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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요한복음 13:1~11
어떻게 사랑할까요?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내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병원을 데려갔지만, 병원에서도 마땅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집에서 아내를 간호해야 했다고 합니다.
아내를 오랫동안 간호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자, 목사님은 지쳐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성도가 집에 찾아와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제일 원하시는 게 뭘까요?” 어리둥절하며 대답을 못 하는 목사님에게 이 성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건, 목사님이 함께 계시는 거예요. 맞죠, 사모님?”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모님이 말은 못 하지만, 눈을 찔끔하더랍니다. “사모님, 목사님이 옆에 같이 계시는 것이 가장 좋으시죠?” 사모님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지, 흐느껴 우는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어졌습니다. 성도가 말을 잇습니다. “목사님, 보세요. 목사님이 더 많이 옆에 계셔주기를 사모님이 원하시잖아요?”
-출처: 김병년, 「바람 불어도 좋아」(IVP, 2013);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2월호), 85쪽에서 재인용.
누군가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 있는 일입니다. 아픈 가족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일이 힘들어도, 그것처럼 가족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환자를 위해 자기의 신장을 떼어 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신장 떼어 주어 다시 살아난 그 환자를 날마다 생각합니다. 그 사람하고 전화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합니다. 왜냐구요? 그 사람과 생명을 같이 나누었으니까요. 내 신장을 이식받아 살아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생명 하나 살렸다는 그 기쁨이 내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출처: 옥한흠, 「하나님 사랑의 승리」(하온,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월호), 179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습니까? 나와 생명을 함께 나눈 사람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깊은 친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내어주고 우리를 살리셨다면,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실 때도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을 주신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함께 나눈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일도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럽고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함께 나눈 믿음의 가족들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복음은 13장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급하게 진전됩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 이야기와 고별 설교, 그리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 소개될 것입니다.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때”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주 소개되는데, 이전까지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었습니다(7:30; 8:20).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붙잡고자 했으나, 아직 그분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붙잡히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 처형을 실행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배후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일을 조력했던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미”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을 먹은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에 품고 있던 일이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나쁜 마음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으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적당한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런 가룟 유다의 생각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1절에는, 예수께서 이미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을 배신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쉽지 않은 이야기지요? 나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도 그런 자와 동행하고, 심지어 그런 자까지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는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은 시간적으로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도 “그를 온전히 사랑하셨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팔 가룟 유다를 겉으로만 사랑하고, 속으로는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겉과 속이 같은 진실 된 사랑을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베푸실 수가 있었을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조금만 나에게 섭섭하게 말하거나 행동해도 우리는 쉽게 상처받고, 미워하기 쉬운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교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에는 선택이 필요하고,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 빼앗는 자가 있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노라(10:18).”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발을 당하실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빌라도는 크게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 27:11~14).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자기를 공격하는 대적자들과는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선택한 자에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을 선택할 권리도 있고, 미움을 선택할 권리도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선택할 권리를 우리를 맡기실 때는 우리를 믿고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네가 세상을 살면서 선택했던 일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니?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서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후회함이 없이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얼마 전, 미국 챨스턴의 한 흑인교회에서 증오 범죄가 발생했었습니다. 한 백인 청년이 흑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총을 쏴서 예배를 드리던 흑인 9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악을 만나 피해를 입은 교회는 전혀 낯선 선택을 했습니다. 범인을 증오하고 보복하기보다는 용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2006년에도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의 학교에 괴한이 침입해서, 공부하고 있던 다섯 명의 학생들을 칠판 앞에 세워 놓고 총으로 그들을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아이가 중상을 입어야 했고, 괴한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사건 이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피해를 본 아이의 부모가 가해자의 부모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해자의 장례식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관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을 위해 곳곳에서 들어온 성금을 가해자의 가족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오늘 우리에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용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만약 흑인교회 교인들과 작은 마을 사람들이 용서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끔찍한 악을 만나 상처받거나 고통을 경험하게 될 때, 내면에 두 가지 어둠이 생깁니다. 하나는 보복하려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절망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복수의 칼을 갈든지, 아니면 절망으로 자기를 학대합니다. 둘 다 비극입니다.
악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보복하려는 마음과 절망의 마음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복하려는 마음과 절망하는 마음이 절대 아름답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됩니다.
-출처: 이훈, 「예수께로 가는 길」(두란노, 2017);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2년 3월호), 185쪽에서 재인용.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세로 우리가 사랑과 용서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종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가다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 닦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주인을 섬기던 종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벗으신 “겉옷”은 헬라어 원어에서 복수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겉옷 한 벌만 벗으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두 벌 이상의 겉옷을 벗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처럼 최소한의 의복만을 입으신 채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몬 베드로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자기들의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당황하며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역시 베드로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몸이 깨끗하나 너희가 다는 아니니라”라고 대답하셨고, 이는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종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기 위해서도 ‘종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기독교 역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1세기 제자는 단순히 스승이 아는 것을 알기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자네는 랍비의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군”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랍비를 그만큼 가까이서 졸졸 따라다녀서 랍비가 흙을 밟을 때마다 날리는 먼지가 온몸에 붙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는 스승이 어디를 가든지 제자는 바로 뒤에서 따라다녔다는 의미였습니다.
-출처: J. D. 그리어, 「모두의 질문」(두란노,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2월호), 169쪽에서 재인용.
예수께서 이러한 종의 마음과 자세로 제자들을 섬기셨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예수님처럼 종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1908년,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이 경험한 이야기는 우리에는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는 남극을 탐험하면서 너무도 힘들고 배고픈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건빵을 모든 대원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었습니다. 몇몇은 손에 붙은 부스러기까지 핥아 먹었고, 또 다른 몇몇은 다음을 대비해서 먹고 싶은 욕구를 참으로 가방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날 밤, 새클턴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부하가 옆에 있는 동료의 식량 주머니를 꺼내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새클턴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니, 저 친구가 왜 남의 식량 주머니를 뒤지지? 저럴 친구가 아니었는데…” 그는 실눈을 뜨고 그다음 벌어질 광경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하는 자신이 먹지 않고 남긴 건빵을 텅 비어 있는 동료의 가방에 몰래 넣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큰 울림을 줍니다. 인간의 욕망은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주는 삶을 넓혀 갑니다. 나이든 철학자는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살 것인가’를 물었을 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삶’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의 나이, 영적인 나이가 드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출처: 박신일, 「평생의 순례자」(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59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나를 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에는 선택이 필요하고, 그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원수를 용서하려고 선택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종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결단할 때, 세상 사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