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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서 만나는 고향의 노래, 바다엔 배만 떠 있고
해남은 땅끝이다. 반 토막 나 있는 이 강산에서 갈 수 있는 육지의 끄트머리다. 서울에서 6시간은 잡아야 넉넉한, 먼 길이 있다는 것은 차라리 고맙다. 산과 바다, 너른 들판이 한반도의 남서쪽 모퉁이를 만들어 황톳길 고향을 선사했다.
박우철의 <천리 먼길>이 잘살아 보자고 떠난 타향살이였다면 오기택의 <고향무정>은 정신없이 살다 돌아와 본 고향이 그 옛날 고향이 아니더라는 탄식이다.
아가씨를 주제로 한 숱한 노래의 시대적 열풍 속에서도 박가연의 <완도아가씨>가 무정하게 떠난 님을 그리는 비련의 서사라면 ‘하사와 병장’의 <해남 아가씨>는 물 한 모금 얻어먹은 인연을 ‘내가 데려가겠다’는 경쾌한 해피엔딩이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멀지만 고마운 길
가을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해남으로 가는 길은 멀다. 두어 번 쉬었다 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 얼추 여섯 시간이다. 이제 이 땅에서 먼 길은 자꾸 사라진다.
기차의 비좁은 통로를 누비던 홍익회의 카트 위에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던 오징어 땅콩에 삶은 달걀은 더 이상 맛 볼 수 없다. 바다 끝까지 2시간 남짓이면 끝나버리는 여정은 주전부리의 즐거움을 삭제했다.
잠시 왔다가 떠날 철새로 여겼던 코로나는 어쩐지 우리의 강을 점령해버린 가마우지처럼 텃새가 되어 견고한 둥지를 트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움직이지 말라는 정부의 권고에 속 좋은 서민들이 평일 서해안고속도로를 더욱 헐렁하게 했다.
휴게소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가판대 전면을 트로트가 장식하고 있다. 2020년을 나중에 기억한다면 두 개의 단어는 ‘코로나와 트로트’일 것이다.
‘미스터트롯’이란 프로그램 이름은 표준어인 ‘트로트’를 밀어내고 이제 오늘의 대중문화 키워드 가운데 수위에 있다. 7명의 전사들이 정치고 경제고 무엇 하나 제대로 기댈 곳 없는 대중들의 시린 가슴을 감싸 안아준다. 뜻밖의 종편 트로트 대박에 그 해일이 나머지 종편은 물론 공중파까지 덮쳐 TV만 켜면 온통 ‘쿵짝’이다.
본질이 유행가이니 이 트로트 열풍도 언젠가는 수그러들겠지만 “대중가요여, 물 들어올 때 배를 제대로 띄워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뱃전에도 트로트 풍어의 깃발을 드높여 펄럭여라.”
울부짖는 바다, 울돌목의 노래 <강강술래>
목포 앞바다를 가르는 목포대교를 지나 영암·금호 방조제를 지나 화원반도로 들어선다. 젊은 날의 남근처럼 솟구쳐 오른 반도의 끝은 한참을 지난 일이지만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으로 선명한 상처를 차지하고 있는 자리다. 우수영으로 먼저 간다. 외톨 알밤처럼 단단한 진도로 건너가는 바다목이다. 해남과 완도 대중가요 기행을 물살 거센 명량에서 시작할 셈이다.
진도대교가 쌍둥이 다리로 왕복 4차로가 되면서 목포로, 서울로 가는 길은 더 가까워졌다. 다리 아래 바다가 오라고 손짓한다. 멀리서 봐도 조수(潮水)가 빠르다. 보통 바다 조수의 속도의 3배인 초속 6.5m이니 소란스럽다. 진교대교 아래 조수의 소용돌이는 굽어다 보면 무서움이 들 정도다.
울부짖는 바다. 울돌목, 먹물답게 표현하니 명량(鳴梁)이다. ‘명랑(明朗)’이야 당연히 아니지만 바다가 거센 해협은 서해에서 태안의 안흥량이 해당한다. 그 앞바다가 거셌기에 수많은 세곡선과 물화를 실은 배들이 침몰해 태안 해저 유물의 보고가 되었다. 하루 두 번, 이 울부짖는 격동은 바다가 휴식하는 정조기의 고요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성웅 이순신이 그 유명한 “신은 12척의 배가 아직 남아 있사옵니다”를 아뢰며 울돌목, 이 바다의 해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명량의 저 울부짖는 소리였다. 어쩌면 그 소리는 무능한 왕조와 유린당하는 국토의 남단에서 조정까지 닿지도 않겠지만 끓어 넘칠 수밖에 없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닐까.
