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북한의 남침 개시와 휴전
a. 전말(顚末)
(a) 북한의 기습 공격
ㆍ1950.6.25.(주일) 새벽 4시 남한이 먼저 선제공격을 했다면서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ㆍ6.26. 김일성은 남한을 ‘해방’시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방송하였다.
ㆍ6.27. 북한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출하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인민군 전차 258대, 중박격포 1600문, 군용기 172대, 병력18만 명.
(b) 유엔군의 파견
ㆍ6.27. UN은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침략군 응징과 자유평화 수호를 위해 UN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ㆍ7.1.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에 있던 미(美)지상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트루먼은 미국의 해ㆍ공군(海空軍)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ㆍ7.7. 유엔은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21개국(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195만여 명의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ㆍ7.14.~9.13. 북한은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청·소년을 의용군으로 강제징집하여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였다.
(c)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ㆍ9.15. 새벽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 다음날 인천을 함락시켰다. 맥아더는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며, 북한군은 부산에 병력을 집결하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소홀하고, 수도 서울의 탈환은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ㆍ9.29.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서울에 진입하고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어 패주하였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은 38선을 향하여 북진하였다.
(d) 한국의 통일문제와 38선 돌파
ㆍ9.27.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북진을 주장했고, 미국은 38선 이북의 군사작전을 허가하였다.
ㆍ10.1. 한국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상하였고,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북진에 대한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ㆍ10.7. 유엔총회가 유엔군의 38선 넘어 진격을 허락함으로 유엔군의 북진도 본격화하였다. 맥아더는 북한에 항복을 권고하고 유엔에 협력하기를 권하였다.
ㆍ10.9. 북경방송은 10.7.의 유엔결의는 위법이며, 중공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ㆍ10.10.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 제1군단은 원산을 점령하였고,
ㆍ10.26. 미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ㆍ10.15. 김일성이 인민군에게 후퇴명령도 내리지 않고 평양을 떠나 도망쳐버렸다.
ㆍ10.20.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제8군은 평양을 점령하였다.
ㆍ10.24. 맥아더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와 10군 단장 알몬드에게 “전속력으로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ㆍ10.29. 이승만 대통령은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해방과 통일 의지를 명백히 하였으나 유엔은 한국의 권한을 38선 이남에 국한시켰다.
(e) 중공군의 참전과 후퇴
ㆍ11.4. 중공은 참전을 공식 발표하였고, 그 표어는 ‘항미원조보가위국’이었다. “조선 정부를 존중하고, 조선 인민을 애호한다.”는 원조(援朝)가 강조되었다.
ㆍ11.7. 만포에서 10월 혁명기념일로 모여 김일성과 박헌영이 패전 책임을 서로 전가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비판하고, 박헌영은 김일성이 인천지역방어 인민군 18사단의 낙동강전선 이동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저지시키지 못했다고 따졌다. 김일성은 일단 박헌영을 회유하여 인민군총정치국장에 임명하여 달랬다.
ㆍ11.21. 한국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 연안인 혜산에 이르렀다.
ㆍ11.24.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시 주춤하였던 연합군은 다시 압록강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격을 재개하였다. 이 날 맥아더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ㆍ11.25-26. 중공군 18개 사단의 병력이 서부전선을 공격해 옴으로써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ㆍ11.28. 맥아더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특별성명을 유엔에 보냈다. 미국은 맥아더의 만주폭격 주장에 대해 전쟁의 확대(소련의 개입)를 우려하여 부정하였다.
ㆍ12. 중공군의 진격으로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후퇴하여 원산·흥남선에서,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후퇴하여 30도선 근처에서 머물렀다.
ㆍ12.24.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이 되고, 혹한과 고전 속에서 흥남 철수가 바다를 통해 완료되었다.
12.26.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f) 1·4후퇴와 반격
ㆍ1951.1.4. 공산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다. 이것이 ‘1·4후퇴’이다.
ㆍ1951.1.25.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며 전진을 계속하였다.
ㆍ2.10.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다.
ㆍ3.14.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ㆍ3.24. 38선을 다시 돌파하였으며, 트루먼은 38선을 약간 넘은 선에서 휴전을 위한 유리한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다.
ㆍ4.11. 트루먼은 휴전을 반대하는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고 후임에 릿지웨이 제8군사령관을 임명하였다.
ㆍ1951.4. 공산군은 7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하였고, 이에 대한 역공세가 되풀이되면서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미국이 제한전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전반적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ㆍ1951.5.3. 박헌영은 휴전 이야기가 나오자 월북한 젊은이들로 빨치산부대 편성하여 대남사업을 할 유격대를 창설하였다. 박헌영의 전투 의지는 휴전을 고대하던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었으며 제거 대상이 되었다.
(g) 휴전회담 개시와 결렬
ㆍ7.10.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38도선을 넘어 있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했고, 공산측은 38도선의 원상회복을 주장함으로 회담은 중단되었다. 회담이 중단되자 전투는 다시 격렬해졌다.
ㆍ10.25.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의 제안으로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공산측은 접촉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포로 송환 문제에서 서로 대립하였다. 유엔군측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송환을 주장한 반면, 공산측은 모든 포로는 원래 소속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회담은 다시 중단되고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며 필요하다면 한국군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다.
ㆍ1952.6.18.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사전예고도 없이 2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다.
(h) 휴전 협정
ㆍ1953.1.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확전 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게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하였다.
ㆍ2.7. 김일성은 소련의 지시로 박헌영을 체포 감금하였다.
ㆍ3.5.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ㆍ7.27. 휴전 협정은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펑더화이가 서명을 하였다. 휴전 협정은 전쟁 발발 3년1개월 만에, 회담 개시 24개월17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남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며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ㆍ1956.3. 박헌영은 ‘미제국주의 고용간첩과 정부 전복 음모’의 죄목으로 대성산에서 총살로 사형집행 되었고(57세), 북한으로 간 남로당은 뿌리가 뽑혔다.
b. 6·25 전쟁의 피해와 영향
ⅰ. 사망 150만 명을 포함하여 5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좌우(左右)내전이며, 많은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을 발생시킨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불의한 전쟁이다.
ⅱ. 공장과 같은 산업 시설과 학교, 주택, 도로, 교량 등이 파괴되어, 이후 몇 년 동안 남북한 모두 전쟁 복구에 온 힘을 쏟아야만 하였다.
ⅲ. 전쟁으로 민족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으며, 서로 불신하고 적대하는 감정이 깊어지는 가운데 한반도의 분단 체제가 더욱 공고해져 갔다. 이산가족의 아픔과 민간인 학살로 인한 고통, 미귀환 포로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ⅳ. 전쟁 이후 반공(反共)은 한국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되었으며, 정부는 국가 보안법을 개정하고 반공 교육을 강화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ⅴ. 중국은 6·25 전쟁 개입으로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대적함으로써 중국은 사회주의권 내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ⅵ. 일본은 전쟁 특수에 힘입어 심각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났으며, 오늘날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여 재무장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