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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용감했다 1 김지명
칠월 중순에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박순자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혼자서 정처 없이 빗속을 걸었다. 동명로 따라가다 고개 언저리에서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쳐 순자가 들고 있던 우산을 뺏어가 버렸다. 비바람 속을 뒹구는 우산을 잡으려고 비를 맞고 뛰어갔지만, 도로로 날아가 버렸다. 화물차가 우산을 밟고 지나가 버렸다. 우산은 한순간 오징어포처럼 납작하게 변해버렸다. 순자에겐 그렇게 중요한 우산이지만, 한 조각의 쓰레기로 돌변해 버렸다. 순자는 비를 피할 수 없어 물에 빠진 생쥐처럼 망가진 모습으로 떨면서 집을 향하여 걸었다. 머리를 씻은 빗물이 이마에서 미끄러지듯 얼굴을 씻으며 굴러떨어진다. 물방울은 눈을 가리기도 하더니 빗물인지 눈물인지 닭똥 같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온몸은 비에 젖에 닭살처럼 까칠해진 피부는 춥다는 느낌에서 움츠려지고 있었다. 순자가 마을로 들어설 때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자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얀 블라우스가 비에 젖어 젖꼭지가 환하게 보여 누가 볼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대문 밖에서 집에 들기 전에 몸을 돌려 앞집 초인종을 눌렀다. 친구 혜숙에게 뽕잎 차 마시러 오라고 하고 다시 돌아서서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박순자는 비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장으로 들렀다. 순자의 온몸에는 빗물이 보한 피부를 감싸고 있었다. 샤워장에서 거품 비누로 문지르고 또 문질러 씻어내고 보디 샴푸로 피부를 매끄럽게 마사지하였다. 샤워를 마친 순자는 텅 빈 집에서 콧노래 부르면서 알몸으로 거실에서 수건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렀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남편 최상기가 침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엎어져 죽어있었다. 순자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였다.
이혜숙은 순자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혜숙은 친구가 직접 만들었다고 자랑하든 차를 마시러 오라 하여 우산도 없이 쏜살같이 뛰어갔다. 대문은 열려 바람에 삐이익 하고 소리를 내지만, 좁은 마당에는 파란 잔디가 비를 맞고 있었다. 비 맞은 잔디를 밟고 순자 집 안으로 들렀다. 혜숙이가 마당 거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방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친구가 도둑을 보고 놀랐나?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에도 순자는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이 고요해서 혜숙은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나서 머리털이 바로 서고 몸에는 소름이 끼치고 있었다. 혜숙은 큰 소리로 순자야! 하고 불렀는데 목구멍에서는 작은 소리가 나왔다. 떨리는 음성으로 순자야!~ 하면서 다시 불러보면서 방문을 여는 순간 피비린내가 진동을 쳤다. 그 순간 눈앞에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순자의 남편이 식칼에 찔리어 쓰러져 있는 시신을 본 혜숙도 놀랐지만, 기절은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비명을 지르던 순자는 옷을 벗은 채로 방바닥에 까무러쳐있었다. 순자의 남편 최상기로 보인 남자가 침대에 엎어져 옆구리에 식도가 꼽힌 채 죽어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머리카락은 성난 고슴도치 털과 같았고 몸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방문이 열려있어도 피비린내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혜숙은 무미로 느끼고 있었다. 이혜숙은 공포에 질리어 떨고 있으면서도 순자에게 옷을 입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숙은 움직이고 있는데 근육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농 문을 여는 순간 옷장 속에서 범인이 나타날까 두려움은 극도에 달했다. 옷장에서 원피스를 꺼내어 순자에게 입히고 속옷은 찾지 못하여 입히지 않았다.
