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식과 의식의
차이>
몇 이제
설명드려야 할 부분은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입니다.
저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에서
열심히 도표까지 만들어가며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을 하나하나 설명드렸고, 이 육근과 육경을 합해 12처處
라고 부르며 다시, 이 12처를 관하는 ‘마음 챙김’이 위빠사나 수행법이라고 까지 나름대로는 애를써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안계眼界 내지 의식계意識界’가 무無 하다고 반야심경에서 되풀이해 버리니, 제가 얼마나 고달픈 처지가 되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내지는 ~
란 뜻이니, 풀어쓰면 ‘무안계 무이계 무비계 무설계 무신계 무의식계’가 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십시요.
앞의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한 눈에도
구별되는 ‘계界’ 란 한 글자의 추가는 그렇다치고, 저의 관심은 앞에서는 (공중무)식識과 (공중무)의識 라고 의와 식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지금은
합쳐서 ‘의식意識’이라고 쓰는 의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현장역이 아닌 제가 소개한 법월삼장스님 역에서도 역시 ‘의식’으로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우선 ‘계’ 부터 해결하고 왜 ‘의식’이라 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럴땐 역시
시각적 효과가 있는 도표가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6근(6根)
+ 6경(6境) + 6식(6識)= 18계(18界)
안 - 색
- 안 →안근이 색경에 부딪쳐 안식을 일으킴
이 - 성
- 이 →이근이 성경에 부딪쳐 이식을 일으킴
비 - 향
- 비 →비근이 향경에 부딪쳐 비식을 일으킴
설 - 미
- 설 →설근이 미경에 부딪쳐 설식을 일으킴
신 - 촉
- 신 →신근이 촉경에 부딪쳐 신식을 일으킴
의 - 법
- ‘의식’ →의근이 법경에 부딪쳐 <의식>을 일으킴
이
<의식>이 실은 앞의 방법대로 대입시켜 표현하자면 ‘의식식’을 일으킴이라고 해야 합니다.
단순히
6근에 6경을 더해 12처 거기에 또 6식을 더하면 18계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치고, 반야심경에서는 ‘무안계 내지 무<식계>’해야
당연할 것 같은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즉,
반야심경에서 이 경우에는 식識과 의식意識 을 혼용해 쓴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양념 설명입니다.
6근ⅹ6경ⅹ3세(과거,현재,미래)=108번뇌
다시와서,
‘식계’와 ‘의식계’ 즉 ‘식’과 ‘의식’을 같은 의미로 썼는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썼는가, 이것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제가
어설프게 반야심경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거의 모든 반야심경 해설서를 ?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경봉스님, 달라이라마, 라즈니쉬의 해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제기하는 문제와 앞서 제기한 문제(고액이란 단어의 문제 등) 또 ,앞으로 제기할 문제에 대해 도무지 언급을 해 놓은 책이
없습니다.
경전을
보다가 보면 이런 사소한 것 같지만 한 글자의 해석의 차이로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제시하는 문제가 한국불교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중국불교의 관점에서 ‘왜’ 또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사례임을
느끼셔야 합니다.
책의 서두에
중국의 혜능에는 절대적이지만, 원효와 의상의 불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한국불교의 사상적 편식을 지적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마경의 첫 품의 시작에 대한 한역의 차이를 직접보십시요. 무비스님의 우리말 역을 먼저 소개하는데, 구라마집의 한문본을 한글로 옮기신
것입니다.(두 한문 본을 비교하실 때 뜻을 새기시라는 것이 아니라, ‘한자’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자는게제 의도입니다)
<이렇게
법문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비야리성안 암나나무동산절에서 큰 비구 대중 8천사람과 함께 계셨는데 보살은 3만2천 이었으니 여러 사람이 잘 아는
이들이다.
뭇사람이
아는 바로다. 큰 철(智)과 근본 행을 다 남김없이 이룩함은 모든 부처님의 위신으로 세워지는 바라 법을 옹호하는 성이 되어서 바른 법을 받아
지님에는 능히 사자의 외침인 듯 이름이 시방에 들리니 뭇사람이 청하지 않더라도 벗이 되어 이에 편안케 하며 삼보를 이어 받들되 능히 끊이지 않게
하며 마구니를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제거할새 남김없이 몸이 깨끗하니 다섯 가지 덮임과 열 가지 막힘을 기리 여의시다.>
이 번역의
한역인 구마라집의 것입니다.(후진後秦 406년의 역으로 알려 짐)
如是我聞。一時,佛在毗耶離菴羅樹園,與大比丘衆八千人俱。菩薩三萬二千,衆所知識,大智本行皆悉成就。諸佛威神之所建立,爲護法城受持正法,能師子吼名聞十方,衆人不請友而安之,紹隆三寶能使不?,降伏魔怨制諸外道,悉已?淨永離蓋纏,心常安住無?解脫,
아래는
유마경의 같은 부분이지만 지겸의 것입니다.(오吳 223년의 역으로 알려 짐)
聞如是。一時,佛遊於維耶離柰氏樹園,與大比丘衆俱,比丘八千。菩薩三萬二千,皆神通菩薩,一切大聖能隨俗化,佛所作者皆已得作,爲法城?護持正法,爲師子吼十方聞聲,衆人不請友而安之,興隆三?能使不?,皆以降棄魔行?怨,一切所化莫不信解,皆度死地脫無??,
구마라집鳩摩羅什은
현장과 함께 한국불교가 의지하는 한역漢譯 불전佛典의 상당부분을 번역한 중국의 승려입니다.그리고 그로 인해 삼론종三論宗이
탄생됩니다.
지겸支謙은
구마라집보다는 앞선 삼국시대의 번역가인데, 삼국지에 등장인물인 오나라 왕인 손권이 바로 지겸을 등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般若와 정토淨土 사상의 유행을 주도한 분입니다.
두 분의 약
200년의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표현하면 전혀 다른 경을 보는듯 하지 않습니까?
이런 차이가
날 수도 있는 한역漢譯 중, 특정인의 번역을 마치 부처님의 뜻을 퍼펙트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정이니,
어디 선가禪家에만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현장역과 모든 반야심경 해설서에 ‘식’과 ‘의식’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시며 직접 설하신 것을 ‘녹음’했다가 재생하듯 이루어진 경전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설사 녹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지금의
인도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마치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이두 문자나 옛 훈민정음의 문자는 고사하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제주도 방언도 전혀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기막힌 정답입니다.
다만 제
주장은 그 말이 선가禪家의 전문용어가 아니라 선禪과 교敎를 망라한 불법 이해의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의 ‘식’과 ‘의식’의 차이를 이번에는 구별해야 겠습니다. 그 구별의 이유는 ‘식’과 ‘의식’을 혼돈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식, 의식, 마음을 본격적으로 탐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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