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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담긴 희망의 뿌리
호세아서 1:3~11
1: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호 1: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사자성어 중에 조변석개 (朝變夕改)란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바꾼 것을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계획이나 결정이 일관성 없이 자주 바뀌는 것을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조령모개 (朝令暮改)란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뜻입니다. 주로 정책이나 법령이 갈팡질팡하여 백성들이 믿지 못하게 된 상황을 일컫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나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다. 아침에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저녁에는 저렇게 바뀌고,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척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나눈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6절)”,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9절)”라고 서슬 퍼런 심판을 선포하시던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 구절인 10절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며 엄청난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바뀌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변덕이 이나라 죄를 미워하시는 ‘공의’와 죄인을 포기 못 하시는 변함없는 사랑이 맞부딪히며 일어나는 충돌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꽁꽁 얼어붙은 것 같은 진노의 말씀에서도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희망의 뿌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호세아 가정에 나타난 세 자녀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이스르엘에 담긴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눈 바와 같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취하여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좇아 호세아는 고멜을 맞이해서 결혼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는데 고멜이 낳은 첫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이스르엘이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스르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흩으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르엘은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서 아합 왕조를 끝낸 곳이기도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피를 갚는다고 하시면서 예후 왕조의 몰락뿐 아니라 호세아선지자가 속한 이스라엘 역시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다긴 것이 고멜의 첫아들 이스르엘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는 호 1: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대로 전혀 소망이 없는 멸망에 대한 예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르엘의 의미에는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으신다’라는 긍정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농촌에서는 겨울철과 초봄에 행해졌던 보리밟기가 있었습니다. 밭에 심어진 보리 씨앗이 겨울을 이기고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자라게 되는데 이때 언 땅이 녹으면서 뿌리가 흙에 밀려 올라가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고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밟아 주는 것입니다. 보리밟기는 온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보리밭을 밟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겨울철 놀이 중 하나이기도 했지요. 보리밟기는 희망의 노래이며 기쁨의 노동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하시는 섭리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는 계획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패망을 선언하시면서 새로운 생명의 은혜를 예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호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저들의 멸망을 통하여 새로운 세대를 이뤄내시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의 예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에 아무리 심한 고통의 환경이요,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할 수 있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고 깃들여 있음과 더불어 내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손길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임을 믿고 희망의 뿌리를 단단하게 잡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멜이 낳은 첫딸의 이름인 로후하마에 담긴 의미입니다.
호 1: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의 '로'는 영어의 No라는 뜻입니다. ‘루하마’는 ‘자비’를 뜻합니다. 그러니 ‘로루하마’는 No Mercy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는데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속한 조국이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으나, 영적으로는 극심한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불가피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보호를 받고 생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줄이 끊기면 하늘을 향하여 날아올랐던 방패연이 바람에 의하여 요동치며 땅으로 처박아 내리는 것처럼 인생은 파멸의 웅덩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 사라진 비극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희망의 뿌리인 남유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족속을 긍휼히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며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질 유다 족속을 보존하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구원하시되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다고 선포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은 군사력과 정치를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은 무기나 외교력에 있지 않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로루하마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버림받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회의감이 생기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고 이 세상에 나홀로 고립되어 있는 듯할 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끌고 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하면서 이 여인은 마땅히 율법에 의하여 돌로 맞아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여기서 율법과 예수님의 사랑이 대치되면서 사랑에 드리워진 희망의 뿌리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며 침묵하심으로 인간의 살기 어린 폭로의 현장에 거룩한 정적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난의 화살을 치욕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내몰린 여인에서 각자의 내면에 있는 양심으로 돌리게 하였으며, 결국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모든 이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게 만듭니다.
모두가 떠나고 여인과 단둘이 남았을 때, 예수님은 유일하게 그를 돌로 칠 자격이 있는 죄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죄 대신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를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직시하시되, 그 죄가 여인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단순히 처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노릇하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 생명의 회복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율법에 따르면 여인은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그 여인이 받아야 할 '정죄의 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맞으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살려내는 복음적 공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돌을 들었던 자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착각했으나,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 앞에 단독자로 설 때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는 고립된 씁쓸함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무한한 사랑을 가지시고 여전히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눈여겨보시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옴을 믿고 나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므로 회복의 은혜를 입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로암미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호 1:8,9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맺었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 관계가 공식적으로 파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가장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로루하마의 ‘긍휼 없음’에서 로암미 ‘내 백성 아님’으로 로 이어지는 과정은 죄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질 때, 결국 창조주와의 관계 자체가 끊어지는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됨을 경고합니다. 이는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처한 절망적인 상태를 대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처지에서 말입니다. 이스르엘은 호 1:3의 원어에서 “고멜이 그(호세아)에게 아들을 낳아 주니라”라고 하면서 호세아 선지자의 핏줄을 이어받아 낳은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둘째와 셋째의 기록에는 “호세아에게(to him)”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로미루어 많은 성경 주석가들(예: 칼뱅, 카일-델리치 등)은 이 표현의 생략이 고멜의 외도를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 성경이 ‘이들은 호세아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직설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지만, 문맥상의 생략과 ‘음란한 자식들’이라는 표현을 볼 때, 로루하마와 로암미는 고멜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으로 보는 견해가 매우 지배적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은 콩가루 집안입니다.
음란한 아내 고멜은 신뢰를 무너지게 했고, 아버지가 각기 다른 아이들이 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비록 음란한 여인이지만 그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하와를 짝지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마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남의 자식을 임신해 온 아내와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들까지도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혼돈과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둠에 처해 있을 때 고통 받을 때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철학자가 됩니다. 즉, 어둠에서 작은 빛줄기를 필사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소재가 됩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더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죄에 대한 진노요, 심판입니다. 만약에 이것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인류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에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무엇으로도 꺽을 수 없는 희망의 뿌리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으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죄인된 인간을 신부로 삼아 그들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로 이어지는 품을 수 없는 자식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소양이 전혀 없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를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적(Total)’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인해 오염되었기에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고, 죄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전적으로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 치우쳐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사람도 결혼이란 계약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고뇌의 시간을 지내야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언약으로 이뤄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비록 그들이 우상숭배와 갖은 죄악으로 하나님을 저버렸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멸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하여 희망의 뿌리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행위와 모습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지만,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악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희망의 뿌리가 있음을 믿고 주께로 돌이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희망의 뿌리,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 더욱 빛나는 소망의 계획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