순자의 가정에 웃음꽃이 시들 날이 없었다. 화려하던 꽃밭에 벼락이 떨어지다니 하고 이혜숙은 중얼거렸다. 혜숙은 안방에서 멍하니 서서 창문 쪽으로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으로 실바람이 넘어와 커튼을 흔들고 있을 때 빗소리는 더욱 슬프게 들렸다. 한 참을 그렇게 서 있던 이혜숙은 정신을 차리고 소방서에 다급히 연락하였다. “그곳이 소방서입니까?” “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화재가 아니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소방관은 여보세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하고 물었지만, 혜숙은 전화를 끊었다. 경찰에 알리려고 마음이 급해서였다. 소방관은 전화번호 정보를 확인하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비가 내리는 용호로로 긴급하게 출발하였다. 여자 혼자로서 감당하기엔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까무러치지 않고 연락한다는 강인한 정신력이 순자를 살렸다. 이혜숙은 112 범죄 신고 센터에 전화하여 부엌칼이 남자의 심장에 박혀 있으니 피비린내가 진동을 친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차형사는 주소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긴장한 혜숙은 전화기를 놓아버렸다. 형사는 장난 전화인지 확인차 전화번호 정보를 열었다. 차 형사는 곧장 용호지구대에 연락하여 먼저 가보라고 하고 차 형사도 출발했다. 혜숙은 어지러워서 창문 쪽으로 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러한 광경을 보려던 태양은 두려운지 구름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지만, 구름은 슬프다며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는 용호동을 덮고 있었다. 비상 연락을 받은 용호지구대 상호 순경은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동료가 앉자 경찰차는 비 내리는 용호로에 불을 번쩍거리고 안개를 헤치며 빠르게 달렸다. 경찰차가 동명로170번길 사고 현장에 들렀을 때 골목에는 칼날 같은 긴장감에 젖어 쥐죽은 듯 고요하다. 대문은 열린 채 주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른거리지 않았다. 형사반장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러 신고자를 찾았다. 여기에서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있나요? 하고 물었다. 혜숙은 대문에서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상호 순경이 집안을 드려다 볼 때 적막이 흐르듯 조용하던 집에서 귀신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순경은 인적기에 긴장한 상태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혜숙은 경찰을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정신을 차리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고슴도치 같은 혜숙은 긴장이 풀리자 머리털이 원위치 된 느낌이었다. 상호순경은 이혜숙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순경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혜숙은 경찰의 질문에도 대답마저 잘하지 못했다. 턱을 잡아주는 근육이 굳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혜숙은 손짓으로 방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겨우 언어 소통이 이루어지자 경찰은 방으로 들렀다. 상호순경이 방안에 들어서자 죽은 시간을 말해주듯 진하게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사늘한 방안을 더욱 긴장감으로 고조시켰다. 혜숙은 소방서구급차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십 분쯤 지나자 차지대 형사반장과 동시에 소방구급차가 경보음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고요하던 골목에서 구급차의 소리를 듣고 우산을 쓴 주민이 모여들고 있었다. 빗소리만 들리던 골목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민도 놀라고 주택도 놀랐다. 차지대 형사반장은 기동경찰 대장에게 연락하여 사고 현장을 경비할 순경 두 명을 요청했다. 갑자기 모여든 주민의 숙덕거리는 소리가 골목을 꽉 메웠다. 주민은 박꽃 같았던 순자가 왜 기절했는지 아주 궁금했다.
형사반장이 시신에 손대지 못하고 감식과에 연락하여 관계자를 불렀다. 차지대 형사반장은 수십 년 동안 살해현장을 수사하여도 이처럼 잔인하게 죽은 자는 처음 보았다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얼굴에 난도질당한 모습을 보고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달려온 119구급차에서 내린 최미란 간호사는 동료직원과 들것을 가지고 형사가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최미란 간호사는 사람이 죽어있어도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가득한 방으로 뛰어든 간호사는 냄새에 여의치 않고 쓰러져있는 순자에게 다가갔다. 간호사는 순자의 손목에 맥을 짚어 보더니 살아있다고 소리쳤다. 동료직원은 순자를 빠른 행동으로 들것에 실어 구급차로 옮겼다. 간호사는 식칼에 찔리어 죽어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고 죽었다고 하였다. 형사 반장이 간호사에게 죽은 자는 놓고 가라고 했다. 구급 요원인 간호사가 보호자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했다. 혜숙은 어쩔 수 없이 순자의 보호자가 되었다. 혜숙은 순자 집을 모두 형사반장에게 맡기고 구급차에 올랐다.
