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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으며, 328년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을 벌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별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보내시어
성자의 신성을 힘껏 변호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보호로 기뻐하며
하느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87(86),1-3.4-5.6-7(◎ 117〔116〕,1ㄱ)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또는
◎ 알렐루야.
○ 거룩한 산 위에 세운 그 터전, 주님이 야곱의 어느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을 이야기하는구나. ◎
○ 나는 라합과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 보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 시온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여기서 태어났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몸소 이를 굳게 세우셨다.” ◎
○ 주님이 백성들을 적어 가며 헤아리신다. “이자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노래하는 이도 춤추는 이도 말하는구나. “나의 샘은 모두 네 안에 있네.” ◎
복음 환호송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5,1-5)와 복음(마태 10,22-25ㄱ)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복된 아타나시오를 기리며 봉헌하는 제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를 본받아 온전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여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1코린 3,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와 함께 성자를 참하느님으로 굳게 믿어 고백하오니
저희가 이 성사로 힘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복음 묵상), 요한의 뜨락에서 퍼옴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며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하신다(복음).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 교회로 보내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인지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나를 증언한다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신다(복음).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거기로 보내어 격려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우상 숭배로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다시 정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자신을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일컫던 안티오코스 4세가 저지른 신성 모독을 모든 이가 뼈저리게 되새기던 그날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목숨을 건 정면 승부였습니다.
이러한 ‘도발’을 서슴지 않으신 것은 유다인들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이며, 그들이 진리와 생명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앗아갈 셈이오?(직역)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 대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금껏 거듭 밝혀 오셨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돌로 치려고 한 것을 보면(10,31 참조) 그들은 처음부터 불신과 완고함을 거둘 뜻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주님 탓으로 돌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내 숨통을 조이시는 분’으로 여기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듣거나 보면서도 자신을 더 설득해 보라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도 실천 없이 기대만으로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양들은 당신 곁에서 귀 막고 있는 유다인들이 아닌, 용기와 결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응답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랑받는 양으로 살아갑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강수원 베드로 신부)
절망해 본 적이 있나요? 깊은 좌절에 신음해 본 적이 있나요? 살다 보면 죽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따뜻하게 건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축 처진 어깨를 감싸 주는 누군가의 손길은, 우리가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바르나바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시 사울은 그동안 굳건하게 믿어 온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선포하는 이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변절자인 사울을 찾아 죽이려 하였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박해자였던 사울을 두려워하여 그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고향 타르수스에 칩거하며 어둠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를 바르나바가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빛과 희망의 세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바가 사울과 함께 일군 안티오키아 공동체 구성원들은 인류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우리의 신원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사울에게 위로와 용기의 손길을 건네 준 바르나바를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12월 중순, 겨울에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인들을 몰아낸 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기간 내내 촛불을 켜 놓고 압제의 어둠에 시달리던 그들이 자유의 빛을 되찾은 기쁨을 기념하였습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 성전 봉헌 축제를 더 장엄하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메시아, 곧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들은 마카베오가 시리아 왕국을 물리쳐 승리한 것처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여 예수님을 반역죄로 죽일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메시아요?” 하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한 일을 보아라.”(요한 10,38 참조)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오로지 내어 주는 사랑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온 생애가 양을 위하여 언제나 함께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삶이었음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나서듯이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그분의 양이 될지, 다른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다른 양’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상대에 대한 답답함은 실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상대가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자신이 당연하다는 것’을 상대가 부당하다 하니까 답답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깨질까 봐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비판하며 다가선 유다인들도 답답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이 듣고 싶던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 예수가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메시아는 ‘하나 됨’의 메시아입니다. 양들과 하나 되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부를 이 세상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본디 유다 사회는 ‘메시아’를 흩어지고 갈라진 세상을 조화와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는 분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창조 때부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고 그리하여 마지막 때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잔치를 즐기는 것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의 익숙한 삶에 맞는 메시아가 아니라, 낯선 이와도 함께할 수 있는 여유와 배려의 삶 안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답답해하기보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연함을 지닐 수 있어야 메시아께서 자유로이 우리 곁에 오실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의 행적을 둘러싸고 유다인들의 갑론을박이 심해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답답한 마음에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라면 그분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기대어 권력에 빠져 있는 자신들의 임금에 대항해서 다윗 왕조의 옛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말씀으로, 메시아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 수난하고 부활할 것임을 예고하셨음에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메시아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구원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에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그분을 