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첩(勒?)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늑초(勒楚)로 기록되었으며, 늑출(勒出)이라 표기한 사료도 있습니다. 이하 우리쪽 사료에 따라 ‘늑초(勒楚)’로 표기하도록 합니다. 장백산 관련 늑초의 기록이 등장하는 1684년은 여러모로 특기할 만한 해인데 [盛京通志 初刊本]이 완성된 것이 바로 이 해이며, 이 무렵을 전후로 하여 청측에서 (특히 강희제에 의해) 현 백두산과 압록강 등을 경계로 한 국경인식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자세한 것은 추후의 과제로 돌립니다) 늑초는 1684년부터 다음해까지 요령·길림 등지의 변계지대를 돌아다니다가, 1685년 10월경에는 범월한 조선변민과 충돌을 일으켜, 이른바 삼도구(三道溝) 사건이 일어납니다. 을축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을축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의 발단은 1685년 8월경, 함경도와 평안도의 변민들 몇십 명이 후주(厚州)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 경내에 들어가 채삼하다가 압록강 주변 삼도구(三道溝)에서 청측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초(勒楚) 일행과 충돌이 일어나 쌍방간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조선측 변관이 자살하고 주모자들이 사형당하고 숙종이 청측에 벌금(罰銀)을 물어야 하는 등, 이를 해를 넘겨 해결하는 과정은 당시 실록의 사관이 표현한대로 치욕적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강희제는 칙서에서 숙종을 가리켜 ‘너(?)’라고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조선에 보냅니다.
?平日不嚴加禁飭恪愼之謂何 玆特遣護軍統領?保, 內閣學士兼禮部侍郞丹代, 前往同?, 將前項不法之人與地方官疎, 縱情罪嚴察究審 詳確定擬. 其?怠忽之愆, 難爲?貰, 卽著?保等一幷察議, 以聞特諭.[同文彙考 원편 권51, 범월 4쪽] 네가 평소에 엄격하게 금칙(禁飭)하지 않고 신중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호군통령(護軍統領) 동보(?保), 내각학사(內閣學士) 겸 예부시랑(禮部侍郞) 단대(丹代)를 특별히 파견하여 ‘너와 같이(同?)’ 전 항목의 불법자와 지방관이 소홀히 한 죄를 사정에 따라 엄찰(嚴察)하고 자세히 알아 상세하고 명확하게 정하도록 할 것이며, 네가 태만히 한 허물도 용서하기 어려우므로 동보(?保) 등과 나란히 (죄인들을) 찰의(察議)하여야 할 것이다. 이 특유(特諭)를 받들라.
심지어 강희제는 조선조정에 대하여‘군주(君主)가 혼약(昏弱)하고 신하가 자사(恣肆)하다’고까지 비난을 하고 있으며, 실록 등 기록에서 드러나는 조선조정과 숙종의 애태우는 모습은 실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입니다만, 이러한 사건으로부터 계속된 변경문제는 이후 목극등의 백두산 정계비 건에서 보듯이 조선의 대청 외교적 발언권에 대한 심각한 손상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어쨌든 이 삼도구사건이 일어날 당시 정황을 기록한 [備邊司騰錄] 10월9일조의 비국계사(備局啓辭)에는, “卽接義州府尹李增狀啓, 且見禮部咨文, 則鴨綠江三道溝, 繕畵輿圖駐防協領勒楚等, 被我國人放?致傷, 其放?犯人, 要我國先期, 嚴行拿獲, 以待審理云...”라고 하여 ‘繕畵輿圖’ 즉 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화공(畵師)을 동반하고 있었음이 확인이 됩니다. 1684년에 간행된 [盛京通志 初刊本]에 이미 ‘長白山圖’라고 하여 장백산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다음 글 주제), 초간본에는 그 발행과 같은 해의 일인 늑초 일행의 기록도 남겨져 있으며(康熙二十三年(1684년), 奉?遣駐防協領勒出等), 앞의 번역문상에서도 보듯이 장백산조 항목에 늑초의 기록이 들어있는 것 등과 함께 ‘(장백산의 형세가) 명통지에서 말한 바와 같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늑초 일행이 또한 청 조종의 발상지인 장백산을 답사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나왔지만 ‘명통지에서 말한 바와 같다’고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맥이라 하겠습니다. 