혜숙이가 탄 구급차 안은 병실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였다. 구급차를 처음 타보는 이혜숙은 차 안을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었다. 순자를 지켜보던 혜숙은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몸을 떨고 있었다. 환자를 실은 구급차는 비 내리는 용호로를 쏜살같이 달렸다.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남구 용호4동 하늘 병원에 도착했다. 박순자는 기절한 채 들것에 실려서 응급실로 들어갔지만, 이혜숙은 보호자들이 우글거리는 대기실 의자에 끼어 앉았다. 병원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환자들이 우글거렸다. 환자의 보호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대기실에는 모두가 시들어가는 꽃처럼 맥이 빠져있었다. 혜숙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의자에 앉은 채 친구가 어서 깨어나길 두 손을 모아 기도하였다. 순자는 혜숙이의 걱정도 모른 채 응급실에서 의식불명으로 안정제를 맞으며 눕혀져 있었다. 순자는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의식이 돌아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대기실에 나와서 혜숙에게 순자가 의식을 찾았다고 했다. 혜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순자가 맞아요? 하면서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간호사는 고비를 넘겼으니 상태가 곧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짜고 매운 것은 맛을 보아야 알듯이 혜숙은 간호사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순자를 보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간호사는 응급실 면회는 정해진 시간에만 된다고 해도 혜숙은 간호사를 뒤따라 뛰어들었다. 급하게 뛰어든 혜숙은 순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서야 살아있다고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매운맛을 느꼈다. 그토록 순한 순자가 야생화처럼 꺾이어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긴장은 점점 사라져 갔다. 응급실에서 의식이 돌아온 순자의 팔에는 링거액이 핏줄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간호사가 놀란 기색으로 혜숙을 잡아당기듯 밖으로 내 보냈다. 그러고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려 박순자를 퇴원시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두 명의 기동대 경찰 요원이 순자의 집을 경계 근무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혜숙은 경계 근무자에게 주인이라고 하였더니 별다른 저지는 받지 않고 순자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올 때는 장마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여 비를 맞지 않았다. 잠시 후 뒷산에는 안개가 팔을 뻗더니 산허리를 얼싸안았다. 하늘엔 구름이 오락가락하더니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주민은 사건 현장을 보고 싶었지만, 경찰의 저지로 순자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형사가 집 밖으로 나오자 주민은 무슨 일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형사는 사건 전모를 주민에게 알려주었다. 사건을 전해 들은 주민은 시장에서 이웃에게 퍼트린 입소문은 바람보다 더 빠르게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순자에게 걸려온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붉은 천으로 띠를 돌려 막아놓았다. 살인사건 현장을 지켜보던 형사는 감식과 요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반장은 사람이 죽어있어도 아무런 감정 없이 물건 취급하고 있었다. 차지대형사 반장은 죽은 사람을 많이 다루어 만성이 되어있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칠월 중순에 장마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감식과에 근무하는 김재규 의사가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시신을 점검하였다. 김재규 의사가 식칼의 손잡이와 현관 문고리 등의 지문을 감식하기 위해 여러 기구를 사용했다. 방문 손잡이를 비롯하여 범인의 손이 갈만한 곳엔 한 곳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검시관은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뒤집혔다. 시신 얼굴에는 예리한 칼끝으로 채를 썰듯이 난도질당해 있었다. 김재규가 혀를 차면서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순자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남편의 죽음을 믿지 못하여 다시 확인하려고 방으로 들어섰다. 남편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박순자는 남편을 여의고 비통해하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죽음을 확인하고 다시 쓰러졌다. 검시관은 기절한 순자에게 안정제를 주사하였다. 순자는 기이하게도 잠시 후 깨어났지만,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앉아 남편을 회상하고 있었다. 검시관은 순자에게 시신을 검시 장 냉동 보관함으로 옮기겠다고 전하고 바로 이동시켰다.