따라나서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양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지키시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며,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빌미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몰아가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당신을 끝까지 따른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약속대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에게 선포되었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성령의 빛을 받아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유다인들처럼 내게 필요한 능력과 권력을 지닌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답답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던 힘과 권력의 메시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이 공격적인 질문 속에는 불신과 증오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 관념에 가두어 두려는 편협함이 엿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오만한 유다인들은 그 표징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러한 유다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빗대 “때는 겨울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자신의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고, 아량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빗대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떠한 표징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시의 빛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얼음장 같은 편견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겨울”이라는 표현 속에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운명을 맞게 되실 것인지도 예표되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바르나바처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거짓과 오류에 맞서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물어봅시다. 나는 과연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마디로 신뢰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양들은 시력이 약해서 앞을 잘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이끌어 주는 목자의 음성과 다른 사람의 음성은 정확히 구별하지요. 그러기에 양들은 자신을 이끄는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신뢰란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어도, 손으로 확인해 보지 못했어도, 신뢰하는 상대방이기에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상대방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의 계약을 맺은 하느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신뢰가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을 다양하게 찾아야 합니다. 신뢰 회복을 위한 첫 번째 길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듣고 이해하고 있는지, 또 그런 노력을 어느 정도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도 늘 생각하며,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며, 그를 배려하는 습관도 길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주일부터 오늘까지 미사 독서에서 들은 요한 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적대적 반응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을 때,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10,6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이 구원의 문이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목자이며 아버지와 서로 깊이 알고 사랑하시는 관계라는 사실을 '계시의 언어'를 통해 결정적으로 알려 주시자 그들 사이에는 격렬한 논란이 일어납니다(10,20 참조). 점점 심해지던 긴장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이들은 이제 예수님을 배척하고 해치려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10,31.39 참조).
유다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성전에서의 논쟁의 도입 부분에서 오늘 복음은 "때는 겨울이었다."라고 전해 줍니다. 요한 복음 10장을 찬찬히 읽은 사람이라면 이 구절의 깊은 뜻을 금세 느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논쟁하던 유다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거부하고 증오할 것인지를 예감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유다인들이 '겨울의 마음'을 가졌다고 절묘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복음이 생생하게 보여 주는 유다인들의 불신과 증오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깊이 성찰할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에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10,26 참조). 그리고 유다인들이 예수님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된 순간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대면하였을 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님께 한없이 깊이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그분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는 신비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겨울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과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신앙의 봄'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며칠째 복음에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우리가 목자이신 예수님의 한 마리 양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지요? 예수님의 양이 되어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푸른 풀밭을 찾아서 온종일 찾아다니다가 이제 날이 저물었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들판에 임시로 마련된 양 우리로 양들을 데리고 들어오십니다. 다른 목자들도 날이 저물자 제 양들을 몰고 양 우리로 돌아옵니다. 들짐승들의 공격과 한밤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제 모든 양이 모여서 이 밤을 지내야 합니다. 밤이 어둡고 맹수의 공격이 두려운데 가끔씩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양들은 가까이 있는 목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밤이 편안해집니다.
이제 아침이 밝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를 찾아 나서느라 시끄럽고 분주합니다. 드디어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양 우리 문 앞에 서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데레사, 루치아, 체칠리아, 베드로, 바오로 ……. 어쩌다 자신의 이름을 빠트리시지 않을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드디어 이름이 불립니다. 마치 우등상을 타는 어린이처럼 소리를 내며 예수님 앞으로 폴짝 다가갑니다. 또 오늘 하루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에게 푸른 풀밭과 샘터를 찾아 나서는 행복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사실 이것은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른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님과 함께 풀밭을 찾아다니듯 저마다의 일터에서 열심히 삽니다.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주님의 도우심 속에 잠을 청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루하루를 목자이신 주님께 맡기고 사는 양이라고 생각하면 참 편해집니다. 내일도 모레도 우리를 불러 푸른 풀밭과 샘터로 이끌어 주실 테니까요.
유다인 몇몇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것은 신앙인의 갈구가 아닙니다. 허점을 찾으려는 질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답변도 단순합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기에 엉뚱하게 질문한다는 지적이십니다.
그런 자들은 오늘도 언쟁을 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님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고집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고집은 아름답습니다. 신념으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부정하고 배척을 일삼는 고집은 추해 보입니다. ‘한쪽만 보는 반대’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적까지 비난하게 만드니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쪽에 속하고 있는지요?
단순한 믿음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풍요로움’과 ‘내적 가난’은 동전의 양면입니다.절제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으로 벌써 알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손길’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체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