이 구절로 인하여 우리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불함산/백산/태백산’이 청시기의 장백산으로까지 이어지고, 다시 이 청조의 발상지이기도 한 장백산이 아울러 현 백두산으로까지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문헌상 연결고리’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단절된다면, 다시 말해 늑초의 이 명통지 언급기록에 의해 불함산에서 비롯된 그 이름이 장백산이면서 청 조종의 발상지로 하나로 연결이 되고, 다시 현 백두산으로 연결이 되는 그 지점 중 어느 하나의 고리가 끊어지게 된다면 사실 우리의 고대사는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상고해야 할 문제를 대두시킨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위 번역문 장백산조에는 무묵눌의 등정기뿐만 아니라, 늑초 일행의 등정기도 나란히 실리게 되어 두 기록을 비교할 좋은 자료로 됩니다. 이제 늑초 기록을 통한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늑초(勒楚)의 기록 중에서 압록강과 동가강 설명 부분 : 남쪽 기슭은 꾸불꾸불 뻗어서 나누어져 두 줄기로 되는데, 줄기 하나는 서남쪽으로 향하여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요, 서쪽 경계는 동가가강(?家嘉江, [嘉慶重修一統志]에서는 ‘?家江’이라 하였습니다)이다. 산기슭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모인다.
기록에 나오는 동가(가)강을 현 동가강(?佳江)과 같다고 본다면(늑초의 이하 지명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를 동가강(?佳江)으로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그중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학계에서는 현 혼강(渾江)에 비정하는 바, 추후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해야 할 사항입니다), 회인현(懷仁縣) 즉 현 환인현(桓仁縣)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하는 강으로 길이는 약 80여km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현 압록강 또는 그 지류들과는 일단 발원지가 전혀 다릅니다. 그 남쪽 산줄기 하나가 압록강과 동가강을 동서경계로 나눈다는 설명도 대단히 이상합니다. ‘산기슭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모인다’는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현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 요령성 환인현 지역으로 산을 옮겨와야 할 사항입니다. 아니면 강을 백두산쪽으로 옮겨가고 원문을 대폭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 백두산 남쪽에서 발원하는 강으로 압록강 수원 이외에 이처럼 특별히 언급할만한 또 다른 강을 실제 지형상에서 찾아보기는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위 인용문은 상당히 모순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사료로서의 신빙성을 의심할 지경까지 됩니다만, 그런데 이러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사료의 이 부분만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장백산 등정기록과는 관련이 없는 여타의 사료나 항목들에서도 이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아래 인용문들을 보면,
①?家江. 在(吉林)城南八百二里, 亦名通吉雅江. 南流會鴨綠江, ?古鹽難水也. 漢書地理志, 馬?水西北入鹽難水. 唐書?麗傳, 鴨?水西與言難水合. 通志, ?家江, 源出長白山南分水嶺, 有三泉, 自谷中出會?一, 西南流受哈爾敏等諸河. 鴨?江自東來會南入于海. 明統志有大蟲江, 在都司城東南四百里, 源出龍鳳山, 南流入鴨綠江, 今鳳凰城界?. 不聞有大蟲江, 疑??家江也.[大?一統志卷四十五 吉林] ②?家江. (吉林)城南八百二里, 亦名同嘉江. 南流會鴨?江, ?古鹽難水也. 漢書地理志馬?水西流入鹽難水. 唐書高麗傳, 鴨?水西與鹽難水合. 按江源出長白山南分水嶺, 嶺有三泉, 自谷中出會?一, 西南流受合勒們等諸河. 鴨?江自東?會, 南入于海. 明一統志有大蟲江, 在都司城東南四百里, 源出龍鳳山, 南流入鴨?江, 今鳳凰城界?. 不聞有大蟲江, 疑??家江也.[盛京通志卷二十七 山川三 吉林各屬] ③鴨?江?古馬?水也. 源出長白山南麓, 兩源分導合流, 而南有小白山水, 自東來注之.[水道提綱?二 盛京諸水] ④?家江亦名通吉雅江, ?古鹽難水. 源出衣爾雅哈範山之南, 西南流有哈爾敏河來會. 又西南有甲爾圖庫河來會. 又西南有王?河, 自王?邊門外來會. 又西南有拉哈河源, 出興京南柳邊外山, 東南流來會, 又東南會大沽小沽二水, 又東南會唐石河, 入鴨?江.[皇朝通志卷二十八 地理?五 水道一]
