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 예술가 100년 서화 명인 인감 전각 낙관 : 오자복 吴子复
近百年书画名人印鉴112:吴子复
소스: 이페어케이
오자복(吳子復, 1899~1979)은 본명감(本名監), 일명 완(琬), 자는 복(復), 후(後)는 자행(字行)으로 별호는 영재(寧齋)·완려( 。庐)·복서(福叟) 등이며, 본관은 광동사회(廣東四會)로 광주 서관에서 태어났다.근현대의 뛰어난 서예와 조각가, 미술 이론가, 중국 초기의 유명한 유화가, 정치가.
1899년 3월 25일생으로 1922년 광주시립미술학교 서화과에 입학하여 호근천(胡根天), 풍강백(豊鋼百)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1926년 졸업하였다.1927년 이화(李桦)·조세명(趙世銘) 등과 청년예술사를 조직하여 《청년예술(靑年藝術)》을 편찬·배포하여 서양의 새로운 예술을 소개하고 전파하였다.흥한 회화 예술은 근대 광동 미술 서클 활동의 선구자이다.1932-l936년 모교에서 서화과 교수로 초빙되었다.1940년 이후에는 광둥성립예술전문학교 미술과 주임을 맡았다.1949년 이후 광저우시 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회 위원, 광둥성 문학예술계 연합회 위원, 광저우시 문학예술계 연합회 위원, 광둥성 서예전각연구회 부주임, 중국미술가협회 광동지회 회원을 역임했다.
서양의 회화 관념으로 동양 예술의 정취를 조화시킨 유화 예술로 색채가 명쾌하고 조형이 간결하여, 치졸하고 단순한 풍격을 형성하였다.왕년에 유화를 잘 그렸으나 국화를 잘 그리는 사람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현재 볼 수 있는 작품은 대부분 60~70년대 작품이고, 제재 면에서는 산수가 많다.그 산수를 통틀어 보면 여전히 전통적인 필정묵취일로에 속하며, 구상·의경 및 필법은 문인화의 정취를 많이 띠고 있으며, 그림에는 시인·문인의 사상이 녹아 있다.계산을 그릴 때나 무림이나 초가집을 그릴 때나 늘 여유로운 정취와 문인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고, 전통만 고집하는 국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판도, 서양화의 풍격과 잘 어우러지는 국화에서 볼 수 있는 장양도 없다.색채와 기법 면에서 고법과 서법이 합쳐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그림은 "옛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육법을 고수하며, 색채가 조화롭다"는 설이 있다.그 그림은 작은 시를 접착하여 화면 밖에서 그 내용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
화예를 부지런히 익히면서도 서예를 즐기다.초기의 서예는 하소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서의 명가 임직면에 의해 감염되어, 마침내 전문적으로 서예 연구를 하였고, 아울러 전각에 이르렀으며, 만년에도 수묵산수화를 썼다.한비를 배우려면 한 단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6가지인데, ''라고 배열되어 있다.예기비, 장천비, 서협송, 석문송, 삽각송, 교관비.이 여섯 가지 한비의 점획 형식은 모든 서예의 점획 형식이라고 여겼던 조상들이 위진 이후의 서법은 모두 가지를 쳐서 예포를 나누지 않았다.한평생 한비에 힘쓰면서 《호대왕비》, 《예기비》, 《삼공산비(三公山碑) 제사에 더욱 공을 들였다.평소에 예서를 짓는 데 한 칸을 제한하지 않고, 비각에 힘을 주고, 서풍이 고풍스럽고 고아하며, 치졸하고 순진하며, 그 서예는 대개 평화롭고 수려한 미모와 희석된 고풍을 신으로 하고, 파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옛 운과 조화시켜 자신의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는데, "오예"라는 별명이 있어 광동 서단에 깊은 영향을 주는데, 그 문하 장역운·관효봉이 무슨 문하였던가.등의 다양한 제자들이 모여 큰 유파를 형성했다.서예의 대표작으로는 광주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총리 유언장 각석(1931)》, 광주 월수산 《진해루( 楼海樓)》, 《광주박물관(廣州博物館)》 횡액(1951), 화현 홍수전(洪秀全) 가옥 《홍수전 기념비》, 광주 봉기열사 능원 《중조혈의정비문(中朝鮮 血義亭碑文)》, 《중소혈의정비문(中蘇蘇血義亭碑文)비문(1963), 조경칠성암마암마암마암시애석( 七星)》 등이 있다.