차지대 형사반장은 사진기로 범인의 흔적이 될 만한 곳을 모두 찍었다. 비가 내리는 골목에는 주민이 가지 않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임무를 마친 차지대 형사반장은 직무실로 돌아갔다. 차지대 형사반장은 이 사건을 김명태 형사에게 맡겼다. 형사반장에게 사전을 맡은 명태 형사는 쫓기는 근무시간에 피로가 쌓여있었다. 살인사건 전문담당 김명태 형사는 장마철에도 잠이 부족하여 불쾌지수가 높아져 있었다. 더위가 이어지는 여름철에는 성폭력 사건 살인사건 등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명태 형사가 집으로 와도 아내와 사랑에 빠져볼 여유가 없었다. 너무나 피로하고 잠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명태 형사는 힘에 겹도록 사고 현장을 찾아다닌다고 피로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피로에 지쳐있는 남편인 명태 형사를 포근하게 반기면서 사랑을 갈구하지만, 수족관에서 죽어가는 생선 같아 보였다. 정신적 피로를 알지 못하는 차지대 형사반장은 사건 정보를 명태 형사에게 전했다. 명태는 살인자를 잡는데 특별한 지능을 가진 형사였기 때문이다. 명태 형사는 심리전으로 범인을 잘 잡는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사건을 인수받은 형사가 고인이 경영하던 정밀기업으로 찾아갔다. 회사는 사상구에 공장이 밀집한 곳에 있었지만, 가는 길목에는 작은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 향기 풍기고 있었다. 회사 안으로 들어서서 사망자를 보필하던 사장의 처남인 박치기 과장을 만났다. 장시간 대화하면서 조금의 의심이 갈만한 말을 메모하였다. 명태는 이렇다 할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비서를 겸직한 경리를 만났다. 경리에게 무엇인가 의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말을 들었다.
박순자는 남편의 죽음을 친인척에게 알릴 생각도 잊은 채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었다. 혜숙이가 다시 찾아왔을 때 뇌사 상태 사람처럼 눈동자가 풀려있었다. 손을 잡고 친구를 감싸 안고 다독거리며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순자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박순자가 시집간 딸에게 전화하여 울음 석인 목소리로 아빠의 죽음을 알렸다. “명희야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 “뭐라고? 아빠가 무슨 사고를 당했는데?” "설명할 말이 없으니 어서 오너라." 순자는 전화를 끊고 멍하니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슬픔을 아는지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희는 아빠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잠시 후 아빠의 소식을 확인하려고 엄마에게 전화했으나 계속 통화 중이었다. 아빠의 사고 소식에 놀라 기절할 뻔한 명희는 울음으로 남편에게 알렸다. 딸은 친정으로 달려와 엄마를 안고 어느 병원에 있느냐고 물었다. 순자는 딸을 얼싸 안고 옷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죽었다고 했다. 명희는 아빠가 죽었다는 말에 놀라서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남편을 잃은 순자는 딸이 곁에 있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명희는 아빠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엄마에게 졸랐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혜숙은 명희에게 사건 전모를 차분하게 일러주었다. 듣고 있던 명희는 울분을 터뜨리며 통곡하였다. 명희의 남편은 자인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처가로 즉시 달려왔다. 장모와 아내가 울고 있는 모습에 사위는 내막도 모르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혜숙은 친구의 사위에게도 사건 전모를 말해주었다. 사위도 눈물을 흘리면서 장모와 아내를 얼싸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소리가 방안을 꽉 메우고도 남아 창밖으로 넘쳐흘렀다. 한 참을 그렇게 울던 사위가 정신을 차려서 장모 곁에서 슬픔을 위로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사가 나타나자 공포심은 조금 사라졌지만, 불안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명태 형사가 순자를 찾아와 질문했다. “사고 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받았나요?” “아니요.” “낯선 사람을 집 주위에서 본 일 있나요?” “아니요.” 순자는 세상이 귀찮은 듯 대화도 싫어하는 눈치였다. 명태 형사는 순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형사가 다시는 질문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순자의 집에서 나왔다. 집 밖 골목에는 비를 맞으면서도 손수레에 채소를 판매하는 사내가 있었다. 형사는 사내를 눈여겨보았지만, 범인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명태 형사는 죽은 사장의 회사로 찾아갔다. 회사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근무에 충실히 하고 있었다. 사장은 죽었지만, 직원들은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형사는 정밀기업 사무실에 들러 몇 명의 직원에게 각가지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근거가 될만한 말꼬투리를 찾지 못하고 경찰서로 돌아갔다.
