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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편력(3)_Glimpses of World History 2015.1 데라둔 형무소에서(153-196)
153 일본이 중국을 괴롭히다.
중국의 이러한 내전을 기화로 한 파벌 또는 독군 그룹을 원조하는 한편, 또 다른 파벌의 뒤를 밀어주는등의 수법
으로 이익을 차지하려 하는 제국주의 열강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다.
이것은 너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영국이 인도에 뿌리를 박을 때 써먹은 수법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중국은 일본처럼 도약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일본이 가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그밖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화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일보를 내딛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다.
중국인에게는 철학자적인 기질이 있는데, 철학자는 그다지 민첩하게 행동하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 정신 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에 대한 의식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중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는 단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경제.사회.교육적이고, 복합적인 성질을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그것의 수습을 위해 개최되었던 강화 회의에 대해서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편지에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강화 회의에서 여러 강대국 – 특히 영국.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의 산동성을 일본에
넘겨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리하여 그들의 연합국인 중국은 억울하게도 영토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154 전시하의 인도
인도는 영국의 속령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주의 주인의 노선에 따를 것을 강요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커다란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지만, 인도 병사들은 투르크나 이집트, 그 밖의 나라들과 싸워
야만 했으며, 그로 인해 서아시아에서 인도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인도인들은 마음 밑마닥에서 투르크를 대체로 동정하고 있었으며, 영국이 독일에게서 극심한 타격을
받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이런 무기력한 소원이나마 그 자신이 한껏 짓밟힌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다만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이러한 모든 사정들 때문에 영국의 인도 정책에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다.
한 세기 동안 실시해 온 낡은 정책은 폐기되고, 그 대신 새로운 정책이 채용되었다. 영국 제국주의는 사태의 변천
에 장단을 맞추면서 그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영국의 인도 통치 초기에 대해 내가 이야기 한 것을 너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처음에 닥쳐온 것은 막대한 재화
를 수탈해서 뿌리를 내리자 제2단계로 옮겨가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1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이 단계는 인도를 원료 생산지이자 영국 제품의 시장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온갖 수단으로 대공업을 억합하고, 인도의 경제발전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바야흐로 전쟁 기간에 제3단계가 시작되어 영국 정부는 인도의 대공업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척도는 상승하고 있었는데, 부드럽게 달래는 듯하며 뭔가 변명조를 띠고 있는 무능한 온건파의 속삭임은,
더욱 확신에 차고 공격적이며 직접적이고 과격한 급진파의 외침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온건파와 급진파 양쪽 모두가 정치와 외형적인 정부 기구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그 배후에서는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의 경제 생활에 대한 통제를 조용히 강화해 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한 정치가는 일찍이 “세계는 자신들이 얼마나 빈약한 지능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알면
크게 놀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은 몇 세대에 걸쳐서 연합국의 경제적 농노로서 해마다 막대한 소작료를 바쳐야만 하게 되었다.
연맹에서는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만장일치여야만 했다.
그러므로 만일 가맹국 가운데 비록 한 나라라도 어떤 제안에 반대한다면 그 제안은 그대로 사장되었다.
이는 즉 다수결로 강제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 국가의 주권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서 예전이나
다름없이 거의 책임을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이 조항은 연맹의 힘을 매우 약화시켜, 실제로는 자문 기관으로 전략시켜 버렸다.
나중에 귀족의 작위를 받고 영국 내각의 각료에 올랐던 필립 스노든은 이 조약을 다름과 같이 평가 했다.
이 조약은 약탈자.제국주의자 그리고 군국주의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전쟁의 종결리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들의 희망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타격이다.
그것은 평화 조약이 아니고, 다음 전쟁의 선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전사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이 조약이야말로 연합국의 참 목적을 폭로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연합국은 그들의 증오와 교만과 탐욕이 내키는 대로 술책을 부리다가 제 꾀에 넘어간 것이다.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자신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의 결과가 자신들을 위험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the union of socialist and soviet republics), 또는 U.S.S.R 이라
고 부른다.
지금은 역사의 격동기다. 이 시대에 살고, 이 시대가 부여하는 임무의 한 몫을 짊어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비록 그 임무의 일부가 데라둔 감옥에서 고독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에 불과하도 해도 말이다!
그러나 케말 파샤의 슬로건은 ‘승리냐, 멸망이냐’였다.
어느 미국인이 만일 민족주의자들이 실패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살기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는 민족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패배는 곧 그 민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영국 대표로 오만하고 위압적인 태도의 커즌 경과, 조용히 웃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분해서 발을 구르게 만들기도 하는 말수가 적고 둔해 보이는 이스메트 파샤가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였다.
‘가지(Ghazi)’, 즉 승리의 전사 케말 파샤는 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을 거의 모두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매우 현명하게도 최소한의 요구를 내걸고, 승리의 순간에 조차 이것을 굳게 지키고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무스타파 케말과 그의 동지들은 그들이 쟁취한 승리로 무엇을 했을까?
케말 파샤는 결코 낡은 관습을 소중하게 지켜 나가려는 일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투르크를 근본부터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다음부터 그에게 찾아온 커다란 명망 때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해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통과 종교에 깊이 뿌리박은 낡은 관습의 궤도로부터 민족 전체를 송두리째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손쉬운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 자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투르크인이 이제는 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족
을 탄압했다.
방어적인 민족주의가 공격적인 민족주의로 변화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이리하여 자유를 위한 투쟁은 결국 남을 지배하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터키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계급을 빼놓고는 아직 강력한 중간 계급이 없다.
그리스인과 그 밖의 외국 세력들을 몰아 낸 일은 상업활동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경제적 독립을 상실할 바에는 차라리 민족적 빈곤과 공업 발달이 지연되는 것을 참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 자본이 터키에 대규모에 흘러들어오면, 그것은 당연히 경제적 독립의 상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나라를 착취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외국 기업이 진출하는 것을 애써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의 목소리는 약간 특이하게 들렸다.