이순신의 해전 지략은 울돌목에 사는 어민들이 “이 바다의 소용돌이로 적선을 유인하면 반드시 승산이 있다”고 귀띔한데서 출발했다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철부선도 하루 두 번의 빠른 조수를 이용하고, 숭어 철에는 바위 끝에 서서 튀어 오르는 숭어를 뜰채로 잡아채는 신기에 가까운 어부의 솜씨를 볼 수도 있다.
여기 우수영의 노래는 <강강술래>다.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라고도 하지만 유식한 체하는 한자 빌림이다. ‘강~강’은 원을 겹쳐서 그리는 것이요, ‘술~래’은 순라에서 비롯된 경계의 뜻이니 진군의 노래다. 난리통에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뒤에서 우리 군사들을 격려하는 원형의 안타까운 행위예술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임진왜란에도 횃불을 들고 빙빙 돌면서 저항의지를 보였으니 왜군도 섣불리 공격을 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그렇게 원형의 군무를 하며 소리를 모을 때 인간의 놀이 감각은 극도에 달할지도 모른다. 술이 한 순배 돌고 흥이 무르익으면 기차놀이를 하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넓히고 좁히기를 반복하는 동작은 인간 본성에 충실한 공감의 표현이다.
2009년에는 영산재, 남사당 놀이등과 함께 <강강술래>가 유네스코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금도 ‘강강술래 한마당’이 해마다 열리고, 진양조로 길게 뽑는 ‘술래’는 ‘수월래’로 자연스럽게 들리는 민중의 노래였다.
<강강술래소리>
해남 황산, 박우철의 <천리 먼길>
이제 우수영에서 해남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18번 국도가 4차로로 확장되기 전 옛 국도를 따라간다. 황산면이 먼저 나온다. 해남에는 유독 ‘황산’자 들어간 지명이 많다. 붉은 황토흙은 다산과 토종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해남 고구마 맛이 유독 달다는 것도 황토 덕이 한 몫 한다. 해남 우항리에 공룡화석의 유적지가 있고, 공룡박물관이 있는 것도 어쩌면 풍부한 식생대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황산면은 한 시절 날리던 가수 박우철의 고향이다. 그의 빛나던 시절이 저편에 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자료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데서 느껴진다.
그는 광주(광주광역시) 수창국민학교를 나오고 광주고를 졸업한 것으로 봐서 부모님이 일찍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고향이 아들의 고향으로 자연스레 승계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마지막이 될 듯하다.
1952년생, 본명 오영록, 박우철은 1971년 <사랑도 세월이 가면>으로 데뷔했으나 그의 출세작은 <천리 먼길>이다. 천리는 먼 길의 상징적 거리다. 나훈아가 <님 그리워>에서 물어물어 찾아온 거리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천리’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어렵게 먼 길을 찾아온 님이 여전히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면야 천리는 먼 길이 아니다.
그런 굳은 사랑이라면 노랫말로 아픔을 대신할 리도 없다. 아무리 봐도 남자가 부른 노래지만 마음이 떠난 남자를 원망하는 여인의 노래일 가능성이 크다. 하기야 서울로 방직공장에 취직하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처자이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박우철의 ‘천리’의 출발은 해남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라고 하는 것도 땅끝에서 서울이 천리요,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 땅 두만강까지가 이천리라 그러하다. 박우철의 노래는 귀공자풍의 얼굴까지 더해져 인기를 누리며 ‘선데이서울’ 독자들을 설레게 했다.
‘명랑’, ‘아리랑’, ‘야담과 실화’뿐 아니라 월간 가요 책 뒤편에 주소와 이름이 곁들인 ‘펜팔 원함’이 꼭 실리던 시절의 일이었다. 정통 트로트의 점잖은 자기자리에서 한 발 더 나간 고고풍의 <천리 먼 길>에는 원망은 하지만 이전처럼 눈물 짜며 매달리는 사랑이 아니라 ‘너 없어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조짐이 묻어난다.
