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도를 표하며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충격과 황망함에 떠는 유가족께도 하늘의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왜 가셨나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충격입니다. 애석하고 비통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게 했나요. 이 세상에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나요.
그렇게 당당하던 분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요. 눈을 감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했습니까? 왜 살아서 훌훌 털지 못했나요.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우리 국민에게 무엇을 남기려고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나요.
법을 잘 아는 분이 법이 두려웠습니까? 사법처리가 무서웠습니까?
왜 당당하게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실이 아닌 혐의는 악착스레 진실을 밝혀 정의를 구현(具顯)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진실 규명을 위해 검찰의 철저한 수사는 당신이 항상 강조해오던 원칙 아닙니까?
검찰의 수사에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검찰의 발표가 모두 허위였나요. 그러면 그럴수록 당당히 맞서야 했지 않습니까?
억울했을 것입니다. 검찰의 수사는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公表)가 억울했을 것입니다. 검찰에 소환된 지 20일이 넘었지요.
참 참기 힘든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재판이 끝나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법의 정신을 어기고 마녀 사냥을 조장한 검찰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혐의가 드러날 때마다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검찰의 작태(作態)에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수모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검찰이 그럴수록 왜 당당히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워라, 구속하라,
박연차와 대질하게 하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았습니까?
그래도 미진(未盡)하면 법정 투쟁도 불사(不辭)했어야 합니다.
차라리 검찰이 구속했더라면 삶의 의지, 투쟁 의지가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검찰의 비열한 망신 주기 작태를 타파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서민들이 검찰의 그런 짓거리의 희생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변호사이고 대통령을 지낸 당신이 나서서 치유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일생을 관통(貫通)한 그 투지, 그 강인한 정신이 왜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자주 찾아 갔던 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왜 투쟁의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습니까?
유서(遺書)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자살로 신세를 갚을 수 있습니까? 자살로 앞으로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습니까?
자살로 짐을 덜어 줄 수 있습니까? 더 많은 고통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살아서 신세를 갚아야 했고, 살아서 고통을 덜어주셨어야 했습니다. 무책임했습니다.
지지자에게도, 반대편에게도,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고통과 짐을 지우고 가셨습니다.
혼자만 가벼워지려고 했습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을 가졌으면서 건강이 안 좋다고 하면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어째야 합니까? 책을 읽을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는 정도의 고통으로 자살을 한다면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청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통의 상대성(相對性)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합니다.
당신의 일생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인생이었기에, 잔디 뿌리 같은 끈질긴 인생이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운명이다.”이라고 유서에 남겼지요.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을 극렬하게 욕하고 나무랐던 저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대편에 섰던 저도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기에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허무(虛無)와 무상(無常)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닌가요. 자살이 운명인가요. 아닙니다.
더 슬프게 만듭니다. 더 미안하게 만듭니다. 인생을 더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모방하지 않을까요.
저는 당신을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당신의 이념과, 정책과, 언동을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공인(公人)이었습니다.
우리 국민의 다수를 대변했고 대변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자살을 선택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됩니까?
당신의 죽음이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당신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현 정부를, 검찰을 비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합니다.
‘누가, 무엇이, 왜 전직 대통령을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았는지 역사와 국민이 알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집권세력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정치 보복을 하였기 때문에 당신이 죽었다고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고 당신이 자살했습니까?
당신이 사랑했던 대한민국이 당신의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했습니까?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나라를 존경할 것 같습니까?
세계 언론이 당신의 죽음을 머리기사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국가 망신입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당신이 큰 잘못을 저질러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을 택했다고 단정할 것입니다. 당신을 의인(義人)으로 평가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치보복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옹호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부패 스캔들 때문에 검찰 수사의 압박을 받아 자살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하는 길도 나라를 위하는 길도 아닙니다.
길이 있었습니다. 전직 대통령답게, 아버지답게, 지아비답게,
사나이답게, 인간답게 살 길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즐겨 썼던 ‘한 번 더 어려운 길을 걷기로 결심’했더라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진실을 밝히고 죄가 있으면 죄가 있는 대로 감옥 생활을 하고, 죄가 없으면 없는 대로 떳떳이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참회의 단계를 거치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죄가 없으면 정치보복의 옥죄임을 깨부수어야 했습니다.