그것은 조용하고 낮은 음성이었지만, 대중의 절규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부드럽고 은유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강철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또 그것은 겸손하고 호소로 가득한 것이었지만, 무언가 엄격하고 위압적인 것이 있었다.
그가 쓰는 모든 말에는 다 의미가 있었고, 지극한 진지함을 담은 듯이 보였다.
평화와 우호를 주장하는 말 뒤에는 힘이 있고 은은한 행동의 그림자가 비쳤으며, 악에 대해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결의가 엿보였다.
외국의 착취로 말미암아 대중에 대한 경제적 압박과 이에 따르는 사태의 악화, 중간 계급 내부에서 발생하게 된
실업자의 증가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다.
이것을 구제하는 수단은 무엇이겠느냐? 민족주의의 성장은 민심을 정치적 독립으로 쏠리게 했다.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종속과 노예화가 불명예스러워이기도 하지만, 틸락이 지적했다시피 우리들의 타고난 권리
이며, 가져야만 하는 것일뿐더러, 또한 우리 국민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빈곤의 짐을 덜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었다.
오히려 인민의 힘이 미약하고 후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서로 싸우게 함
으로써 그들을 약하게 만들고 착취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월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정책은 상대편에 틈이 있고 균열이 있을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인도에 대한 정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인도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였다. 오늘날의 영국 제국은 진보 세력과 싸우면서, 봉건 세력과 그 밖의 극단적인 반동
세력에 의존하면서 존립하고 있다.
버마는 1937년 인도에서 분리되었다. 인도의 주 의회와 비슷한 입법 의회가 버마에도 수립되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손을 댄 것은 사회적인 여러 제도에서 종교를 분리시키는 일이었다.
오래된 종교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해 우리들 하루 하루의 생활의 모든 면을 덮고 규정하는 성질이
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도 순수한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결혼,상속,민법,형법 그리고 정치 조직에
이르기까지, 실로 인간과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규칙이나 법도를 마련했다.
달리 말하면 그것들은 사회 구조 전체를 규정하고, 더구나 거기에 종교적인 재가와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영구화 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힌두교는 엄격한 카스트 제도를 통해 다른 종교보다 그러한 경향이 더 심하다.
사회구조의 이러한 종교적 영속화는 변화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집에서, 또한 어디에서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나 제도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과거에 종교나 관습이 인민에게 강요해 온 낡은 여러 가지 제도는 분명히 성서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여러 상황에 맞는 것이었으나, 과거의 낡은 제도들이 오늘날의 여러 조건에는 맞지 않게 되었
다는 것이다.
외국인의 이러한 특별하고도 매우 값비싼 특권은 ‘무조건 항복하다(capitulate)’, 즉 성을 넘겨주다(surrender) 라는
뜻의 말에서온 ‘캐피튤레이션(capitulations:옛날 투루크 황제가 거류 외국인에게 인정한 치외 법권 등에 관한 각종
협정’)이라고 불렀다.
164 영국군 주둔하의 독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65 서아시아가 세계 정치 무대로 복귀하다.
이 시대의 유럽인은 동방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유럽의 암흑 시대라는 것은 바로 이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유럽은 이제 막 눈을 뜨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화가 뛰어난 동방은 자석처럼 유럽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동방의 견인력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십자군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여러 전쟁의 결과, 유럽은 서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유럽은 이들로부터 미술과 공예와 화려한 생활 습관을 배웠으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인 작업 방식
과 사고 방법의 습득이었다.
몽고인이 파괴를 거듭하면서 대거 서진했을 때는 십자군은 이미 떠났거나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
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몽고인을 단순히 파괴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중국으로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그들의 대원정은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 민족을 접촉시켜 무역이나 상호 교섭을
촉진 시켰다.
새로운 항로가 열려서 이것이 원래의 육상의 대상로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몇 천 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서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 로드는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그 연변에 있는 여러 나라
는 점차로 시들해지거나 또는 소멸되었다.
166 아랍 국가들 – 시리아
이 민족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집단을 단결시키고 구별시켜 종전보다도 한층 더 크게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인
작용을 하도록 만든다.
민족주의는 이런 식으로 프랑스인들을 굳건히 뭉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외의 세계를 무언가 이질적인 것
으로 보게 하는 견고한 민족 단위로 만들었고, 또한 다양한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강대한 하나의 독일 민족이 되
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을 응집시킨 힘은 한편으로는 이 두 민족을 가로막는 힘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구과 프랑스 정부는 이들 아랍 지역의 대부분을 서로 나눠 갖는 것으로 이 숭고한 목적의 실현을 꾀했다.
위임 통치령, 즉 국제 연맹의 보증서가 붙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영토 획득의 새로운 방법으로 프랑스와 영국
에 할당되었다.
1920년 여름에 프랑스가 국제 연맹에서 발부받은 시리아 통치의 위임장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와서 파이살을
추방하고 이 나라를 강제로 점령해 버렸다.
시리아를 한층 더 작은 여러 국가로 분할해 종교적인 상이점과 소수 집단간의 차별을 강조함으로써 시리아 민족
주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분할하고 통치한다’는 것은 거의 수학 공식이나 다름없는 식민지 지배 정책의 정석
이었다.
167 팔레스타인과 트란스 – 요르단
영국은 유태인의 종교적 민족주의를 아랍인에게 대항시키는 방법을 통해, 이러한 충돌을 방지하고 양자를 조정
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개입이 불가피한 것처럼 정세를 꾸며댔다.
[시편]의 노래중
바빌론 강기슭에 앉아 시온의 추억에 젖어 눈물 흘리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하프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했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부르라고 했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고국을 갖지 못한 이 민족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과장된, 위대하고도 장엄한 고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일종의 약속된, 즉 장차 자신들의 손으로 돌아올 땅이라 하여 시온(zion)이라고 불러왔고,
시오니즘(zionism)이란 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환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는,
즉 과거의 영광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를 뜻한다.