<천리 먼길> 전우 작사, 박현우 작곡, 박우철 노래, 1972, 신세기레코드
<정답게 가는 길> <우연히 정들었네> 같은 노래로 인기를 끌던 그는 남진, 나훈아의 인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흙에 살리라> 같은 노래를 부른 한세일과 서로 경쟁하듯 활동하다가 무대 소식이 뜸해진다. 건강 때문이라는 소문만 무성했었다. 2014년 그가 중년의 비장한 사랑을 그린 <연모>를 발표하며 돌아왔을 때 팬들은 환호했다.
‘앞이 캄캄 안 보이는 사랑의 진로’, ‘돌아가는 길을 지운 사랑의 퇴로’는 어쩌면 세상의 눈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박우철을 그리워하던 팬들도 이제 초로의 능선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랑 전선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적어도 가슴에 결행 못 한 미완의 애련이 웅크리고 있을 터이다.
<연모> 김병걸 작사, 이동훈 작곡, 박우철 노래, 2014
돌아와 해마다 신곡을 내놓으며 재기의 발돋움돌아와 해마다 신곡을 내놓으며 재기의 발돋움을 하는 그의 헤어스타일은 여전히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비켜가지 못한 세월에 처진 눈을 집어 올릴 수밖에 없지만 크게 움직이지 않고 노래 부르는 정통 트로트의 자세 또한 여전하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크루즈 선상에서 노래 부르던 박우철이 안타까우면서도 반가웠지만 그나마도 코로나의 징글징글한 쇼크가 무대를 다 앗아가고 말았다.
박우철(오영록)의 삼촌이 오기택이라고 나와 있는 자료가 사실이라면 집안의 성대는 타고난 게 아닐까. 혹시 흔적이나 있을까 하고 찾아간 황산면소재지만 해도 시골 모습은 거의 다 헐리고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을 낡은 집 몇 채만 뒷골목에 숨어 길고양이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녹우당, 땅끝순례문학관이 있는 문향 해남
해남읍으로 들어간다. 밭에는 역시 고구마를 수확하는 손길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해남은 그야말로 군세가 큰 고장이다. 오죽하면 해남읍에서 땅끝(토말)까지 직행버스가 따로 다닐 정도니 말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가 있어 해남의 아취를 더한다.
우리나라 종가 중 가장 많은 유품이 남아 있다는 해남윤씨의 종택 ‘녹우당’이 있어 해남을 선비의 고장으로 만든 근거가 든든하다. 500년 은행나무의 의연함, 조선시대 한글 가사 문학을 꽃피운 고산의 작품과 조선 후기 미술의 혁신을 이룬 공재 윤두서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귀 없는 초상화, 누굴 원망하는 듯 형형한 눈빛의 자화상을 그린 공재가 바로 해남 윤씨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휴관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어 해설서로 가름한다.
해남은 녹우당 한쪽에 문학촌 ‘백련재’를 만들었다. 현역 문인들의 레지던스 창작 공간이다. 땅끝순례문학관도 만들어 조선조 문인은 물론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같은 시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문향을 더하고 있다. 역시 무기한 휴관이다.
자물쇠를 잠근 내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도심의 별다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놀이동산에는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는 판에 이 외진 곳, 얼마나 많은 내방객이 찾아온다고 무기한 휴업인가.
윗동네 지시가 그러하니 “에라 모르겠다. 괜히 문 열었다가 혹여 확진자 한 명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니까”라는 생각이 관청에 여전한 게 아닌가 싶다. 옥에 티다. 일찌감치 읍내에 유일한 호텔에 들어 여장을 푼다.
