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59호 은혜를 모르는 자에겐 미래가 없다 (대하24:15~25)
‘과거의 은혜를 생각할 것이냐, 현재의 이익을 생각할 것이냐?’
이 명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잊은 자에게는 절대 미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요아스의 이야기입니다. 요아스는 아달랴의 왕족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고모인 여호사브앗이 숨겨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다가 일곱 살 때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폐위함으로 요아스는 왕으로 추대됩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는 그의 가르침대로 선정을 베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나이 들어 죽자 간신배들의 말에 넘어가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를 보내 충고하였지만 요아스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보내 충언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널 오늘에 있게 한 여호야다의 아들 말은 들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요, 요아스는 스가랴를 죽여 버렸습니다.
누가 자기를 구해줬고, 누가 키웠으며, 누가 자기를 왕위에 올려놓았는지 잊은 겁니다. 성경에는 이 기막힌 일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대하24:22).
하나님이 당연히 신원하셨지요. 1년 후에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 요아스가 전장에 나갔는데 다쳤습니다. 그러자 요아스의 신복들이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왜요? 은혜를 모르는 놈은 죽어도 싸다 생각한 겁니다.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대하24:25).
은혜를 모르는 자의 결국은 이렇습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울이 골리앗으로 인해 고민할 때 어린 다윗이 나가 골리앗을 물리쳐주었고,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왔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갚기는 고사하고 시기 질투가 가득하여 되레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잘 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겁니다. 결국 사울은 그의 아들과 함께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나발이란 자도 그랬습니다. 양털을 깎는 잔칫날이 되자 다윗은 나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먹을 것을 구합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당당히 요구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광야에서 나발의 목자와 양들을 노략질하려는 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었기 때문입니다(삼상25:7). 그런데 나발의 반응이 아주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
‘나는 그런 자를 모른다, 못 준다’ 이겁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이 나발을 치시매 그는 죽었습니다(삼상25:38).
가룟 유다도 동일합니다. 가장 신임하는 자에게 돈궤를 맡기는 법,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돈궤를 맡기신 것은 그만큼 믿으신 거죠.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은 삼십 냥에 스승인 예수를 팔았습니다. 그 결과요?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요.
제가 신학교를 보내고, 안수해서 주의 종을 만든 제자 중에도 저를 배척하고 저주하고 떠난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제자는 저를 보자 무슨 전염병 환자를 본 듯 다가오지 말라며 도망치더라고요. 그런 자가 잘 될까요?
반면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어찌하든 갚으려고 했던 자들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이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존해있음을 알고 그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소유지를 다 주고, 자신과 평생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바실래라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았습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하나임에서 피난하고 있을 때 다윗군에게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공궤에 감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바실래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은혜를 갚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자기 대신 아들과 동행을 원했고, 다윗은 바실래의 아들에게 그동안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은혜를 갚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임종할 때 아들 솔로몬에게 바실래의 후예를 잘 대우하라고 유언합니다(왕상2:7).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함구하고 옥으로 향했던 것은, 그간 자기를 믿고 가정 총무로 써준 보디발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늦었지만 자신을 구해준 모르드개에게 은혜를 갚지 않았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짐승 같은 인면수심(人面獸心), 쓸모가 없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버려버리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이거 아주 나쁜 처사입니다. 하긴 부모도 늙어 힘없고 쓸모없으니까 내다 버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말하면 뭐 합니까? 하나님을 토사구팽하는 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어느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장가들어서’ 못 간다고 했습니다. 이에 초청한 사람이 노를 발했지요. 직장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그렇게 매달리더니 취직되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을 잊는 자, 집 달라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집을 주시니 자기가 이룬 듯 하나님을 몰라라 하는 자, 그런 자가 하나님을 토사구팽한 것입니다. 누가 줬는데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겨야 사람이지요. 그러지 아니하면 언젠가 하나님이 그를 팽(烹)하실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103:2).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우리 구원이 우리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셨습니다(고후9:8). 이 은혜를 잊지 말고 갚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라고 했습니다. 제비도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어 은혜를 갚습디다. 미물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사무쳐 자기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주리고 헐벗으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 맞았고,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듣고도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주님의 은혜에 보답고자 기꺼이 한목숨 내놓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 열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다시 찾아와 감사한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습니다(눅17:11~19). 여러분이 그 한 명이 되십시오. 취직시켜준 사람, 창업할 때 함께 고생한 사람, 개척할 때 함께 했던 성도들, 단칸방에서 함께 고생하던 아내,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키워주신 부모님,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목사님,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절대 잊지 맙시다. 할렐루야!
과거의 은혜를 생각할 것인가 현재의 이익을 생각할 것인가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그 은혜를 잊지 말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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