세계대전중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에 침입해 1917년 11월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중에 이른바 ‘발포아 선언’이
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그들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유태 민족 정착지’를 건설하는 데에 있었다.
이 선언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발표된 것으로서, 돈 많은 유태인들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이 성명은 유태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성명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미개척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도 아니었다. 이미 이 곳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이 따로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 정부의 너그러운 제스처는 사실상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었다.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팔레스타인의 맞은편 강기슭에는 영국의 전후의 또 하나의 작품이라 할 조그마한 나라가
있다. 이것을 트란스-요르단이라 부른다.
이 나라는 인도를 향한 육로와 항공로상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사막과 서쪽의 바다에 이르는 비옥한 토지를 연결하는 요충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트란스-요르단은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1928년 압둘라와 영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군 작전권과 모든
행정권 일반을 영국이 대행하고 있어 사실상 영국의 일부가 되어 있다.
168 아라비아 – 중세로부터의 비약
고대.로마시대부터 아라비아 펠릭스(축복받은 아라비아)로 알려져 있는 예멘이 있다.
이 곳은 다른 불모의 사막 지대에 비해 비옥하기 때문에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구 밀도가 조밀
하다. 아리비아의 남단 가까운 곳에는 동서로 왕래하는 배의 기항지인 아덴(aden)이라는 영국 영토가 있다.
169 이라크와 공중 폭격의 장점
이라크는 영국이 국제 연맹에서 ‘위임 통치권’을 부여 받은 나라들 중의 하나다. 위임 통치권이란 국제 연맹의 그
럴 듯한 표현에 따르면, 연맹을 대신해서 맡은 ‘신성한 위탁물’이라는 뜻이다.
이 사고 방식에 따르자면 위임 통치를 받는 땅의 주민은 아직도 자치 능력이 불충분해 자기의 이익을 스스로 처
리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국의 조력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제국주의가 가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위탁 제도’ ‘대중의 복지’ ‘후진 민족의 자치를 위한 훈련’ 등의
미사여구로 자기들의 테러와 착취를 누가림하는 것이다.
1930년 6월에는 영국과 이라크 사이에 새로운 동맹 조약이 맺어졌다.
또다시 이라크의 국내.국외 문제에 관한 완전 독립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유보 조항과 예외조항은 이 독립국을 위장 보호령으로 여전히 못박아 놓았다.
인도로 가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그 조약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라크는 항공 기지라는 영국에게는 대단히 중요
한 거점을 제고했다.
제국주의적 지배 방법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사이에 매우 현저한 차이점이 있는데,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영국은 어느 식민지에서나 봉건적 지주 계급, 즉 가장 뒤떨어진 보수 계급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비해 그 자체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국가인 프랑스는 식민지 여러나라에서도 부르주아 계급, 즉 신흥 중산
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했다.
170 아프카니스탄과 그 밖의 아시아 국가들
171 혁명의 좌절
영국의 유명한 작가인 체스터톤은 어딘가에서 19세기 영국 최대의 사건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19세기에 영국은 여러 번 수시로 혁명 직전까지 갔는데, 이것은 소부르주아와 노동자가 야기한 사
회 혁명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귀족 계급은 반드시 한 발 양보해, 선거권을 확장시켜 약간의 의석을 그들에게 주
거나 해외의 제국주의적 착취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를 나누어 줌으로써 임박한 혁명을 가라않히곤 했다.
러시아와 공업화된 서구의 여러나라 – 영국. 독일. 프랑스등 –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러시아에는 강력한 부르주아
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노동자 혁명은 후진국 러시아가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여러 공업국에서 먼저
폭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이 녹슬고 낡아빠진 제정 러시아의 강력한 중간계급이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자 소비에트가 등장해 정권을 장악했다.
신기하게도 러시아의 후진성이라는 바로 그 약점이 더욱 선진적인 나라들 이상으로 크게 한 발 앞서 나아갈 수
있게 만든 요인이 된 것이다.
172 묵은 채무를 지불하는 새로운 방법
지폐가 창출하는 가치는 신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폐를 사용하는 것은 필요할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금
이나 은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폐를 발행할때에는 반드시 그에 상당하는 금을 은행에 비축해 둠으로써 그 지폐의 가치를 보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폐는 금화나 은화의 사용에서 오는 불편을 제거하고 지불 준비금으로 액면 가치를 보증해 주는 매우
편리한 것이다.
173 화폐의 이상한 작용
전쟁이 끝나자 각 국가간에 분규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변화하는 경제적 여러 조건과 국가 간의 상호 불화는 각종 통화의 비정상적인 작용으로 나타났다. 오는날 모든 화폐 제도는 대부분 신용을 기초로 성립되고 있다.
즉 지폐나 수표는 모두 장래의 지불을 약속함으로써 신용할 수 있는 화폐로서 통용된다.
신용은 신뢰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회가 없어지면 신용 또한 자취를 감춘다.
1925년 영국 정부는 제2의 길을 택해 평가 절하를 단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행가를 위해 산업을 희생시켰다.
영국이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훨씬 더 중대한 문제, 즉 대영 제국의 사활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런던이 세계 금융의 총본산으로서의 지위를 잃는다면 제국의 각 구성 부분은 금융상의 지원이나 지도를
바랄수 없게 되고, 따라서 제국은 점차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제국 정책의 문제로 부각되었으며, 그리하여 영국의 산업과 목전의 국내적인 여러 이익을 억누
르고 한층 더 광범위한 제국주의적 이익을 따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74 책략과 대응 책략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이야말로 다름 전쟁의 주전장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본과 미국의 관계에서 영국은 미국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 쪽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종속적인 관계를 피하면서도 부유하고 강대한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한 것임이 분명하다.