해남 아씨 물 한 모금 주구려, 하사와 병장의 <해남 아가씨>
아침을 서둘러야기에 해남으로 귀향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병두(경기도영화예술인협회장) 씨가 대흥사 사하촌에 자리 잡고 있는 ‘호남식당’에 이른 식사를 부탁했다. 자연산 버섯요리를 자랑으로 여기는 집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자 행복해졌다. 마침 해남군 요청으로 해남의 자전거 코스를 개발 중인 자전거생활 취재팀과도 저녁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천년고찰 대흥사로 향한다. 우리차를 정리한 초의선사와 임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로 인해 대흥사는 차(茶)와 충(忠)을 상징하는 우리나라 대표적 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을 두 개나 거쳐야 두륜산 정상이 보이며 하늘이 열리는 아늑한 골짜기가 사암을 품고 있다. 석산(꽃무릇)이 무리 지어 주황 꽃을 피우며 계절을 완상하라 한다. 수덕사의 여승처럼 대흥사나 두륜산만을 주제로 한 노래는 없으나 하사와 병장이 부른 <해남 아가씨>에는 우슬재 산마루와 대흥사 풍경소리가 나온다.
월출봉 고갯길과 영암길 3백리는 광주를 기점으로 한 해남을 전국에 알리는데 공이 적지 않아 해남 군가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더구나 다른 지역 이름을 딴 아가씨, 처녀 노래들이 헤어지고 울고 짜는데 반해 경쾌한 리듬이라 요즘 감각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게다가 ‘하사와 병장’이라는 독특한 작명, 군에 다녀온 분들이야 다 아는 얘기지만 하사와 병장은 힘을 겨루는 앙숙이기 십상인데 이들이 조를 짜서 화음을 이룬다는 것도 신선했다.
하사 이경우는 1951년생이니 이제 70 노병이 되었다. 원래 전북 군산 사람이었는데 배 사업을 하던 아버지 따라 속초에서 중고를 졸업했으나 부친과 삼촌을 모두 바다에서 잃었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마침 외삼촌이 미8군 무대 가수여서 대학도 포기하고 이태원 유니버설에서 오디션을 봐 8군 무대에 서긴 했으나 막차를 타고 말았다.
그렇게 빛을 못 본 채 입대한 논산훈련소에서 드럼통을 두드리는 이동근 병장을 만나 의기투합, 훈련소 내에서 유명인사가 된다. 전역 후 속초 청학동 음악다방을 시작으로 ‘더벅머리’라는 ‘응답하라 1988’식 팀 이름까지 지어 1976년 <그리움>으로 데뷔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나마 기독교방송 김원상 PD를 만나 진남성 작곡가를 소개받아 <목화밭>을 녹음하며 상승무드를 타게 된다. 1977년 목포 MBC에 출연차 내려오다가 <해남 아가씨>를 만들어 가요 차트에 오르며 레코드 판매량 5만 장의 대박이 난다.
그러나 1983년 팀은 해체되고 하사 이경우는 이미 신촌블루스 이전부터도 블루스 음악에 정통한 가수였기에 1989년 이후 음반 활동은 없었음에도 속초, 미사리, 일산 등지에서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노래에 끈을 놓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짚불처럼 사그라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제자리에 서서 트로트를 부르던 시대에 율동을 곁들여 노래하는 듀엣의 모습이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해남 아가씨>는 지금도 불려지고 있는 해남의 애향가다.
<해남 아가씨> 이동근 작사·작곡, 하사와 병장 노래, 1977
<해남 아가씨>를 웅얼거리며 두륜산 정상에 케이블카로 오른다. 철마다 사람이 꽉 들어차던 케이블카를 전세 내다시피 하니 미안할 정도다.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오른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경은 압권이다. 맑은 날 제주도까지 보인다는 높이, 남쪽으로는 완도가 서쪽으로는 진도가 에워싸고 있다. 동쪽으로는 주작산을 경계로 강진 땅이 환히 보이고 해남의 너른 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소재에 올라보니 옛 고향이 아니더라, 오기택의 <고향무정>
두륜산을 감싸 안으면서 오소재에 오르는 약수터에서 물어도 ‘오기택의 노래비’를 모른단다. 고개 정상을 돌아서자 노랫소리가 들린다. 오기택의 <고향무정>이다. 노래비였다. 2018년에 세워졌으니 사람들이 모를 만도 했다. 최신 음향시설이라 그런 것일까 쉼 없이 이어지는 고향무정은 음질이 뛰어났다. 여지껏 다른 노래비에서 만나지 못한 소리였다.
