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깜깜한 터널의 끝에서 발견한 빛줄기만큼 반가운 게 또 있을까요. 1990년대 신바람야구를 주도했던 LG가 오랜 기간 암흑기 터널을 거쳐 조금씩 빛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만년 하위권에 머물 것 같았던 팀이 발전을 거듭하며 상위권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담당기자로서 상당한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어느 날 찾아온 행운으로 즐거워하다가 큰 불행을 맞아 슬퍼하는 인력거꾼 김천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극적 상황을 ‘운수 좋은 날’이라는 반어법을 사용해 극대화시킨 사실주의 소설이다. 이제 막 야구인생을 걷기 시작한 LG 김대현(20)과 고우석(19)의 야구인생 처음도 이 소설의 제목과 같았다.
김대현에게 2015년 6월 29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69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감격스러운 우승을 맞봤다. 동시에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겹경사로 같은 날 2016 신인드래프트에서 LG에 1차 지명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고우석도 그랬다. 2016년 6월 27일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운수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2017년 신인 1차 지명 대상자로 뽑혔다. 비록 충암고가 전국야구대회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묵직한 공 하나로 프로 지명, 그것도 1차 지명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게다가 LG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팀이었다. TV에서만 봤던 선배들과 함께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그저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구단은 둘에게 지명순서에 합당하는 대우를 했다. 김대현은 쌍둥이구단 유니폼을 입는 순간부터 LG 레전드 이상훈 코치에게 1대1 지도를 받았다. 이 코치와 생활하며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강인한 정신력을 배우는 기회를 얻었다. 고우석도 입단하자마자 올 미국 애리조나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프로에 갓 입단한 신인이 캠프에 초대되기는 구단으로서도 몇 년 만의 일이었다. LG 양상문 감독은 “마무리캠프에서 피칭하는 모습을 봤는데 공이 묵직했다”며 “즉시전력감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김대현과 고우석은 1차 지명에 남다른 대우까지 받았다. 당연히 1군 무대에 설 기회도 빨리 얻었다. 그러나 막상 닥친 현실은 냉정했다.
김대현은 2016년 3월 2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넥센과의 시범경기에서 선발 등판이 결정됐다. 정규시즌은 아니었지만 신인투수에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행운’에 그만 긴장을 하고 말았다. 마운드에 올라가자마자 몸이 얼어붙었다.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는 이날 10구만에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전광판에 스트라이크 불이 켜지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주자는 나가면 뛰었다. 머릿속이 하얘져 주자를 견제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1회에만 3실점했다. 2회도 마찬가지였다. 첫 타자를 우익수플라이로 처리했지만 또 한 번 제구력이 흔들리며 볼넷과 안타를 내줬다. 실책성 플레이까지 나오면서 실점이 늘었다. 결국 그의 첫 성적표는 1.1이닝 3안타 4볼넷 5실점(4자책점)이었다.
고우석도 올 시즌 시범경기가 프로 첫 1군 무대였다. 2017년 3월 14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와의 시범경기에서 세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첫 타자 김원석에게 볼넷을 내주더니 두 번째 타자 강경학에게 우전안타를 맞았다. 무사 1?2루서 이번에는 그의 손을 빠져나간 공이 하주석의 무릎을 강타했다.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무사만루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여기서 폭투까지 나오면 1실점했다. 이어진 윌린 로사리오를 삼진, 이성열을 1루 땅볼, 김회성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1이닝 1안타 1볼넷 1사구 2실점으로 마무리했지만 그야말로 살 떨리는 경험을 했다. 다음 등판이었던 16일 대구 삼성전에서도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2안타 2실점하고 말았다. 이후 3경기에서는 3.2이닝 무실점으로 잘 던졌지만 그는 결국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처럼 김대현과 고우석의 첫 단추는 유쾌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소설 속 김천지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으로 끝났지만, 현실 속 신인투수들은 좌절하는 대신 씩씩하게 ‘다음’을 준비했다. 그리고 2017년 정규시즌 이들은 ‘운’이 아닌 ‘실력’으로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대현은 올 시즌 불펜으로 중용됐다. 4경기에서 8⅔이닝 6안타(1홈런) 1볼넷 4삼진 1실점, 평균자책점 1.04로 호투하며 선발 기회를 잡았다. 19일 대전 한화전이 그의 데뷔 첫 선발 등판이었다. 팀은 0-3으로 졌지만 김대현은 5⅓이닝 6안타 2볼넷 3삼진 3실점으로 호투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지난해와 달리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고우석도 프로 첫 데뷔전이었던 16일 잠실 kt전에서 시속 150㎞짜리 강속구를 연신 미트에 꽂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이닝 1삼진 1실점으로 첫 홀드를 기록했다. 두 번째 등판은 선발 김대현의 다음 주자였다. 그는 6회 1사 만루서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을 압도했다. 빠르고 강한 직구의 힘을 보여주면서 ‘제2의 오승환’이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도 얻었다.
고우석은 ‘운수 좋은 날’에 대한 얘기를 건넸을 때 “그 소설은 끝이 좋지 않지 않느냐”며 고개를 젓더니 “나는 좋은 엔딩을 만들고 싶다”고 남다른 패기를 드러냈다. 김대현도 “난 지금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잘 던지면 좋은 거고 못 던지면 2군 가면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이들은 마운드 위에서 신인답고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LG도 팀의 미래를 책임질 영건들의 활약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들이 써내려가는 현대판 ‘운수 좋은 날’은 반어법이 아니었다. 찾아온 ‘행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노력’으로 자신들만의 야구이야기를 한 자, 한 자 써내려고 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소설 끝이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