일본과 맺은 동맹을 청산해 버린 다름, 영국은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를 극동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거액의 경비를 들여 대규모 도크를 건설하고 그곳을 해군기지로 삼았다.
영국은 이것을 거점으로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상 통로를 지배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인도와 버마를, 또
한편으로는 프랑스나 네델란드의 식민지에 압력을 가할수 있게 되었다.
관직이나 권력의 맛을 볼수록 그들은 자본주의 기구에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그들은 실로 자본주의의 최상의 수호자가 되었고, 때로는 예전의 보수주의자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는 ‘완고한
제국주의자’가 되었다.
175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현상에서 후퇴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진할 용기도 없어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안일한 길을 택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파업은 그냥 와해되고 말았다.
무솔리니 지도하의 파시스트들은 두 가지 상반되는 호소를 교묘하게 연결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적이라는 사실로서 유산 계급의 지지를 획득했다.
그러나 지난날의 사회주의 선동가이며 혁명적이었던 무솔리니는 다분히 대중적이며 반자본가적인 슬로건을 내
걸고 있었기 때문에 최하층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또 이러한 일들에 관해 전문가들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선동의 기술에 대해 배운 바가 많았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파시즘은 일종의 잡다한 것의 혼합물이었으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파시즘의 특징은 확고 부동한 원칙이 없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대를 철학으
로 할 뿐, 그 배후에는 이데올로기도 철학도 없었다.
모든 것이 파시스트가 아니면 안 되었으며, 그 밖의 어떠한 정당도 조직도 시설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공직도 파시스트만의 것이었다.
176 민주주의와 독재
나는 지금 언급한 독재 정치의 리스트에 소비에트 연맹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독재 정치도 다른 어떤 독재 정치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것이지만 다른 형의 독재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독재 정치가 아니라, 특히 노동자들에게 그 자체의 기초를 두고 있는 잘 조직된
정치 정당의 독재 정치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신속한 행동이 요구되는데 대의제 회의체라는 것은 언제나 신속하게 행동할 수가 없다.
나는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형식적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참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은폐하
기 위한 민주주의의 빈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독재를 감추는 베일이자 금권 정치이고, 부유한 자들의 통치일 뿐이라
는 것이다.
도매금으로 대중에게 부여한 투표권은 4년이나 5년에 한 번 정도 특정한 인물을 선출할 기회를 부여한 투표권은
4년이나 5년 한 번 정도 특정한 인물을 선출할 기호를 주는데, 그인물이 x이건 y이건 결국 대중들은 지배 계급으
로부터 착취를 받게 마련이라고 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백과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파시즘은 영원한 평화의 필요성 또는 그 유용성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희생이 두려워 투쟁을 회피하고, 비겁한
타성이 깊이 뿌리박고 있는 평화주의를 배격한다.
전쟁이야말로, 아니 전쟁만이 인간의 활동력을 최대한으로 높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있는 사람들을 고결하
게 한다. 그 밖의 모든 시련은 다만 부수적인 것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의 선택 앞에서도 개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권력을 유지해 민주주의적인 제도로서 노동자를 억압할 수 있는 한 민주주의는 번영을 누릴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지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버리고 공공연히 파시스트의 폭력과 테러를 일삼게
된다.
177 중국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손문의 혁명 사상 체계, 그것은 민족적 평등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민권주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는 ‘민생주의’로 구성되지만, 그것들이 불가분의 일체라는 의미에서 ‘삼민주의’라는 이름으로 총괄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때부터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인 국민당과 공산당의
비공식적인 연합이 이룩되었다. 이러한 연합은 내부적으로도 견고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요한 고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에 중국에 불행을 초래했다.
이리하여 광동 정부의 지반은 굳어지고, 북방의 독군들과 사이의 결전 준비가 갖추어졌다. 군관 학교가 설립되고,
군대고 창설되었다. 종교적인 권위가 세속적인 권위로 대체되는 과정은 광동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흥미로운
발전이었으며, 어느 정도 동양 전체의 발전이기도 했다.
갑자기 어제와는 다른 중국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영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정책은 변화
를 겪어야 했으며, 이후로는 새로운 중국에 대해 회유적으로 되었다.
혁명가 브로딘은 일정한 정세 속에서 전개되는 갖가지 요인에 대한 판단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신중
한 충고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당의 우파 지도자들, 특히 장개석 총사령관은 상해 진격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상해 점령을 의도한 참된 동기는 나중에 국민당이 둘로 갈라졌을 때 명여백해 졌다.
장군들 대부분은 그들 자신이 대지주였기 때문에 빈동의 조합이나 노동자의 조합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178 세계에 도전하는 일본
일본은 근대적 공업 문화와 중세적 봉건주의, 또 의회주의와 전제정치 그리고 군부 지배의 이례적인 혼합물 이
었다. 지주이자 군부인 통치 계급은 계획적으로 번벌 체제를 기반으로, 또 그들 자신을 근간으로 하여 천황을
최고의 우두머리로 받드는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종교도 교육도 모든 것이 이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서 총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종교는 정부의 지시를 받는 부분으로서 신사나 사찰은 직접 관의 통제아래 놓여있었고, 승려가 관직을 갖고 있
었다.
이처럼 사찰이나 학교를 통합해 운영하는 거대한 선전 기관은 끊임없이 인민에게 애국 정신 뿐만 아니라, 또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천왕의 뜻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주입했다.
불교는 예로부터 일본에서 일반화된 신앙이었지만, 조상 숭배에 중점을 두는 신도는 오히려 국가 종교의 색채가
짙다.
