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80년대 말미에,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이 있었다.
그런데, 김민기는 이런 말을 했다.
왜 필이는 나라에 대한 노래 즉 언필칭
대중성의 노래만 하느냐 다시 말해서
80년대의 암울한 군부정치의 말 못하는 시대에서
벙어리의 심정을 달래는 노래는,
왜 안 부르냐는 말을 했다.
그 때 조용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80년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할 때 70년대의 박정권의 탄압이라는 것은
젊은 층의 소위, 저항가요는 무조건 절판되어
버렸다. 대충 보아도 요즘 신세대들이 본 영화
세시봉에도 나올 것이다. 한 번 보라......
그 때 긴급조치 9호가 내려지고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서울의 봄이 오나
했는데 그만 신군부의 한층 더 굴욕의 역사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용필이라고 이런 걸 몰랐겠는가?
자기가 회고하기를 1집 음반 즉 창밖의 여자--아런
노래는 왜 그렇게 한이 한층 더 서렸는지 모르겠다고.......
그건 할 수 없다 그 때 시대 상황이 그랬다.
전 국민이 들끓었고 5 18 광주사태가 있었다.
용필이 오빠야라고 우리나라 사정에 대해 왜 몰랐겠나
외국에 가면 더 잘 알지..........
정규 앨범 4집에 생명이라는 노래가 있다.
용필이 오빠야는 이랬다. 나는 정치에 무관하다
하지만 광주의 일은 나로서도 묵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만들어 진 노래가 생명 이노래는 정부의 지참에 의해
몇 번이나 수정되었고 할 수 없어 그런 대곡으로 밖에 나올 수
없었다. 80년대는 용필이의 시대였다. 모든 방송 가수왕을
휩쓸고 노래에 음반에 대한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치웠다.
생명의 작사를 한 전옥순 여사를 어머님처럼 여겼고
개구멍으로 듣던 시인 김지하는 언 놈이 이런 노래를 불렀냐며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과연 김민기의 말대로 노래에도 벙어리가 있었느냐고
---- 있었다.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 한 노래
그래 그때는 그랬다. 누군들 아니 부르고 싶었겠는가
내 생각에 용필이 오빠야는 그러한 소위, 정치성향의 노래
학생 운동 가요 저항가요에 대한 욕심이 왜 없고
그저 인기만을 누리려 했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80년대를 호령하던 천하의 용필이 오빠야는
그런 식으로는 말로도 대중들에게 안식처 같은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게 더 부합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 저항에 대한 여러가지의 부류가 있겠지 하지만,
용필이 오빠야의 허스키한 보이스에 한을 담아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벽을 허무는
큰일을 한 아티스트다. 그러하지 않겠는가?
김민기와의 만남 이후 용필이 오빠야는 허공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정욱 작사 정풍송 작곡 --- 이 노래 가사를 자세히 음미 해 보자
어떤가 둘러치기 한 것 같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어떤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언론이 통제되고 모든 선각자들의 발을 잡고 있던 시절
누가 옳고 누가 그러다 보다도 이 세상을 비겁하다고 치부하기 보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지혜가 우선이 아니겠는가?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변호인의 진우 어머니 돼지국밥집 어머니를 보라!!!!!!!
그 모성 그 모성 그것이 진정한 바다요 진정한 대지요!!!!~~~
그것이 생명이 아니겠는가......
이제 데뷰 50주년 기념 콘서트가 끝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간 용필이 오빠야
이제는 이 시대는 바보인 우리 사회 약자인 우리 장애우들을 위한
노래를 한 번 불러주었으면 어떨까 싶으다. ㅋㅋㅋ
왜 우스운가 그래 한번 편지라도 보내 봐야겠다
허공 속에 묻힌 그날들------
우린 허공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는 허공이다.
그래 생명과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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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필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