위 인용문들을 보면 몇 가지 모순점을 바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동가강(?佳江)을 전제로 한다면, 이 강은 현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강이지, 압록강이 동가강으로 흘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동가강은 압록강의 지류 중 하나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위 사료들 몇몇은 동가강을 고대의 염난수(鹽難水)에 비정하고(南流會鴨?江, ?古鹽難水也), 마자수(馬?水)를 현 압록강에 비정하고 있으므로, [漢書地理志]상의 ‘馬?水西北入鹽難水’의 기록과는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다시말해 압록강이 동가강에 흘러든다는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므로, 결국 [漢書地理志]상의 설명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漢書地理志]의 설명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漢書地理志]의 오류가 아니라, 고대의 마자수와 염난수를 각각 엉뚱한 강에 비정한 결과 초래되는 ‘잘못된 인식’에 의한 오류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①에서는 또한, ‘?家江, 源出長白山南分水嶺, 有三泉, 自谷中出會?一’이라고 하여 동가강 수원이 장백산 남쪽 분수령에서 나오는데, 세 줄기가 있어 계곡 중에서 나와 합해져 하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오는 압록강과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동가강은‘장백산 남쪽 분수령’에서 나오는 강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장백산 남쪽 분수령(長白山南分水嶺)’은 특정한 지점을 말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산 여기저기의 분수령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동가강은 앞서 언급한 사항들에 근거한다면 현 백두산에서 나오는 강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용문②를 보면, ‘(?家江)按江源出長白山南分水嶺, 嶺有三泉, 自谷中出會?一’라고 하여 역시 마찬가지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동가강의 역대 명칭들을 살펴보면, 이는 현재의 혼강(渾江)에 해당하며, 이전에 조선에서는 파저강으로도 불렸습니다. 이 파저강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기록에 따라‘波猪江/婆猪江/婆?江/馬猪江/=>?家江/=>渾河/混河’등으로도 등장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의 한 기록을 보면,
그윽이 살피옵건대, 본국의 서북 지방은 인근(隣近)에 있는 파저강(婆猪江) 이북의 백산(白山) 등지에 흩어져 사는 야인과 같은 종류가 비록 어쩌다가 본국의 변경에까지 들어오더라도 감히 서로 사사로이 통하지 아니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 제3집 세종14년 12월21일 병오]
위 인용문을 보면, 현 혼강(渾江) 북쪽에 백산(白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실록에 나오는 백산(白山)은 제가 알기에도 이를 포함하여 3곳 정도가 있습니다만, 파저강 북쪽의 백산은 현 백두산의 한 봉우리나 함경북도의 관모봉 언저리일 수는 없습니다. 위 인용문③에서는 압록강이, ‘源出長白山南麓, 兩源分導合流’라고 하여 위 늑초(勒楚)의 기록 중 나오는 ‘남쪽 기슭은 꾸불꾸불 뻗어서 나누어져 두 줄기로 되는데, 줄기 하나는 서남쪽으로 향하여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요, 서쪽 경계는 동가(가)강이다. 산기슭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모인다.’는 설명과 전체적인 문맥에서 일치합니다. 관건은 이 ‘동가강/파저강’이 발원한다는 이른바 늑초 기록의‘구지(舊志)에 다 이를 일러 분수령’이라는 하는 곳 즉,‘長白山南分水嶺’을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이 분수령을 찾는 일을 미루고 이 글의 중요한 결론에 해당하는 당시의 지리인식 문제로 들어가 봅니다.
1684년 당시의 지리정보 : 이 동가강을 장백산 남쪽 분수령 발원으로 설명하는 최초의 사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盛京通志 初刊本]으로, 앞서 설명한대로 이 초간본이 발행된 해는 강희제 23년인 1684년입니다. 이 성경통지 초간본이 나온 1684년이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잠깐 언급하였습니다만, 그 의미는 잠시 후에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관련 문장부터 보도록 합니다.