이런 숭배의 대상에는 역대의 천황이나 국가적 영웅들, 특히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조국애나 당대의 천황에 대한 복종 사상을 보급하는 데에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1922년 워싱턴 회의는 일본에게는 대타격이었는 데 반해 미국 외교로서는 일대 승리였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이 중국의 영토 보존을 서약했는데,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대한 모든 세력 확
장의 야망을 포기해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79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1923년 그들은 합류해서 소비에트 연방 또는 정식 호칭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을 결성했다. 이 명칭은 그 머릿글자를 따서 U.S.S.R로도 일컬어 진다.
소비에트 민족 문제의 복잡성은 우리 인도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182종이나 되는 이민족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
이다.
이처럼 연방내에 통일을 저해하는 듯한 경향이 있는데도 각 지역은 그들이 차르의 중앙 집권 정부 밑에 있을 때
보다는 훨씬 긴밀히 결속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공통의 이상을 가지고 모두가 함께 공동의 사업을 위해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180 피아틸레트카, 또는 러시아의 5개년 개획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대립의 불씨가 된 것은 스탈린이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농업
정책을 강행할 것을 제안한데에 있었다. 이것은 여러 외국의 정서와 상관없이 러시아에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하
는 것을 기도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해서 자신이 제시한 ‘영구 혁명’의 이론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
았는데,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농민은 완전히 사회주의화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일과 관련해서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러나 정치에서 결정적인 것은 단지 무엇을(what)이 아니라,
어떻게(how) 또 누가(who)라는 것“ 이라고 쓰고 있다.
사적 기업은 그의 장래의 활동을 위해 계획을 세울지 모르지만, 사적인 계획은 대부분이 다른 사적 기업을 앞질러
그들보다 유리한 지위에 서려는 시도인 것이다.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계획의 정반대 결과이며, 과잉과 결핍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전 연방 내의 모든 산업이나 기업을 한 손에 통제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사업이 각자의 위치 속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정이 이루어진, 단일한 계획을 세워서 그
적용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닌 건설하기 위해서, 일개의 후진국을 사회주의
테두리 안에서 공업 대국으로 발돋움시키기 위해서 국민의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개 봉건 국가에서 일약 선진 공업국이 된 것이다. 또한 놀랄 만한 문화적 진보가 이루어져 사회 복지 사업, 즉
공중 위생이나 상해 보험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발전된 것이다.
빈곤과 결핍은 있어도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덮고있는 실업이나 기아의 가공할 공포는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경제적 안정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181 소비에트 연방의 고난과 실패 그리고 성공
소비에트 러시아의 5개년 계획은 어마어마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서 무엇보다 흥미깊은 특징은 그 배후
의 정신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치상 또는 산업상 하나의 새로운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과학의 정신이었으며,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지난날 어느 나라에서든 아무리 진보한 나라라 할지라도 이 같은 일이 성취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계획이 지닌 가장 두르러진 특징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 대한 이와 같은 과학적 방법
의 적용이었다. 이제 와서는 세계 곳곳에서 계획이라는 것이 논의되게 된 것도 그 때문인데, 그러나 자본주의 제
도처럼 사회의 기저가 경쟁이나 재산상의 기득권 보호 아래 놓여 있는 것 같은 경우에는 계획으로 효과를 얻기란
어렵다.
1933년 스탈린은 집단 농장에서 개최된 한 농민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집단화된 모든 농민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 동지들, 유복하게 하는 일이다.
까끔 이런 소리가 들린다. 만일 여기에 사회주의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일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오래 전에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우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휴식할 때가 아닌가라고 한다.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 위에서만 구축된다.
... 사회주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착취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정직하게 일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느 저명한 미국 작가가 말했듯이 러시아의 노동자는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은 개인 간의 상호
의존 관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는 것을 배우고 있다.
곳곳에서 인민을 짓누르고 있던 빈곤과 불안에 대한 무서운 공포감을 제거한 것은 하나의 위대한 성과다.
빈곤과 불안에 대한 무서운 두려움의 제거는 소비에트 연방의 정신병들을 거의 근절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기할 것은 발트 해에서 태평양, 또 중앙 아시아의 파미르 고원과 힌두 쿠시 산맥에 걸쳐 있는
U.S.S.R에 거주하는 잡다한 여러 민족 간에 하나의 통일과 유대 관계의 성장을 보게된 점이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나치 정권의 출현은 러시아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침략적이고도 폭력적인 적을 갖게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직접 위협을 가할 능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장래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파시즘적인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182 과학의 전진
이런 성장의 부유함은 자연의 과정이 과학 지식에 의해 더 한층 대폭적으로 지배되었다기 보다는 차라리 한층
더 잘 이해될 수 있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주 최근 영국 과학 협회의 회장도 “자연의 지배는 인간이 자기를 규제할줄을 알기에 앞서 인간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 실로 많은 책들을 읽는데, 대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하찮은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좀처럼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읽은 책들은 좋은 내용들이었고, 그들은 그 책들을 충분히 읽어 소화
시켰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유럽 최대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학식과 지혜가 풍부하게 넘치는 사람이
었다. 그는 17세기에 암스테르담에서 살았는데 그의 장서는 고작 60권도 못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까닭에 우리로서는 이 세계에서 지식의 대팽창은 반드시 유익한 것도 아니며, 또 우리를 현명하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서 충분한 이익을 향수하기에 앞서 그 지식을 올바르고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알아야
만 한다.
에딩턴은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진보는 우리가 대답하는 질문의 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묻는 질문의 수
를 통해서 측정된다”
183 과학의 선용과 악용
우리는 자칫하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출현해 그 시대를 빛나게 한 위대한 인물 때문에 시대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일반 인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래도록 구시대 유물의 중압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과학은 얼마간 구제의 손길을 내밀었다.
184 대공황과 세계의 위기
사회는 자본주의로부터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배웠지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는 배우지 못했다.
미국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관심을 끄는 나라로, 자본주의 국가중에서 가장 앞섰을 뿐 아니라 아시아나 유럽이
과거에 가겼던 것 같은 봉건적인 뿌리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가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185 공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자연 과학의 승리는 더욱더 현저해 참된 부의 방대한 잠재력은 하등 훼손없이 잘 본존되어 있습니다.”