이 노래비는 오소재 아래 북일면 흥촌리에서 태어나 북일국민학교와 해남중학교를 다닌 오기택을 기리기 위해 고향의 유지들이 뜻을 모았다. 물론 동창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오기택의 이름을 딴 <오기택 전국가요제>가 12회를 맞게 된 2018년 10월 오전에 <고향무정> 노래비 제막식이 있었다. 오랜 시간 병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오기택이 휠체어를 탄 채 참석했다.
그날 오후에 가요제가 열리는 무대에 올라 그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신의 노래를 힘겹게 불렀다. <아빠의 청춘>과 <고향무정>이었다. 모두가 눈시울 뜨겁게 그의 쾌유를 빌며 박수로 장단을 맞춰주었다. 볼링과 골프, 추자도 바다낚시 죽을 고비 등, 유난히 스포츠를 좋아했고 파란 많은 음악 인생 이야기는 <영등포의 밤>에서 했으니 넘어간다.
그의 출세 곡 <고향무정>으로 돌아온다. 오소재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는 노랫말 2절에 나오는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랫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와 딱 맞아떨어지는 풍경이다. 그가 중학교만 마치고 떠나온 고향도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에 그대로 싱크로율 100%다.
흡사 그를 염두에 두고 지은 노래 같지만 전혀 뜻밖에 함경북도 웅기 땅을 배경으로 한다.
무인도라는 예명을 가진 김운하(본명 김득봉)는 눈 내리는 임진강변에서 노랫말을 떠올렸다.
함경북도 웅기 정어리 공장에서 근무했던 김운하(무인도)는 자신에게 월남을 권유하고 정작 본인은 북한에 남은 친구 아버지 김민규 교수를 그리워하며 이 가사를 썼다고 한다. 결국 실향민을 위로하는 망향의 노래가 되고 말았다.
흡사 ‘닥터 지바고’의 배경이 된 시베리아의 설원이 정작 로케는 캐나다의 눈 덮인 삼림과 벌판에서 이루어졌어도 너무나 생생한 것처럼 오소재에서 듣는 <고향무정>은 산업화 시대의 신실향민의 노래로 들어도 손색이 없다.
<고향무정> 무인도 작사, 서영은 작곡, 오기택 노래, 1966년, 신세기레코드
땅끝을 받치고 있는 알토란같은 섬 완도, 박가연의 <완도 아가씨>
오소재를 내려와 완도로 넘어가며 일부러 바닷가로 난 길로 접어든다. 남도의 서정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길이다. 바다 건너로 완도의 높은 봉우리 상왕산(645m)이 해발기준점에서 출발하니 더욱 높아 보인다.
완도대교로 건너가기 전 마을 북평면 남창은 그래도 사람이 제법 북적거린다. 코로나 경계령 속에서도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 점심 차 식당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간만의 해방감에 목청을 높인다.
완도항이 보이는 ‘장보고기념관’에 이른다. 역시 동상만 서있을 뿐 문은 잠겨있다. 코스모스가 한껏 핀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목교로 이어진 장도에 들어선다. 장보고의 기지 청해진 옛터 다. 이 아담한 장도야말로 갯벌 속에 묻힌 신라의 말뚝을 복원하는 최적지다.
그리 높지 않으나 해송림 사이에 누각과 성곽을 올린 풍광은 그대로 그림엽서다. 성을 한 바퀴 도는 길은 ‘저 언덕을 넘어서’ 바다가 떠오르는 아이맥스 영화의 스크린처럼 다가온다. 완도항이 남으로 보이고, 신지대교와 장보고대교로 이어지는 고금도, 강진 마량으로 이어져 깊숙한 강진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아, 그렇다. 장흥 유치에서 출발하는 탐진강이 유유히 강진만으로 흘러들고, 바닷바람만 잘 타면 사나흘이면 탐라(제주)에 도착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탐라의 ‘탐(耽)’자와 강진의 ‘진(津)’자가 조립되어 탐진강이 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겠다. 누각에 올라앉아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는다. 유튜브에도 쓸 셀프 화면을 찍을 셈이다.
노래는 박가연의 <완도 아가씨>다. 박가연이란 가수는 요즘 세대에는 생소하다. 옛노래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억하는 가수다. 덕성여대를 나온 대구 출신 박가연의 노래는 전반적으로 향토적 색채가 진하다.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 가운데서도 <금박댕기>, <그네줄 사랑>, <물레방아>, <꼴망태 총각>, <장가가는 초립동>, <이별의 성황당> 등 토속성이 물씬 난다.
