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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광송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소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입당송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뽑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주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해마다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을 기꺼이 지내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요한 14,6.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에 드리는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티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8-9 참조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소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리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필립보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일찍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40-46 참조). 필립보가 예수님께 나타나엘을 인도하고(1,45-46 참조) 그분을 뵙기를 바라는 그리스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2,20-23 참조) 선교사의 탁월한 자질을 드러냅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머뭇거리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만큼, ‘누구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제자입니다.
그런 필립보가 정작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고, 그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마지막 저녁까지도,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던 토마스와(14,5 참조), 그저 성부를 직접 뵙게만 해 주시면 충분하겠다던 필립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13,1 참조), 그들이 앞으로 더 큰 일도 하리라 믿으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는 스키티아와 프리기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소 야고보는 다른 사도들보다 먼저 언급될 만큼(제1독서; 갈라 2,9 참조) 사도단의 맏형 구실을 한 이(예루살렘의 초대 주교)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져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한때의 사도들처럼, 알아듣기 힘든 신비와 삶의 우여곡절 속에 믿음과 오해를 되풀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으시는 주님 곁에 머물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어느덧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더 큰 일’을 이루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만나기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또는 교의 신학적으로 그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생긴 의구심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태어난 지 단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뒤 신자로,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아온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온전히는 따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씀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생애를 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분노에 찬 이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그 상태로 다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성인의 삶과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또 그분의 힘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사촌으로 예루살렘의 첫 주교가 되었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도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이방인들의 손에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같이 순교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받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드러내려고 그분을 가리고 있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못 박는 것이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필립보에게,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뵙는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당신의 인간적 원의들 또한 십자가에 함께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에 ‘기쁨’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게 하고, 나를 통하여 행동하시게 하는 것이 ‘기쁨’임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참증언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주님을 드러내고자 십자가를 지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울한 복음 전파자는 교회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내 눈으로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면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을 테니, 필립보의 절실한 마음에 공감이 갑니다. 삶의 무게가 커질수록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더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 말씀은 복음 전체를 요약해 주는 말씀이자,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표징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기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손길을 만날 수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고, 제자들뿐만 아니라 칠삭둥이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신 분이셨음을 확고하게 고백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완전한 길이요, 세상의 거짓과 오류를 넘어 진리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이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심을 한결같이 고백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고, 당신을 믿는 이는 더 놀라운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을 빌려 엄청난 일을 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신 표징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을 굳게 믿으며 이렇게 권고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야고 1,6).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 하고 호기심으로 물었지만, 필립보 사도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의 심오한 신비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하나이며 존재론적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온전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 되십니다. 사도 필립보로 인해 예수님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알려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두 가지 약속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신께서 하신 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하시겠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시겠답니다.
주님의 충실한 사도인 필립보와 야고보 성인의 축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점 하나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필립보의 청원과 예수님의 대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를 보도록 이끄시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바라볼 때 그 안에 있는 사물들을 모두 동등한 차원에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똑똑히 보고 어떤 것은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같은 풍경과 장면을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혀 다른 내용이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체적 또는 물리적 이유보다는 각자의 관심사나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가 보고 싶어 하는, 볼 수 있는 것만을 취사선택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읽거나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풍경과 장면을 바라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꼭 알아보아야 할 대상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말씀을 만나고 세상을 볼 수 있으려면 우리의 관심사를 자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당신에게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길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삶과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또한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만남을 기억하는 것이 제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는 야고보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알패오의 아들로 ‘작은 야고보’라고도 하며, 다른 하나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로 ‘큰 야고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작은 야고보로서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하였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뼈아픈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실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요?
믿음이 깊은 여교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있던 건물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불길을 피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지금 저희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십시오.”
대피하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를 보고서 다그쳤습니다. “지금 대피하십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저희를 살려 주십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후 다른 두 사람이 연이어 그녀에게 대피하라고 소리 질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자비만을 기다리며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게 된 그녀는 다짜고짜 따졌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했건만, 왜 저에게 도움의 손길 한번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원망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나의 딸아! 그 건물에서 피신하라고 나는 너에게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단다. 그러나 너는 나의 말을 듣지도 않더구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줄곧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과 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특별한 계시만을 기대하고 있다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제 영혼이 하느님을, /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시편 42〔41〕)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해 달라고 한 요청이, 마치 시편 저자의 탄원처럼 들립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우리 신앙인의 영혼은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는 신부(新婦)와 같다.’고 하셨지요. 필립보의 영혼이 마치 신랑을 그리는 신부처럼 예수님을 보면서 더욱 그분의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의 모습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형상이 아니라 행위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시려고 육신을 취하신 것이지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그리워합니다.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그리워하시어 우리 곁에 계신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아직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영성의 눈이 열리지 않은 것이지요. 그 답답한 심정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오늘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감히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놀라운 발언입니다.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만큼 예수님을 가깝고 정이 많으신 분으로 느낀 것일까요? 스승님께서는 따듯한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세월이 흐르면서 필립보는 스승님을 하느님으로 깨닫고 모시게 됩니다.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에 관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해야 깨달음이 옵니다. 성경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성경을 멀리하면 그분을 깨닫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이 곧 신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지식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필립보처럼 예수님과 함께 지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읽기와 영성체를 통해 언제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아버지를 깨닫게 해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필립보의 마음이 되어 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