죄는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낳은 제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곤란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새롭고, 너무도 전례에 없는 일이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무지와 굴욕감을 가지
고 접근하고 있다.
186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미국과 영국
왜냐하면 그것은 국민과 정부를 자포자기하게 했으며,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들은 가끔 자기 나라 내부의 어려움
에 대한 해결책을 대외 전쟁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것은 독재자 내지는 소수의 과두 지배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들은 권력을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먼저 자기 나라를 전쟁에 돌입시킴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국내의 분규에서
딴 데로 돌린다.
더욱이 또 영국의 여러 은행은 외국 기업가의 업무 상황에 대해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손을 거쳐 유통되는 환어음을 통해서 그들은 독일이나 또 그밖의 나라들이 요구하는 상품의 가격부터 외
국 거래선의 이름까지 조사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는 외국의 경쟁 상대를 굴복시킬 방책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영국의 각 산업을 위해서는 매우 유익
한 것이었다.
또한 외국 정부가 이해 관계를 갖는 유가 증권의 매매에 사소한 흥정을 붙이거나 단기 대부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관계국 정부의 정치적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이 수법은 ‘고등 금융’이라 일컬어지는데, 제국주의 열강의 강제 발동 방법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것 중의 하나였
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187 달러·파운드 그리고 루피
‘인수필 어음’이라는 업무의 성격은 각 지역의 상황이나 업계에 정통한 숙련가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의 각 은행은 100년 동안의 경영을 통해서 그 업무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시일 안에 그들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의 자본이 미국의 금융 블록에 참가하자 런던측은 큰 타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막대한 양의 미국의 외국 환어음이 일일이 런던의 손을 거치지 않고 유럽의 환어음과
교환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자신들의 은행제도, 아니 오히려 세계의 외환 시장에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산업
을 희생시키야 했다.
파운드의 평가는 회복되었다.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영국 국내에서는 산업에 대한 타격에 기인하는 혼란이 잇따
라 발생했다. 거기에서는 실업과 장기간에 걸친 탄광 파업, 그리고 총파업이 일어났다.
돈의 참된 가치는 그것으로 무엇을 얼마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 즉 그만큼의 밀, 그만큼의 옷감, 그리고 그밖의
물품이나 필수품에 상당하는 만큼의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는 그것을 허용하는 범위에서 자체 조절된다. 화폐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이에 따라서 화폐의 가치도
떨어진다. 인위적으로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갖지 않은 인위적인 구매력을 부여하는 것이된다.
188 자본주의 세계의 분열
현대 세계에서 은행가나 금융업자가 수행하는 역할은 굉장히 거대한 것이다. 기업주의 시대도 이제는 지나가 버
렸다. 즉 공업.농업.철도.운송망,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정부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대은행가
인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이나 무역이 발달하면 큰돈이 끊임없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은행을 통해서 조달되
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의 사업 대부분이 신용으로 처리되는데, 그 신용을 확장하거나 제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대은행이다.
대은행의 두드러진 특징은 호황 때는 물론 불황 때도 어김없이 번영한다는 사실이다.
경기가 좋으면 그들은 사업이 번영한 데 따른 분배에 참여하게 되어 돈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을 수지가
맞는 이율로 대부한다.
불경기나 공황과 같은 나쁜시기에는 그들은 돈을 꼭 쥐고 함부로 쓰려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돈을 늘린다.
모든 것-농산물,공업 제품 등의 가격이 일제히 하락해서 많은 산업이 도산되면 거기에 은행이 찾아와서 모든 것
을 헐값에 사들인다! 그러므로 호경기와 불경기가 순환하는 것은 은행가에게 이익이 된다.
그 동안 영국의 산업과 시장에 새롭고도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값 싼 일본 제품이 곳곳에 범람했고, 더욱이 그것
은 관세를 부과해도 당하지 못할 만큼 값이 쌌던 것이다. 이처럼 낮은 제품 가격은 엔화의 폭락과 일본 소녀 노동
자들의 저임금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관세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제품을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상품에 대해 시장을 폐쇄하거나, 아니면 한정
된 양의 상품 수입만을 인정하는 할당 제도가 채용되었다.
만약 이런식으로 일본 상품이 여러 외국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되면, 일본의 방대한 공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의 경제 조직은 근저에서부터 붕괴될 것이며, 설혹 배출구를 찾아 낸다고 해도 경제적 보복 조처 같은 것 외
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이런 사태는 자본주의의 낭비적인 경쟁 밑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영국의 시장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 폐쇄된다면, 이들 나라 가운데 몇몇 나라는 경제
가 파산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가 목전의 이익만을 위해서 시행하는 조치는 다른 나라의 이익과 국제 무역을 헤치고 마찰과
분규로 끌어 갈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189 스페인 혁명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 서남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 두 나라는 우리가 보아 온 것처럼 일찍이 유럽
과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들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유럽이 공업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제국 내의 사건
들에 휘말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며, 성직자가 지배하는 뒤떨어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국수 민족주의자의 나라 스페인은 나폴레옹을 이길 수는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개방된 사상을 조금도
쓸모 있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1898년 미국과 전쟁을 치른 결과 스페인은 당시 남아있던 식민지의 거의 모두를 상실하고, 식민지로 남은 것이
라고는 본국에 인접한 모로코의 일부뿐이었다.
190 독일에서의 나치의 승리
나는 이탈리아를 언급한 이전의 편지에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 공황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혁명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생기는 것임을 지적했다.
유산 자본가 계급은 하층 중간 계급의 핵심 주변에 농민과 노동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을 현혹시키는 반자본
주의적 슬로건을 표방하는 대중 운동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이후 그는 사회 민주당에 대항해서 국가 사회당(nationle sozialist)이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나치(nazi)라는 말은 이 명칭에서 유래했다. 즉 nationale의 na 와 sozialist에서 zi를 취한 것이다.