康熙二十三年奉?遣駐防協領勒出等, 復周圍相山形勢廣?綿亘?如明一統志所云. 其?不生他樹草多白花, 南麓??磅?分?兩幹, 其一西南指者, 東界鴨?江, 西界[通]加江. 麓盡處兩江會焉. 其一?山之西而北?數百里, 以其?衆水所分, 舊志總謂之爲分水嶺. 今則西至興京邊茂樹深林幕天?日者, [土]人呼?納綠窩集. 從此西入興京門, 遂?開運山. 自納綠窩集而北, 一岡?四十餘里者, 土人呼?[過爾]民朱敦. 復西指入, 英額邊門, 遂?天柱隆業二山, 廻□盤曲虎踞龍蟠. 其間因地立名?山?嶺者不一要, 皆此山之支裔也. 山之靈異自昔稱名, 而神聖發祥於(此). 今?盛萬?鴻基與山無極矣.[盛京通志 初刊本]
윗글은 [盛京通志 初刊本]에서, 강희제 23년에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초(勒楚) 일행이 장백산을 올라 그 산세를 묘사한 부분입니다. 앞서 번역해 놓은 [大?一統志卷四十五 吉林 山川 長白山]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늑초 일행이 장백산을 오른 해와 이 초간본이 나온 해는 같습니다. 그만큼 생생한 기록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통지는 총 5개의 판본이 있는데, 발행된 연도순으로 보면,
①康熙二十三年(1684년). 봉천부윤(奉天府尹) 동병충(董秉忠) 等修。총32권. ?1권. ②雍正十二年(1734년). 봉천부윤(奉天府尹) 여요증(?耀曾), 부승(府丞) 왕하수(王河修), 교수(?授) 위추(魏?) 纂. 총 33권. ?1권, 11幅. ③乾隆元年(1736년). 咸?二年(1852년) ?修. 총 48권. ?1권. 봉천부윤(奉天府尹) 송균(宋筠), 부승(府丞) 왕하수(王河修), 교수(?授) 위추(魏?) 纂. ④乾隆十三年(1748년). 형부상서(刑部??) 왕유돈(汪由敦) 等修纂. 총32권. ?1권. ⑤乾隆四十九年(1784년). 대학사(大?士) 아계(阿桂), 우민중(于敏中), 양국치(梁?治) 等修. 예부급사(禮部?事) 중유근(中??) 等纂. 총130권. ?1권.
위에서 보듯이 1684년에 초간본이 나온 이래로 총 5차에 걸쳐 속수(?修)라고 하여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어 100년 만인 1784년에 완간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연히 초간본과 최종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성경통지 초간본이 나온 1684년으로 돌아가 보면, 이 시점은 무묵눌의 백두산 정계가 있었던 1712년보다는 28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뜻하는 의미는 실로 작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청의 강희제가 변계, 특히 자국 발상지로 알려진 요령, 길림일대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한두 해에 머문 것이 아니며,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난 것만 보아도 무묵눌의 발상지 탐사(1677년)로부터 시작하여 목극등의 정계(1712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35년에 이르는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강희제 관련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준비는 하고 있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목극등의 1712년 정계 이전까지는 단순한 지리 탐사이든 아니면 정계라는 국가간의 중대한 문제이든 간에 청나라에서 파견한 관리가 조선경내로 들어와 국경지역을 조사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목극등의 경우를 예로 들면, 강희제의 밀명을 받아 정계 1년 전인 1711년 2월의 이른바 위원(渭原) 사건을 빌미로 하여 압록강 남쪽 조선 변경을 따라 백두산에 이르러 정계를 행하고자 하였지만, 청의 공식적인 자문이나 칙령이 없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부한 조선조정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청 강희제는 왜 조선조정에 공식적인 자문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냥 서류만 작성하여 관부의 도장 찍고 보내면 조선조정에서는 결국엔 꼼짝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강희제는 이때 정계문제 만큼은 공식적인 자문없이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던 정황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목극등이 정계비 세우고 난리친 것들은 전부 공식적인 청조정의 입장이 될 수 없고, 목극등 개인의 에피소드로 몰고 가더라도 아무 할말이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정계비 세운 목극등은 아무런 공식 문서도 휴대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정계비 문제도 목극등의 임의적인 발상이었을 뿐, 조선`청 양국간의 공식적인 정계비라 하는 것도 대단히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정계비에 드러난 조선대표는 접반사 박권 등이 빠진, 공식적인 대표자격이 없는 수행 군관들과 역관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정계비도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기록을 보면 바로 드러나지요.)
