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학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에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2018
예전에 본 영화에서 어떤 양아치 깡패가 가죽 장갑을 낀 채 껌을 짝짝 씹으면서 상대에게 말했다.
"야! 이 새끼야, 겁대가리 없이 까불어? 너 오늘 병풍 뒤에서 향 냄새 맡게 해줄까?"
조폭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스토리 설정은 조금 어설픈데도 이 대사 표현이 참 재밌어서 기억을 한다.
지금이야 사라진 풍경이지만 어릴 적 삼복에 초상치르는 집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마당가 솥에서는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풍겼지만 뒤꼍으로 돌아가면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쇠뿔도 녹인다는 삼복 더위에 3일장 치르느라 병풍 뒤에 모신 망자가 풍기는 냄새였을 것이다.
동무들과 어울려 초상집 주변을 맴돌며 구경은 했어도 어두워지면 무서움이 몰려왔다. 겁, 어릴 때 나는 겁이 많았다.
밤에 변소를 혼자 가지 못해 어머니를 변소 모퉁이에 세워 놓고 볼일을 봤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엄니, 거기 있어?"를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보통 쓰는 겁이란 글자는 怯이거나 劫이다.
전자가 무섭고 두려워하는 마음, 후자는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이란 뜻으로 매우 길고 오랜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겁이 많았던 나는 나이 들면서 이 겁(劫)이란 말이 더 두렵다.
불교의 겁에 관한 인연을 보면 부부는 7천 겁, 부모 자식 간에는 8천 겁, 스승과 제자는 1만 겁이라고 한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훨씬 드물고 맺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제 인연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음은 그만큼 두려움(怯)이 많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대가 바뀌어 요즘의 학교 풍경은 초등학생 제자에게 교사가 폭행을 당하고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툭하면 학부모들까지 교사 행정에 개입을 해서 요즘 선생님들은 이중의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겁에 이어 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업(業),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업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으로 업을 구분한다.
행동거지에 따라 짓는 신업(身業), 말씨에 따라 짓는 구업(口業), 마음씀에 따라 짓는 의업(意業), 이를 삼업(三業)이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 가지 악업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욕, 진애, 우치다.
금방 이해되는 글자도 있지만 생소한 단어가 많다.
이 참에 공부도 할 겸, 나는 말로 짓는 구업을 구분해 봤다. 망어, 기어, 양설, 악구가 말로 짓는 업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하는 말, 없는 말을 교묘하게 꾸며 대는 말, 먼저 말한 것을 뒤집는 일,
남의 단점을 들추며 험담하는 짓,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상대에게 분노하는 것 등이다.
가끔 아내 따라 교회에 가서 앉아 있긴 해도 무신론자인 나는 내세도 윤회도 믿지 않지만 업과 인과응보가 윤회사상의 근간임은 안다.
전생, 현생, 후생이 있다지만 나는 오직 현생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면서 후생이 있던지 없던지 가능한 죄는 짓지 말자고 다짐한다.
엊그제 홍수 피해 뉴스가 쏟아지던 차 포항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첫 말이 "나는 별일 없이 잘 지낸다"였다.
잘 있다는 이 말처럼 다행스런 안부가 어디 있는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집이 떠내려가고 했으나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라 했지만 그럼에도 더욱 살고 싶은 요즘이다. 살아 있음이 고마운 날, 무사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기쁘고 좋은 날이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업과 겁, 늘 마음에 새기며 살 생각이다.
첫댓글 겁과 업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 보입니다.
이번 유현덕님 글을 읽고나서 겁과 업에 대해 신중히 고려 해 매사 더욱 더 신중히 살아가야 겠다 다짐 해 봅니다. ^^~
수피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겁과 업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마음에 새기면서 살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인생이 너무 진지하면 심신이 피곤하다고 합니다.
심성 맑은 순수님은 쬐끔만 진지해도 되겠으니 편안하게 생각하고 인생 즐기셔도 좋겠습니다.ㅎ
'후생이 있던지 없던지
가능한 죄는 짓지 말자고 다짐한다~'
우리 인간들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지구별이 될 것입니다...
가능한 죄 짓지 말자는 것은
제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랍니다.
생각 대로 안 풀린 인생이긴 했어도 이렇게 살아 있음이 고마울 뿐이네요.