나치의 강령은 명료하고 적극적인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서 독일과
독일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밖의 것은 가지각색의 증오를 끌어다 넣은 잡탕이었다.
독일의 굴욕을 표출시켰다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함으로써 이것으로 많은 사람을 나치에 모아들였다.
그것은 반마르크스주의,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이며, 노동자의 노동조합과 이와 유사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또한 유태인은 ‘아리안계’ 독일 인종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그 질을 저하시키는 외래 인종이라하여 반유태주의를
취했다.
또한 막연한 반자본주의로서의 이것은 벼락부자나 부유층에 대한 매도에 그쳤다.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사회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어떤 범위의 국가 통제 같은 정도였다.
이러한 가기각색의 강령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정상을 벗어난 폭력철학 이었다. 폭력이 찬미되고 창도되되었뿐
아니라 인간 최고의 의무로 여겼다. 저명한 독일의 철학자 오스발트 스펭글러는 이 철학의 대변자다.
그는 “인간은 피에 굶주린 용맹스럽고 교활하며 잔인한 동물이다.” “이상이란 비겁의 다른 이름이다”
“맹수는 움직이는 생명체의 최고형태”라고 했다.
그는 또한 “동정심과 화해와 마음의 평화의 이 빠진 감각”이라든가 “맹수에게서 질주하는 감정의 정수는 증오”
등의 말을 쓰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동굴안에서 단연코 대등자의 존재를 용납지 않는 사자와 같이 거동해야지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여기저기 쫓겨다니는 유순한 양 같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전쟁이 말할 필요도 없이 최고의 업무이며 기쁨이다.”
한편 사회 민주당은 제2인터내셔널과 협력 관계에 있던 영국의 노동당처럼 방대한 지지자를 산하에 두고 있는
유복한 광범위한 조직이었다. 따라서 안전과 지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구태여 모험을 하려 들지 않았다.
나치운동의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는 공통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히틀러의 대성공은 그들을 교묘히 조
종해서 하나로 결속시킨 데 있다. 이것은 공동의 적이 눈앞에 보이는 가운데 이룩한 것이다.
이제 그 적이 분쇄되고 또는 흡수된 이상, 좌우 양파 간에는 머지않아 대립이 전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치의 승리와 그 결과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에는 너도 틀림없이 동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파시즘이며, 히틀러 자신도 하나의 전형적인 파시스트다.
“마르크스주의를 종교가 그렇듯이 권위를 가지고 궁극의 진리를 정립하는 도그나마 종교, 또는 신념 으로 보아서
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철학이며, 많은 사물을 해명하고 그것을 연관시켜 파악하는 역사를 보는 방법이고, 사회주의와 사회
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법이다.
그 기본 원리는 각각의 시대나 나라에서 변화하는 조건들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응용돼야 한다.
히틀러는 오늘날 유럽을 죄지우지하면서 열강 또는 일찍이 강대국이라고 자칭하던 나라들을 그의 발 아래 굴복
시켰으며, 유럽은 그의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20년전 독일은 패배해 무너졌으며 분쇄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적 승리나 전쟁도 전치지 않고 히틀러는 이 나라를 승리에 넘치는 나라로 만들었으며, 베르
사유 조약은 사문화해 땅 속에 묻히고 말았다.
191 군비축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기와 파괴를 위한 기계의 제조 사업은 가장 수지맞는 산업으로 꼽힌다.
이런 무기는 여러 나라의 정부에 팔기 위해 제조한다. 원칙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오직 정부뿐이지만 기묘
하게도 무기는 사기업이 만들기 때문이다.
전쟁과 전쟁 준비는 이들 무기 회사의 이익을 의미한다. 그들은 대규모로 죽음을 거래한다.(그렇게 때문에 그들
을 ‘죽음의 상인’이라고들 한다.)
그들은 돈만 지불하면 누가되든지 상관없이 파괴의 기계를 팔아먹는다.
사기업의 무기 제조 상황 조사를 위해 국제 연맹에 특설된 한 위원회는 이들 회사가 전쟁 분위기를 선동하고,
자기 나라가 호전적인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을 벌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끔 스파이가 체포되면 곧 해당 정부에서는 그 관계를 부인한다. 이런 종류의 비밀 정보 기관에 대해 언급한
아서 폰슨비는 1927년 5월 영국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에 관해 세상에서는 가끔 도의상 논의가 교환되고 있지만, 우리는 세계의 모든 외무성과 외교 기관에서
위조.절도.거짓.뇌물 수수와 부정 행위가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 나는 일반적으로 공인되어 있는 도덕적 관습에 비추어, 만약 재외 외교 대표로서 주재국의 문서 속에서 기밀
을 탐색해 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직무에 충실치 못하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192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을 구하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부채를지지 않고 있으며, 단지 자기 나라 국민에 대해 채무를 지고 있을 뿐이다.
공황을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새로운 조건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대통령 루스벨트의 시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오지는 못했으나 부분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상황이 호전되었다.
대규모이 구제 계획을 실시하고, 고용주에게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의 단축을 권고해서 기업의 이익을 어는 정도
까지 노동자에게 양도시킴으로써, 이 계획은 성과를 올렸다.
193 의회 정치의 실패
노동자의 지도자들은 자주 그들의 무능과 노동자 이익에 대한 배반에 대해 지탄받곤 한다.
그들 대부분이 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들이 적의 진영으로 달려가고, 노동 운동을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발판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지도자는 책망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는 결국 현존하는 상황의 산물인 것이다. 보통 어떤 나라든지 그 국가
에 상응하는 지배자를 얻게 된다.