박순자는 밤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않고 잡념이 꼬리를 물었다. 결혼 초기의 남편을 생각하며 옛 추억에 잠겼다. 시집살이하면서 엄격한 시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호되게 받았던 순간이 추억되기도 하고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집의 관례대로 교육을 철저하게 전수받았다.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아가며 호되게 시집살이도 하였다. 시집생활은 힘들고 긴장된 나날이었지만, 남편이 보이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긴장의 날을 잊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별난 시부모를 여의고 고생에서 해방된 기분으로 행복한 삶만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눈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외로움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었다. 삼십 년의 즐거운 삶이 하루같이 지나갔는데, 여생을 생각하니 동굴 속에 서 있는 기분 같았다. 순자는 잠을 청해보았으나 잡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순자는 범인이 나타나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날마다 밤이 깊어 오면 순자는 공포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창밖에는 둥근 달이 구름 사이로 순간순간 나타나지만, 장마철이라 달빛을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선잠을 깨우지만, 공포에 질린 순자는 잠을 설쳐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편이 있을 땐 그토록 짧았던 밤이었는데 곁에 없으니 외로운 밤은 지루하다 못해 답답하였다.
순자는 집으로 돌아와 시댁 어른들과 장례절차를 의논하였다. 범인이 언제 잡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시신을 인수받아 장례식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최상기의 죽음이 슬프다며 칠월의 하늘은 며칠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자는 경찰서 시신 보관 관리자를 만나 당장 시신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김명태 형사는 검시관과 의논하여 곧 연락하겠다고 했다. 순자는 경찰서 명태 형사에게 시신을 돌려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검시관 부검 담당자 김재규 의사가 냉동실에서 끄집어낸 시신을 외상부터 내부까지 철저히 조사하였다. 의사는 이토록 잔인한 죽임을 당한 시신은 처음 보았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부검한 내용과 감식결과를 형사에게 전했다. 검시관은 식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보아 목을 졸려 죽인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얼굴에 날카로운 흉기로 난도질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부엌칼로 심장부위를 찔러놓은 것 같다고 역설한다. 검시관은 칼에 찔리는 순간 근육이 반응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흉기로 찌르면 근육이 뭉쳐지는데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망자의 집에는 어디에서도 지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검시관은 형사에게 계획된 보복살해 사건 같았다고 언급했다. 흉기로 사용한 부엌칼에도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으로 보이는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시관은 전문 살인범의 행동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형사는 원한 관계에 얽히더라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인 것을 의심스러워했다. 다음날 명태 형사는 순자에게 연락하여 부검을 마쳤으니 시신을 가져가라고 했다. 연락을 받은 순자는 곧장 시숙에게 알렸다. 시신을 인수받은 순자는 대성통곡하다가 또다시 실신하였다. 순자 곁에서 지켜보던 명희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검시관을 잡고 간청하였다. 검시관이 안정제를 주사하고 나서 한 시간 후에 순자가 깨어났다.
박순자의 시숙은 두구동 영락공원 관리실로 가서 영안실을 계약하고 7호실을 배정받았다. 7호실로 오면서 상조 사무실에 들러 도우미를 보내달라고 했다. 순자는 일가친지에 울먹이면서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일가친척들은 슬픈 소식을 듣고 영락공원 영안실로 몰려들었다. 염을 완료한 집안 어른이 입관 행사가 끝났다고 상주에게 알렸다. 상주는 난도 당한 얼굴이 너무나 흉물스러워 확인하지 못하고 곽을 덮었다. 상주가 곡을 시작하자 조용하던 영안실에 가족 친지들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꽉 메웠다. 곡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건물 밖에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순자의 아들 최하라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명희 누나에게 아빠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급히 달려왔다. 하라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골목에는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희라는 다시 택시를 탁도 영락공원 영안실로 찾아갔다. 칠 호실에 도착하자마자 상복도 입지 않고 엎드려 관을 치며 통곡했다. 하라는 아빠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여 울고 또 울었다. 슬픔을 참고 있던 순자가 아들이 통곡하는 모습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퍼지고 앉아 눈물을 쏟아내며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어머니와 동생을 지켜보던 딸도 함께 울 때 조문왔던 일가친척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동시에 소리를 내어 울음바다가 되었다.
