 그가 행한 일로 인해 그의 온 가족의 삶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간음과 살인이 자녀들 가운데서 행해졌고 그의 아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제삼편은 다윗이 이 반역한 아들을 피할 때에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1편을 높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 시편은 잘못된 관념 즉 인간의 관념으로 그릇되게 쓰여진 것입니다. 이제 시편 2편을 읽어보겠습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2절에 기름부음 받은 자와 6절에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7절에 아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시기 위해 부활 안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2편 8절에서는 열방과 땅이 그리스도께 주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방이 그분의 유업이 되고 온 땅은 그분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시편 1편이 처음에 나오고 시편 2편이 두번째에 배열 되었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가 복을 받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선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시편 2편 안으로 오셔서 이렇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왕으로 세울 것이다. 온 땅의 그의 소유가 되고 모든 열방이 그의 유업이 됨으로 그는 형통하게 될 것이다. 그 안으로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 너는 그와 입맞추어야 한다. 이 두 시편 안에는 두 종류의 선포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자의 인간적인 관념에 따른 선포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으로; 하는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에 따라 하나님이 하신 선포입니다.
우리는 시편 2편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을 ‘아멘’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고 그 분과 입맞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과 입맞춤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신성한 관념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시편에 있는 두 관념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에는 다윗이라는 한 기자를 통한 두 가지 다른 선포가 있습니다. 시편 1편도 다윗이 선포한 것이며 2편도 다윗이 선포한 것입니다. 시편 1편의 그의 인간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며 시편 2편은 역시 다윗의 선포이지만 신성한 관념에 따른 것입니다. 먼저 이 한 사람에 화자에게서 인간의 관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으로 말하고 있는 동안 어조가 바뀌었습니다. 신성한 관념에 따른 또 다른 말이 나왔습니다. 많은 전파자들이 시편 1편을 높여 말합니다. 그러나 시편 2편에 대해서는 합당하게 말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시편 2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시편 1편과 2편을 읽었을 때 우리는 아마 시편 1편을 훨씬 높이 평가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러나 시편 2편은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의 범주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기자들의 인간적인 관념을 율법의 중심 강조점으로 올려, 시편에 있는 인간적인 관념과 신성한 관념에 관한 이러한 요점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거룩한 기자들의 인간적인 관념은 일생토록 율법을 귀히 여기고 그 안에 머물기 위해 율법을 중점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율법을 높이 평가합니다.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은 그리스도를 중심 강조점으로 높이 올립니다. 계시하시는 신성한 관념은 거룩한 기자들의 인간적인 관념을 율법에서 그리스도께로 전환시키기 위해 신성한 계시에서 나온 신성한 관념에 따라 그리스도를 중심 강조점으로 높이 올렸습니다.
시편 책의 내용
15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시편은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시편은 150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41편은 제 1권, 시편 42편에서 72편까지는 제 2권, 시편 73편에서 89편까지는 제 3권, 시편 90편에서 106편까지는 제 4권, 시편 107편에서 150편까지는 제5권입니다. 이 다섯 권의 책들은 다섯 층으로 된 건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1권이 1층인 반면 5권은 가장 높은 층입니다. 5권은 감사와 찬양의 책입니다.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본 시편의 내용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보면 모든 시편은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 했던 경건한 사람들의 정서와 느낌과 감동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성한 관념에 따라 본 시편의 내용
신성한 관념에 따르면 사실상 시편의 중심사상은 매우 평이한 말로 계시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인 교회로서 이 교회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으로 예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편은 한 권의 책이지만 두 종류의 어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쓰여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성한 관념에 따라 쓰여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이 거룩한 기자들의 인간적인 관념에 따른 그들의 이해는 잘못 되었지만 여전히 경건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자신들의 관념에 따라 잘못 말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개입하시어 그들을 통해 말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고 가까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동안 그 말함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시편 1편과 2편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이 두 시는 다윗 한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첫번째 시는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그가 직접 말한 것이고 두번째 시 역시 다윗이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다음 시편 3편부터 7편까지에는 또 다시 다윗의 어조가 있습니다. 시편 8편에는 다시 하나님의 어조가 있습니다. 시편 3편부터 7편까지는 땅의 상태가 얼마나 가련하고 문제가 가득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은 “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분의 이름이 없으면 땅은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이 땅에 있을 때에는 이 땅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 이름은 천사보다 더 나아진 인간이 되신 분의 이름이며 인간생활을 거치시고 죽고 부활하시어 영화롭게 되고 존귀케 되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신 분의 이름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이 땅에 있을 때 이 땅은 탁월하게 됩니다.
오늘날 신문에는 늘 살인 사건이 보도됩니다. 우리는 자매들에게 저녁 집회 후에 절대로 혼자 걸어서 집에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땅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땅이 아름답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결국 온 땅에서 가장 뛰어나게 될 것이므로 온 땅이 아름답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성한 관념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에 따라 본 시편 다섯 권의 중심사상은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제 1권은 하나님의 의도가 추구하는 성도들을 율법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임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들로 교회 곧 하나님의 집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 1권에는 41편의 시들이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기자는 율법을 극도로 높이 평가했지만 시편 27편에서는 더 이상 율법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여호와의 집에 머물기를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누리려는 것입니다. 또한 36편에서 저자는 주의 집에 살찐 것으로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의 복락의 강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기자는 또한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시며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커다란 차이점을 시편 1편과 27편과 37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가장 하래 층인 1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편 27편과 36편에서 기자는 5층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맨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시편 1편을 높이 평가한다면 우리는 맨 아래층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가는 맨 아래층에 머물지 말고 더 높은 신성한 관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 2권은 고통받고 높이 올려지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집과 성을 체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 3권은 모든 누림이 있는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성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 합당하게 안식하고 높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음을 성도들이 체험으로 깨닫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 4권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하나님과 하나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성 안에서 온 땅에 걸쳐 그분의 칭호를 회복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편 90편은 제 4권의 첫번째 시입니다. 시편 90편은 그 제목으로 보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모세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쳐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을 쓴 사람이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거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처음 이 시편을 읽고 이것이 모세가 쓴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에 모세는 그저 십계명인 율법을 줄 줄만 아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 그 계명들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고 느낍니까? 오히려 이러한 계명을 읽은 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언제나 그 계명들을 깨뜨리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가 집에 계시냐고 물으면 그는 아버지가 곁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데도 집에 계시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늘 더러 거짓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거짓말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거짓말하며 또 아내는 남편에게 거짓말 합니다. 사람들은 또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계속 깨뜨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들이 가진 것을 탐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값비싼 차를 탐내고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의 비싼 펜을 탐냅니다. 타락한 사람이 율법의 계명을 지키기란 불가능 합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후견인이요 안내자 입니다. 십계명을 썼던 모세는 늙어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영원토록 우리의 거할 처소이십니다. 저는 사실상 이 땅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안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의 거처이십니다.” 이것이 시편 제 4권을 소개하는 말입니다.
제 5권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성인 찬송과 안전함과 성도들의 갈망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성 교회를 통해 온 땅을 다스리기 위해 오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시편 다섯 권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서언 안에 있는 이 모든 중점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시편을 연구할 준비와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150편에 시에 대한 실제적이고도 참다운 해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이 한 면에서는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 쓰여졌고 또 한 면에서는 신성한 관념에 따라 쓰여졌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의 이해는 천연적일 것이며 시편을 우리의 인간적인 관념에 따라서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시편에 대한 이해에서 아무런 신성한 관념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신성한 관념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신성한 관념에 따라 율법에서 그리스도께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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