‘위원사건’이란 1711년(숙종 37년) 2월, 평안도 오노량(吾老梁) 근처 강 건너편에 움막을 짓고 조선 변민들과 잠무역을 벌이던 청인 5명이 조선 위원 주민 9명에게 살해된 사건을 말합니다. 이때 청에서는 목극등(穆克登)을 위시한 관리 5명을 파견하고 또 조선에서 형관 1명을 파견하여 봉성에서 회동 조사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실제 청에서는 월경 사건 처리보다는 백두산 사계(査界)를 더 중요시 하였으며 그러한 행동의 배경에는 청 강희제의 밀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은 후 목극등 일행은 집요한 요구 끝에, 조선 경내인 만포에 입성하여 당시 폐사군 지역으로 가고자 하였지만,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오르다 적동(狄洞) 부근에서 물살에 배가 흔들려 목극등이 앞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이 사계는 중지됩니다.
그런데 강희제가 공식적인 자문의 형식이나 칙서를 통하지 않고 밀유(密諭)의 형식으로 사계를 행하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조선의 반발을 무마하고, 청 입장에 따른 청 주도의 정계를 행하려는 의도 등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금 각도를 달리하는 제 생각을 덧붙인다면, 굳이 공식적인 정계를 행하지 않더라도 강희제의 인식으로서는 ‘비공식적으로 슬쩍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이미 국경선 라인은 의도대로 손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굳이 공식화시켜서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늑출 등의 작업을 통해서도 알 수 없었던) 지리정보에 있어서 불충분하고 모르는 점이 있어 그 점만 분명히 하면 되는 것이므로 공식적인 사계를 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는 강희제가 목극등에게 밀유를 내리면서 직접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 강희제는 현 백두산 발원의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이루는 사실 자체는 명백하다고 보고 있으며, 다만 구체적인 지리정보에 있어서 명확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此處俱已明白 但鴨綠江土門江二江之間地方 知之不明 前遣部員二人往鳳凰城 會審李玩枝事 又派出打牲烏喇總管穆克登同往 伊等請訓旨時 朕曾密諭云 爾等此去幷可査看地方 同朝鮮官沿江而上 如中國所屬地方可行 卽同朝鮮官在中國所屬地方行 或中國所屬地方有沮隔不通處 爾等俱在朝鮮所屬地方行 乘此便至極盡處詳加閱視 務將邊界査明來奏.[淸聖祖實錄 권245, 강희 50년 5월 계사] ...이러한 곳은 모두 명백하지만, 단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지방은 명확하지가 못하다. 앞서 예부 관원 2명으로 하여금 봉황성에 가서 조선인 이완지(李玩枝) 사건(위원사건)을 조사하게 하고 또 타생오라총관(打牲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였다. 이들이 황지를 청할 때 짐이 다음과 같이 밀유(密諭)하였다. 너희들은 가서 아울러 지방을 조사하며 조선 관원과 함께 강을 따라 올라가되 만약 중국 지방으로 갈 수 있으면 조선 관원과 함께 중국 지방으로 가고, 중국 지방이 막혀 통하지 못할 경우 조선 지방으로 가되 이번 기회에 가장 안쪽까지 가서 상세히 보고 반드시 변계(邊界)를 확실히 조사하여 주문하라...”