정밀기업 박치기 과장은 직원을 데리고 영안실을 찾았다. 간부들과 행정요원들이 먼저 엎드려 고인에게 명복을 빌었다. 회사직원이 많아 이틀 동안 번갈아 찾아와서 고 최상기 사장에 명복을 빌었다. 이런 와중에도 형사는 영안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형사는 상가에 오는 모든 사람의 눈빛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 범인은 어떤 관계로 사장을 죽이던 보복이라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자 상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웅성거리던 조문객은 멀어져 가고 가족들만 남았다. 형사는 상주에게 자신이 입장을 전하고 주위에 범인이 있을 것이니 항시 조심하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연락하라고 하고는 형사도 등을 돌려 떠났다. 고인을 짝사랑했던 정밀기업 경리 오미자는 직원과 함께 다녀가고 이튿날 다시 찾아왔다. 고인이 애석하여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명복을 빌었다. 고인이 되기 전에 사장이 미자를 물심양면으로 아껴주었기 때문이다. 미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마을 주민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주민은 한꺼번에 고인의 영전에 기도하면서 하나같이 사장의 죽음에 대성통곡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민은 상주와 인사하고 다시 울었다. 고인이 살아있을 때 주민에게 친절하면서 예절이 발라 인기가 많았다고 입 모아 말했다. 주민은 가족같이 대하던 사장이 죽었다고 너무나 애석해 하였다. 문상을 마치고 나온 주민은 순자의 손을 잡고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주민은 하나같이 박순자의 등을 다독거리며 우리가 있으니 슬픔을 잊으라고 했다. 사흘 동안 조문객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순자는 피곤함도 잊고 남편의 업적에 고개 숙였다.
지루하던 장마가 또다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하늘은 수시로 맑게 개이고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고목에는 매미가 불볕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슬피 울고 있었다. 화장[火葬]장 화로에 담겨 천이백 도의 고온에서 최상기가 불탔다. 이승에서 사라져간 상기는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일가친척들은 장례예식이 끝나자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상주가 된 하라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봉지에 담았다. 하라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다시는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맑게 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햇볕이 더욱 강하게 비치고 있었다. 오륙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뭍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갔다. 스님은 목탁소리에 불경을 실어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하라는 아버지에 대한 애환을 뼛가루와 함께 날려보냈다. 하라가 아버지의 뼛가루는 물고기의 먹이로 보시하였지만, 영혼은 천상에 날렸다. 그리고 인간으로 환생하길 기도하였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에 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통통배는 임무를 마치고 순자의 가족을 태운 채 뭍으로 향해 물결을 일으키며 달렸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하라 귀에는 슬픈 발라드 음악처럼 들렸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일렁거리는 물 위에는 은빛 윤슬이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순자의 가족들은 슬픔을 바다 위에 털어버리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편안한 안식처로 돌아왔다. 명희가 남편과 함께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나려고 나섰다. 손자는 할머니 또 올게, 하고 손을 흔들지만, 명희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만 옮겼다. 하라도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라는 어머니의 삶이 걱정되어 외국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던 공부 마치고 오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떠나긴 하지만, 슬픈 마음이 발목을 잡았다. 하라가 가던 발길 멈추고 뒤돌아볼 때 눈물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엄마를 혼자 두고 떠나는 하라의 발걸음이 천근이나 되는 듯하였다. 어머니 혼자 생활하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하라는 반드시 성공하여 오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공항으로 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하라는 공부에만 집념했다. 순자는 둥지 떠난 아들딸이 성공하길 두 손 모아 고개 숙였다. 자녀가 떠난 가정에는 순자만 홀로 남았다. 외로움에 젖어가는 순자는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순자는 남편을 죽인 범인이 나타날까? 밤마다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외로움에 젖어있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순자는 꿈에서 남편 최상기가 보였다. 결혼 후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는데 몸이 허약하여 그런가 하고 의심도 했다. 남편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거실에 마주앉아 대화 나누는 꿈이었다. 꿈이었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남편은 회사를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잠시 다녀온다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박순자는 벌떡 일어나서 전등불을 켰다. 순자가 자던 침대 옆자리에 온기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도 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찾아보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꿈을 꾸었는데 같은 꿈이 계속되었다. 남편의 영혼이 순자에게 무엇을 암시하는지 궁금하였다. 순자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남편의 물건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면서 골라잡은 잠바 넥타이 양복 등을 어루만질 때 젊은 시절을 추억하기도 했다. 장롱에서 옷이랑 배낭 골프에 관한 여러 가지 물건을 모두 정리하여 버렸다. 남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도록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오래된 집에 창틀을 수리하여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방과 거실도 모두 밝은색으로 도배하였으니 순자는 새집으로 이사 온 기분이 들었다.