어떤 운동 또한 그 운동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갖게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자의 지도자나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삶의 신조인 사회주의가
즉각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제도와 너무나 깊게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노동자 정당, 노동 조합, 사회 민주주의자, 제2인터내셔널, 그리고 이런 종류의 모든 조직들은 그 목적이
희미해져서 자본주의의 전체 구조는 그대로 두고 단지 부분적인 개량만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상주의는 그들을 떠났ㅇ며, 그들은 참다운 힘을 갖지 못한, 살아 있는 혼이 빠진 거대한 관료 조직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 탐욕적인 경제, 이렇게 계획도 없고 낭비와 경쟁과 주기적인 공황을 동반하는 개인적인 약탈 정책은 끝장이
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 대신해서 어떤 형식의 계획적인 경제 내지는 협력 경제가 확립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반드시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나라는 유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준사회
주의적 기조에서 조직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주의와 국가 자본주의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누가 국가를 지배하고 누가 그것 때문에 이익을 얻느냐, 즉 사회 전체냐 아니면 특정한 소유자 계급
이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나 공산주의가 지배적인 지위에 오르는 것에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본가는 보통의 경우 이러한 파시즘의 물결과 타협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막는 데는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점차로 공산주의를 겁내는 자는 거의 모두 파시즘과 결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디서나 자본주의가 위험에 빠져 공산주의 내지는 그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면 반드시 파시즘이 만연한다.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의회 정치는 붕괴한다.
그러나 지금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내각 또는 정부이며, 하원은 단지 그것에 대해 ‘예스’ ‘노’를 말하는데
불과하다.
물론 의회가 ‘노’라고 하면 정부를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많은 곤란을 야기키기거나 총선거를 수반하기 때문에 좀처럼 취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정부가 하원에서 다수를 장악하게 되면 거의 어떠한 일도 의도하는 대로 할 수가 있으며, 의회가 그것
에 동의하도록 하여 그것을 법률화할 수가 있다.
권력은 이렇게 하여 입법부에서 행정부로 옮겨졌으며, 현재도 옮겨가고 있다.
현재 의회의 주요한 기능은 정부가 취한 조치를 비판하거나 질의.심리하고, 정부의 일반 정책을 최종적으로 승인
하는 일에 그치고 있다.
헤롤드 라스키도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정치는 의회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완화되어 행정부의 독재
정치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비민주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의 이상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참다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도 사이의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은 내재적이며 지속적이다. 그것은 가끔 그릇된 선전이나 의회와 같은 민주주의
의 외면적인 형식, 그리고 유산 계급이 다른 계급을 잠깐 동안이나마 만족시키기 위해 던져 주는 미끼를 통해 은폐
된다.
왜냐하면 잘못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제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제도가 존속하는 한 개인들의 행동도 그들과 같을 수밖에 없다. 지배적 지위 또는 특권적 지위에 있는 집단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외국 민족 집단이든 일국내의 경제력을 쥔 집단이든 간에 놀랄 만한 자기 기만과 위선에
싸여, 자신들의 특권은 미덕의 대가라고 확신하고 있다.
194 세계 정세에 대한 마지막 개괄
반 봉건적이며, 군부의 세력이 강하고, 지금은 공업면에서 고도의 진보를 이루고 있는 일본은 과거와 현재의 이상
한 혼합체이며, 세계 제국을 건설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몽상의 그늘에는 경제적 파탄과, 미국이나 광대한 무인 지대인 호주로 진출하지 못하는 엄청난 인구로
인한 무서운 궁핍으로 가득찬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195 전쟁의 그림자
이제 무엇인가 실질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을 움직이는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는 단 하나
의 세계사가 있을 따름이다.
196 마지막 편지
만일 네가 과거를 알려고 하면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과거를 보아야 한다.
옛날에 살던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너는 그들을 에워싼 환경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상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네가 동정의 눈초리로 과거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무미 건조한 뼈대는 갑자가 살과 피를 갖게 될 것
이고, 너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비록 우리와는 다르지만 매우 유사하며 서로 비숫한 장점과 단점을 지닌
남녀노소가 끊임없이 긴 행렬을 지어 살아 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역사는 신비한 구경거리가 아니지만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많은 신비가 있다.
매리 콜리지는 이렇게 노래했다.
과거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낸다. 실로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문화.문명.과학 또는 진리의 어떤 측면에 관
한 지식은 모두가 먼, 또는 가까운 과거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신세만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임무는 과거의 유산보다 더욱 큰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나간 것이요.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변경시킬수 없다.
그런데 미래는 앞으로 오는 것이고,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과거가 우리에게 진리의 어떤 부분을 주었다면 미래는 진리의 많은 측면을 숨기고 있어 우리는 그것을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끔 과거는 미래를 질투하고 사나운 힘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역사는 낡은 문제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외에 대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우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사상과 상상의 세계에 살기는 쉽다. 그러나 남의 불행에 눈감고 그들에게 어떤 일
이 일어나고 있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용기나 동포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상이 그 자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인도되는 것이라야 한다.
“행동은 사상의 종점이다”고 우리들의 친구 로맹 롤랑은 말했다. 만약 우리가 사상의 주인이 되려 한다면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행동에는 모험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후기
아라비아 해에서 오랫동안 속박에 익숙해있던 노예는 자유를 겁낸다.
그리고 우매한 인류는 너무나 빈곤엥 익숙해 있어 쉽게 생각을 전환시키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한계는 이제는 경제적 평등도 포함하는 데까지 넓혀져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모두가 그 세례를 받고 있는 혁명인 것이며, 경제적 평등을 확보하고 그리하여 민주주의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고 , 우리들 자신을 과학과 기술 진보의 대열에 어깨를 맞대게 하는 혁명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입히게 될지 모를 정도로 탄압이 광범위한 것은 그 사회
가 건전치 못하다는 징후이며, 국제적으로도 소비에트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끝
자와할랄 네루 (1889―1964)
작성자 (hc950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