전각(全 影响)은 서예의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자기만의 풍격이 형성되어 있어 근대적 인단(印壇)으로 손색이 없다.마국권은 "만년에 인쇄한 것은 순전히 그의 서법으로만 나온 것이며, 완저 절강성을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진한을 막론하고 인유가구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장구문론적으로 1930~40년대 신구국화논쟁에 관한 글들이 많이 쓰였고, 그 영향은 당시에 비교적 컸으며, 근대 중국 미술사에서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오자복예서책』 『오자복서호대왕비』 『야의루인상』 등이 있다.
1979년 8월 24일 광저우에서 8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吴子复(1899-1979),原名鉴,又名琬,字子复,后以字行,别号宁斋、澐庐、伏叟等,原籍广东四会,出生在广州西关。近现代杰出的书法篆刻家、美术理论家、中国早期著名的油画家、政治家。
1899年3月25日出生,1922年考入广州市立美术学校西画系, 师从胡根天、冯钢百学习绘画,1926年毕业。1927年与李桦、赵世铭等组织青年艺术社,编印《青年艺术》,介绍和传播西方新兴的绘画艺术,是近代广东美术社团活动的先行者。1932-l936年受聘于母校任西画系教授。1940年后任广东省立艺术专科学校美术系主任。1949年后历任广州市政协文史资料研究委员会委员、广东省文学艺术界联合会委员、广州市文学艺术界联合会委员、广东省书法篆刻研究会副主任、中国美术家协会广东分会会员。
其油画艺术以西方的绘画观念融汇东方艺术情趣,色彩明快,造型简练,形成稚拙单纯的风格。早年擅长油画,鲜有知其擅长国画者。现在所能见到的作品,多为六、七十年代所作,题材方面则多为山水。其山水总的来讲仍属于传统的笔情墨趣一路,构思、意境及笔法多具文人画之意趣,在画中融合了一个诗人、文人的思想。无论是画溪山,还是画茂林,抑或茅屋,都充满了轻松的情趣和文人的情思,既没有那些一味坚守传统的国画中常见的古板,也没有那些完全融合西洋画风格的国画中所见到的张扬。在色彩、技法方面可以说集古法与西法为一体,有论者称其画“饶有古意,墨守六法,色彩谐和。”其画常缀以小诗,在画面之外,能深层次地了解其内涵。
在勤攻画艺的同时,亦爱好书法。早年书法受何绍基影响,后受隶书名家林直勉的感染,遂专意作书法研究,旁及篆刻,晚年也写水墨山水画。主张学习汉碑需有层次,由简到易,其中最主要的有六种,排列为《礼器碑》、《张迁碑》、《西狭颂》、《石门颂》、《郙阁颂》、《校官碑》。认为这六种汉碑的点划形式是一切书法点划形式的祖宗,魏晋以后的书法无不从此枝分叶布。一生致力于汉碑,对《好大王碑》、《礼器碑》、《祀三公山碑》用功尤深。平日作隶书,不限于一体一格,熔铸诸碑刻,书风道劲古雅,稚拙纯真,其书法大抵以平和秀雅为貌、以冲淡古风为神,波澜不惊,平铺直叙,将己意与古韵相结合,形成自己的独特书风,有“吴隶”之称,对广东书坛影响至深,其门下张奔云、关晓峰、何作朋、李伟、李家培、林少明、陈景舒、陈作梁等,均有众多弟子,形成一大流派。书法代表作有广州中山纪念堂《总理遗嘱刻石》(1931)、广州越秀山《镇海楼》横匾、《镇海楼长联》、《广州博物馆》横匾(1951)、花县洪秀全故居《洪秀全纪念碑》、广州起义烈士陵园《中朝血谊亭碑文》及《中苏血谊亭碑文》(1963)、肇庆七星岩摩崖刻石朱德诗(1978)等。
其篆刻虽远不及书法影响之大,但已形成自己风格,在近代印坛可圈可点。马国权认为他“晚年作印,纯以其书法出之,固无视皖浙,亦不论秦汉,自用印尤多佳构。”
长于文论,上世纪三、四十年代曾撰有不少关于新旧国画论争的文章,在当时影响较广,在近代中国美术史上也具有广泛的影响。著有《吴子复隶书册》、《吴子复书好大王碑》、《野意楼印赏》等。
1979年8月24日于广州病逝,终年80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