순자의 가족이 한곳에 모였다. 순자의 성품이 박꽃같이 순박하였는데 꿈에서 남편을 본 후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달라졌다. 순한 양처럼 온순하고 겁이 많던 순자가 가정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남자처럼 행동하며 두려움을 멀리하였다. 순자는 남편이 경영하던 회사를 맡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자녀 앞에 선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명희가 어머니는 회사경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외삼촌에게 맡기라고 했다. 어머니가 기어이 하려고 하자 명희는 실어증에 걸렸나?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순자는 딸과 거실에 앉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명희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고 제의하였다. 순자는 아빠 대신 회사에 출근하여야 한다며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가끔 찾아온 딸에게 웃음 넘치는 화목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장맛비에 씻긴 세상은 맑고 깨끗하지만, 순자의 마음에는 빛없는 터널처럼 음울하였다. 박순자는 며칠간 구상 끝에 남편이 경영하던 회사를 맡기로 했다. 순자는 회사를 경영하려고 바쁜 일정을 시작하였다. 회사를 동생 치기에 맡기려고 했지만,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순자가 회사를 경영하려고 오미자를 불렀다. 비서와 경리는 겸직하던 오미자와 해운대 비치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순자는 약속 시각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해변에 자리한 커피숍은 풍광명미한 휴양지 같았다. 순자가 도착했을 때 오미자는 약속한 장소에 먼저와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한두 번 보았기에 전혀 기억하지 못하여 서로 알아볼 리가 없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조망하기 아주 좋았다. 해운대 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미포 선착장에는 유람선이 조명을 번쩍거리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해운대 모래사장으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 커피숍 창가에 앉은 순자가 오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미자가 커피숍에 들어올 때 카운트에 메모를 남겼다. 커피숍 레지는 메모를 받았지만, 잊고 있었다. 오미자는 시간이 지났는데 보이지 않아 카운트에 가사 말했더니 아! 하면서 순자가 남긴 메모를 보여주었다. 미자가 찾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순자가 앉은 자리로 안내하였다. 오미자는 사모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자. 순자는 그제야 미자를 알아보고 반갑다며 손을 잡았다. 박순자는 처음으로 오미자에 작은 소품을 선물하면서 수고 많다고 격려했다. 미자는 고인이 된 상기를 짝사랑한 죄로 자책감에서 떨고 있었다. 순자는 불안해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은 진실이 있어야 한다면서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미자는 숨김없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인으로 오해할까 봐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밀기업에 처음 입사하여 사장님이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심에 마음이 끌려 좋아하였다고 진실을 털어놓았다. 순자는 담담하게 듣고 있다가 오미자에게 물었다. 사장도 미자를 좋아하였나? 아니요. 사장님은 모릅니다. 저 혼자서 짝사랑했어요. 여자가 혼자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나 같으면 그보다 더했을 것 같다고 하니 오미자는 빙그레 웃으며 그제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순자는 차를 한 잔 마시더니 오미자에게 신상정보를 낱낱이 물었다. “미자는 어린 시절에 어디에서 살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산청군 금서면 평촌마을에 살았어요.” 아주 산골입니다. 평생 살아도 기차 구경 못 하고 산에서 멧돼지가 나타나 밭을 엉망으로 파헤치는 아주 깊은 산골 마을입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응 그렇게 좋은 곳에 살았나? 노후에 그곳에 정자나 지어놓고 글이나 쓰면서 살면 참 좋겠다고 순자는 오미자에 칭찬하듯 말했다. “학교는 어디에서 다녔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부산에서 동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어요.” “정밀기업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교수님이 사장님과 친구라면서 소개해 주었어요.” 교수님은 저에게 말하더군요. 일 잘하는 시골 출신의 아가씨를 경리로 모집한다고 생각이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고 했어요. 