물론 당시의 송춘희, 최숙자 같은 가수들의 노래 패턴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했겠지만 특히 돋보인다. 워낙 ‘아가씨’ ‘처녀‘가 제목에 들어간 노래가 흔해 그저 수십 곡이겠거니 했는데 확인된 것만 무려 239곡이니 아가씨 앞에 ‘금산’ ‘진부령’ 어디든 지명만 붙이면 그 고장의 애향가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급기야 <꽃집의 아가씨>는 물론 <구공탄집 아가씨>(박재란), <담배가게 아가씨>(송창식)까지 아가씨 노래 풍년이 들었다.
<완도 아가씨> 노래를 틀어놓고 소슬한 가을 바닷바람을 맞으니 먼 길은 차로 이동하고, 자전거를 타고 쏘다닌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이 노래는 전형적인 애조의 트로트다. 저문 바닷가에서 떠나간 님 생각에 눈물짓는 전형적인 시골 아가씨의 60년대 정서 과잉이다.
비스듬히 누워서도 바다 건너 해남 땅이 보인다. 아가씨 노래 홍수 속에서 <해남 아가씨>는 신선하다. <완도 아가씨>가 옷고름에 눈물 찍어 내는 멜로드라마라면, 해남 아가씨는 물 한 모금 준 인연으로 서울 총각이 ”내가 데려 가리다“라며 프로포즈하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어쩌랴. 미역 냄새 나는 섬마을, 해당화 피는 등대의 바다에 뿌리박고 살아야 하는 그 시대 여인의 삶은 ‘이조 잔혹사’의 연장선상에서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마지막 처녀, <완도 아가씨>나 <흑산도 아가씨>였는지도 모른다.
<완도아가씨> 차일봉 작사, 이시우 작곡, 박가연 노래, 1965
땅끝으로 가는 마지막 용틀임, 달마산 능선
완도 장도에서 완도항을 들려볼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렇다 할 완도의 노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니 다음 기회는 하나 둘 연육이 되어가는 다도해의 섬들을 ‘시마나미카이도(しまなみ海道)’를 달려가는 기분으로 자전거여행을 할 몫으로 남겨놓고 떠난다. 차에다 자전거를 옮겨 싣고 이제 땅끝으로 향한다. 북평면에서 남서향의 77번 국도를 버리고 해안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땅끝 옛 숲길과 ‘달마고도’가 타원형으로 나 있는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달마산은 각별하다. 병풍이 둘러쳐진 듯하다. 공룡의 등처럼 기기묘묘하게 솟은 달마산은 호남정맥이 마지막 땅끝으로 가면서 용틀임을 한 흔적이다. 여기에 한국불교의 인도로부터 남방전래설을 말하는 고찰 미황사를 품고 있다.
육지의 마지막 사찰, 거기서 다시 20분을 걸어 올라가면 천하 절경이라는 도솔암이 바위 사이에 기도 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온 사람은 10번 이상을 찾는다“는 암자에 대한 신비감이 유혹한다. 거긴 오로지 산행과 산사를 포행하듯 그렇게 찾을 일이다.
땅끝조각공원에서 석양에 물든 조각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또 다른 명상의 방법이다. 땅끝이다. 토말(土末)이라는 이름을 순우리말에 되돌려준 끝은 관광지로 변해 있다. 거기서 산언덕 하나를 넘으면 송호해수욕장이다.
‘2020 해남방문의 해’라고 쌓아 올린 모래탑은 조명장치까지 해 공을 들였으나 몇 개의 개릭터를 지닌 모래탑과 함께 쓸쓸하게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코로나의 공습이 천지를 움츠려들게 하고 있다. 비대면 시대가 끝날 것인가 더 이어질 것인가 대면해 봐야 알 터이다.
조용연 여행작가
첫댓글 처가가 완도이다 보니
이 글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려....ㅎ
방장님 .. 잘 지내시지요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던해에 나온 노래 완도아가씨
노래 듣는데 가슴이 짠 하네요
완도아가씨 부르신 박가연 님은 어데서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목소리도 좋으시고 노래도 잘 하시네요
추억은 아름다워라 ...아 ..그리운 ..나어린 시절이여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