전직 대통령 노무현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안타깝습니다.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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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한 단상 <퍼서 옮김>
자살은 어쩌면 대통령 자질이 부족했다는 자백같은 것
유일하게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 사람을 죽일 천부적인 권리가 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종속이 바로 인간이다,
오늘 한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권리를 행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 신권적 권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오늘 그 권리를 행사한 사람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데에서 사뭇 충격적이고 나라는 소란스럽다,
그 전직 대통령이 남긴 유서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겪고 난 뒤에야, 불혹을 지나 지천명을 넘어 이순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집어든 화두 한 구절, 그 虛妄, 저것은 죽비소리도 없는 봉하마을에서 며칠 몇날의 참선수행과 용맹정진의 끝에서 얻어진 法語 한 구절이런가,
증오와 사랑, 진보와 보수, 민주와 독재, 이 모두가 자연의 한 조각이었으니
한 평생 투사의 생애가 부질없구나,
이 모두가 대한민국의 한 조각이었으니 일찍 해탈했더라면,
증오와 질투의 늪에서 세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전직 대통령의 종말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다구니 같았던 한 생애, 산 봉우리에 올라보니,
그 옛날 세상을 향해 정의라고 외쳤던 것들이 지금 자기의 불의가 되었고,
불의라고 손가락질 했던 것들이 자기를 둘러싼 정의가 되었으니,
노무현이 만들려 했던 세상,
정의와 불의가 바뀌어진 세상, 민주화 세상이 부질없었구나,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 가고, 600만 달러가 생계형 자금이 되는 세상,
자기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하여 아내를 감옥에 보내는 세상,
화해와 소통 대신에 편견과 증오의 화신이 되어 두 쪽으로 동강 내어버린 나라와 민심, 자살은 그 회한의 자책인가, 국민 앞에 엎드리는 사죄인가,
어쩌면 인간은 가장 나약한 존재,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약을 증명하는 그 특권의 행사는 비겁하다,
현실로부터 삶으로부터의 도피, 그래서 비겁하다,
한 집단을 이끌었던 대통령으로부터의 도피, 법의 심판으로부터의 도피,
그래서 더더욱 비겁하다, 자살은 어쩌면 대통령 자질이 부족했다는 자백같은 것이다,
그는 죽음을 택함으로서 대한민국 법의 심판을 거부했다,
살아 생전에 대한민국의 법을 우습게 알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도 그랬다, 살아 생전 대통령에 있으면서 지지자들의 손가락을 자르게 했고, 죽어 떠나면서도 국민들에게 자기를 선택한 것이 실수라는 것을 외치며 떠났다,
盧 전 대통령의 주검 앞에서
작성자 베리타스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 화장해라.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 투신자살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내용이다.
안재환, 최진실의 잇단 자살로 나라가 온통 뒤숭숭했었는데, 노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이란 비보를 접하니 망연자실함을 금할 수 없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의 번민과 고뇌에 깊은 동정을 느끼며 유가족들에게 삼가 애도와 조의를 표한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향후 정국에 예측하기 어려운 소용돌이를 일으킬 전망이다. 지금 親盧진영은 극도로 흥분하여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체제 전복세력은 이런 분위기를 최대한 악용하여 꺼진 촛불을 되살리려는 낌새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고인의 바램과는 전혀 무관하다. 고인의 자살이 검찰의 압박수사에 따른 항거였나? 아니면 왜곡된 진실에 대한 항의였나? 고인이 유서에서 밝힌 것처럼 고인은 책을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는 건, 고인이 자신의 손상된 명예에 대한 자괴와 분노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고인이 박연차에게 받은 돈은 사실 대통령 퇴임에 따른 일종의 전별금이며, 그 액수는 역대 대통령들이 수금한 액수에 비교하면 껌 값에 불과하다.
매스컴이 크게 보도했던 100만 달러... 사실 몇 푼 안 되는 돈이다. 그러나 그 돈이 외국에 유학 간 자녀들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로부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겹친 것이다.
고인은 이명박 정부가 그 정도의 비리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예우 차원에서 가려주길 바랬을 것이다. 또 구속된 박연차 회장이 자신과 관련된 내용들은 최대한 발설치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인은 검찰의 수사결과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에 대한 모욕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인은 유서에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라고 썼다. ‘원망하지 마라’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탓하지 말라는 뜻과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라는 뜻이 포개져 있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며 우주적 관조를 취하고 있다. 세속적인 아귀다툼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고인은 왜 투신자살을 선택했을까? 죽음을 결심했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이건 내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고인이 투신자살을 결행한 것은 남상국 사장의 투신자살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겉으로는 표현을 안 했지만 자신의 경솔한 발언으로 투신자살한 남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고인은 마지막으로 ‘화장해라.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고 유언했다. 자신의 무덤을 남기기보다는 ‘작은 비석’을 하나 남기기를 원했다. 그는 그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다. 고인을 좋아했던 국민들은 이제 그 비석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며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것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대척관계에 있었고, 그래서 그를 비난하는 글을 많이 올렸지만, 막상 비보를 접하니 소탈하게 미소 짓던 고인의 선량한 얼굴이 떠올랐다. 손상당한 명예를 죽음으로 대신한 그의 영전 앞에서 차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평소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오죽 더 하랴.
고인은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의 고귀함을 보여주었다. 고인은 자신의 죽음으로 나라가 분열과 반목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응징하리라’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은 외려 고인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온 국민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희생이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술렁이던 세상에 한 줄기 빛이었던 님
가만히 있으려 해도
빛이 빛에 의해 반사되면
거침없이 일어나 앞으로 향하던 님
하늘이 내신 마음 감출 수 없어
온 마음 다해 몸부림쳐 산천을 울리더니
그 길이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어느새
검은 머리 희어지고
몸과 마음 쇠약해져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셨나이다.
한 때는 한 나라의 군주였으면서도
당신을 위한 화려한 묘비를 택하지 않으시고
"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고
흙냄새 고향냄새 풍기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임이여
가신 길도 어찌 이렇게 거친 길을 택하셨나이까
산천이 울고, 만민이 울분하고, 하늘이 탄식합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여운 속에
한 가닥 양심을 뽑아 낼 미지의 결말을 기다리던 민중을 뒤로하고
임은 가셨습니다.
그러나
세포들이 고요를 깨고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안고 떠난 님을 향하여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고
이 땅에 남겨 놓으신 심오한 뜻을 품고서
이제는 고통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싸움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사욕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빛바랜 진실이라도 일어나
함께 어우러진 살맛 나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하늘을 바라볼 줄 알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따듯한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감춰진 진실이 얼굴 내밀 때
임도 우리 가운데 서 있으시기를 바라옵니다.
임 의 영전 에 명복 을 비옵니다. <퍼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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