교수님께 취직자리를 간청했는데 어느 날 함께 가자고 하여 따라갔어요. 사장님과 오찬을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인사했어요. 사장님은 아가씨가 예쁘다며 경리를 할 수 있는가? 자신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충 알 것도 같은데 교수 이름이 무엇인가?” “기지기 교수님을 사모님도 알고 계신가요?” “응 알아 남편이랑 아주 친한 친구지.” “네 그러셨군요.” “교수님 체면을 보더라도 잘해야 하겠군.” “그래서 지금까지 열정을 쏟아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미자에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네 무엇이든 부탁하세요.” “내가 사장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면 미자는 예전처럼 일할 수 있나?” “당연히 오셔야지요, 온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순자가 회사를 맡아서 운영하면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오미자는 사심 없이 털어놓았다. 사모님은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미자는 사모님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다. 미자는 사모님이 사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했다. 같은 여성으로 더욱 가까이 대화할 수 있으므로 이점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미자는 십오 년을 사장님 곁에서 보고 느낀 상식을 낱낱이 보고 했다. 미자는 사장에게 보고하는 느낌으로 순자에게 말했다. 비서 겸 경리를 오래 한 경험을 살려 사모님 곁에서 온 힘을 다하여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순자는 고맙다고 하면서 박치기에 대하여 질문했다. 박치기 과장이 사장으로 부임하면 어떤가? 오미자는 박치기 과장은 대인 관계가 부족하여 사장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면 오미자는 전 사장처럼 잘 보필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지요. 사장님이 있을 때보다 더 밀착하여 모시겠습니다. 사모님이 사장이 된다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정열적으로 일하겠다고 다짐하는 미자다. 순자의 비서가 되겠다고 미자는 사장으로 취임하라고 곁에서 부추겼다. 순자가 미자를 데리고 커피숍에서 나와 해변을 걸었다. 밤은 어둠 속으로 깊어가지만, 파도소리는 배경음악으로 철썩이고 있었다. 오미자는 사모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삶을 의논하려고 했다.
순자는 상담자가 되어 오미자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미자는 순자를 자매처럼 생각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삶의 행로를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하기도 했다. 오미자는 삼십 대 전후로 선을 보기도 했지만,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혼기를 놓쳐 중매도 들어오지 않아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했다. 이제는 독신자로서 회사 일에만 열정을 쏟겠다고 하였다. 밤바람은 시원하지만, 어둠은 두꺼워지고 있었다. 주위의 불빛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미자가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순자에게 매달리려 하고 있었다. 순자가 개울에 물이 흐르다가 다른 개울물과 아우라지에서 한 몸 되어 등치가 굵어지면 힘차게 흘러가듯이 사람도 같은 처지라고 미자에 알려주었다. 혼자 살고 싶어도 때가 되면 기대하지 않던 보호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것이 인연이고 삶의 흐름이라고 했다. 순자는 미자를 가까이하려고 심리를 테스트해 보았다. 오미자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장으로 취임하면 비서로 근무하라고 했다. 미자와 헤어져 집으로 온 순자는 잠에 취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눈이 떠 있는 시간에는 회사경영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순자는 일전에 꿈에서 남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 꿈을 꾼 후부터 자신도 모르게 용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집 밖을 모르던 순자에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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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후가 궁금하네요.~~
네 곧 나옵니다. 기대해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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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운영자님 꽃도 사랑도 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