피케티 님도 아름다운 이 별에서 건강하게 인생 누리며 사시기를,,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공감 가는 님의 댓글이 제 가슴에 고이 담깁니다.
함박산 님께서 아주 좋은 격언으로 저를 일깨워주시네요.
아숩게도 제 인생이 무리수로 인한 실패의 연속이었기에 더욱 시리게 다가옵니다.
이기고 말겠다는 마음 내려 놓았다 여기면서도 비우기가 쉽지 않아 늘 경계하며 사네요.
제 마음이 호승심에 물들 때 무득탐승을 떠올리겠습니다.
더불어 세고취화(勢孤取和)라는 말도 새기면서요.ㅎ
@유현덕
으따
검색꺼리 넘 많이 주시는것
업 쌓는거야요 ㅋㅋ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는 차이는
고민할 부분입니다
성경에
사후에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유신론자는 악하게 살아도 천국 가고
무신론자는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간다
이는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거죠
예리한 문제지만
술김에
친구 서각 개인전에
잔뜩 술 마시고 쓴 댓글
낼 술 깬 후 바뀔 수도...
아마도
안 바뀌걸요
제가 굳이 종교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서도
도무지 믿음이 안 생기는 것은 무신론을 믿는 저의 굳건한 마음 때문이랍니다.
천국 갈 생각은 없기에
죄 많은 제 육신 흙이 되어 광합성 하는 식물에게 작은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렵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듯이 모쪼록 홑샘 선배님의 그 믿음
술 깬 후에도 바뀌지 않기를 바래봅니다.ㅎ
업보와 겁보
타고난팔자와 풀어내야할 내 인생의길
지존형은 어떤 풍파가 닥쳐도 잘 헤치며 살아왔으니
업보든 겁보든 무난히 이겨내리라 봅니다.
어쩌겠어요. 저만 해도 이렇게 살라고 정해진 운명이라면,,^^
요즘은 구업조차
체력 열쩡도 딸리네요 ㅠ.ㅠ
댓글로도 업 짓지 않도록 조심 조심할게요
댓글로도 구업 짓지 말자는 말씀 저도 새기게 되네요.
글구 구업 딸릴 때는 저처럼 부작용 없는 일로 입막음 하면 됩니다.
눈이 뻑뻑할 때 안약 넣듯이 입에 맛난 것 넣어 즐거움을 주고
짝꿍 입술에다 데칼코마니도 만들어 보고,,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또한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덕분에 오후 시간이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신사 산애 선배님께서 즐겁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휴가철에 닥치는 막바지 여름 폭염 잘 이겨내시고 건강한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풀려주는
인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순리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사치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사가 그져 바람같이 흘러갑니다
인간은 그 바람에 쓸려가다가
한 홀 먼지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뿐.
겁의 세월은 그 먼지조차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할 뿐입니다
많은 상념속으로 빠지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범방에만 머무는 보쳉 누이가 여기까지 다녀가셨군요.
저절로 마음이 가는 고운 댓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부터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산 듯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순리 대로 살지도 악착같이 살지도 못했으니 그저 참회하는 마음뿐이지요.
인생을 달관한 듯한 감성 부자 보쳉님은 이미 풍요로운 인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구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댓글 보면 알 수 있지요.^^
현덕님의 글은 점점 심오해지니 어쩜 우리 나이에 딱 맞는 좋은
글이라 저는 정했습니다 오늘 글을
겁과 업, 생각하며 읽습니다
천방지축 사는게 인생이라 이것도 사는 것이고
저것도 사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늘 연극이고 마당극이다 등등
겁과 업
이제 제대로 인생을 돌아보고 점수를 매기는
고약한 시간이 이시간이지 싶습니다
업으로 살고 겁없이 저질렀던 유치한 무지한 용기와 땡깡
잘읽었습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글이 심오하다기보다 심란한 글이랍니다.^^
요즘 제가 자연과 불교 쪽 책에 자주 손이 가네요.
교회를 가도 절엘 가도 도무지 종교를 향한 믿음은 안 생기는데
책에 대한 호기심은 저절로 생깁니다.
저도 운선님처럼 인생을 돌아볼 나이라 같이 늙어가고 싶네요.
몇 겁의 인연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끈이 닿았으니 오래 함께 하면 좋겠지요.
더위 거뜬히 물리치고 알찬 여름 되시기 바랍니다.ㅎ
네 많을 것을 생각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