강희제가 밀유를 내린 해가 1711년인데, 이것은 1711년, 사계(査界)를 밀유형식으로 명할 때까지도 청에서는 백두산과 그 일대의 조선 경내, 특히나 정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정보가 없었거나 상당히 어두웠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위 강희제의 ‘단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지방은 명확하지가 못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목극등이 정계를 행한 1712년 5월까지는 청과의 경계를 이루는 두 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의 남쪽기슭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답사를 통한’어떤 정보도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강희제가 이러한 지리정보에 상당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었긴 하지만, 일각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조선과의 변계문제를 확실히 매듭 지을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당시 조선조정과 협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진행할 변계문제라는 것이 강희제에게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청 경계는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지만, 다만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 강 원류 지역만이 불확실할 뿐이므로 이를 답사하여 정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듯이 그렇게 명확하게 선 긋듯이 정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강희제는 아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것은 공식적인 양국간의 정계문제로 당연히 격상되었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희제는 다만 밀유를 통해 필요하다면 조선측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그 지역, 즉 백두산 발원의 두 강 지역을 상세히 보고 (그림도 그려서) 오라는 정도였습니다. 목극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세우라는 지시는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정계비는 제가 이해하건데 목극등 단독의 발상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떤 형태로든 공식적인 정계의 형식을 조금이라도 지녔더라면 목극등이 조선측 접반사 박권 등을 굳이 백두산에 못오르게 만류하였을 리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연로하여 산을 못오를 수도 있는 박권을 강권하여서라도 동반하여 백두산에 오르게 하였을 것이며, 조선측의 대표가 접반사라는 명칭이 아니라 감계사가 되었어야 하며, 정계비의 형식이 그처럼 조잡할 리도 없으며, 거기에 새겨진 조선측 대표란 것이 그처럼 하급관리와 역관의 이름으로 채워졌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1711년의 지리정보에 대한 청측의 인식이 이러하므로, 늑초의 기록에 등장하는 1684년의 장백산을 현 백두산으로 보고, 백두산 남쪽 분수령에서 발원하는 압록강이 분수령에서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친다든가, 역시 남쪽 분수령 발원의 동가강이 어떻게 흐른다든가, 산세가 남으로 치달아 문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 현 백두산을 두고 언급한 것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무묵눌의 장백산 탐사기록에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장백산에 대한 정보를 현 백두산으로 이치시킨다면, 목극등의 무리를 무릅쓴 정계도 필요 없었을 것이며, 강희제의 밀유 또한 어떤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정보를 백두산의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1712년의 목극등의 백두산 정계 이후에나 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84년 발행된 [盛京通志 初刊本]에서는, 앞서 인용한 것처럼 ‘其?不生他樹草多白花, 南麓??磅?分?兩幹, 其一西南指者, 東界鴨?江, 西界[通]加江. 麓盡處兩江會焉. 其一?山之西而北?數百里, 以其?衆水所分, 舊志總謂之爲分水嶺.’라고 하여, ‘장백산 남쪽 기슭은 꾸불꾸불 뻗어서 나누어져 두 줄기로 되는데, 산줄기 하나는 서남쪽으로 향하여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요, 서쪽 경계는 동가강([通]加江)이다. 산기슭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강이 모인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을 둘러 서쪽과 북쪽으로 향하여 수백 리에 이르는데, 여러 강들이 나누어지게 된다. 구지(舊志)에 다 이를 일러 분수령이라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자세한 지리정보에 해당합니다. 만약 이 시기 늑초 일행이 현 백두산을 오른 것이 분명하다면, 그들이 백두산의 어느 쪽을 통해 올랐건 간에 백두산 남쪽지역을 답사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다시말해 그들이 월경하여 당시 백두산의 남쪽 조선경내를 들어왔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만약 사실이 이와 같았다면, 당시 조선조정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극등의 정계 이전까지는 어떤 청의 관원도 백두산 남쪽의 조선 경내를 들어왔다는 기록이 조·청 양쪽에 없습니다. 목극등만 하더라도 1711년에 강희제의 밀명을 받으면서까지 조선 경내를 들어오려고 하였지만, 백두산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이 자세한 정황은 실록 등 우리측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강조하지만, 1684년 당시의 지리정보로 되돌아가본다면, 현 백두산 남쪽 기슭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결코 나올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다시말해 당시 조·청 양국의 사정이나 변계문제에 관한 이후의 진행과정을 통해서 보더라도 일행 중 통솔자의 지위가 주방협령에 불과한 늑초와 그 일행이 청조정의 명령이나 조선조정에 대한 어떤 공식 통보도 없이 현 백두산을 답사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1684년의 늑초의 기록에서 말하는 장백산은 결코 현 백두산을 말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압록강이 나온다고 하여, 동가강이 언급된다고 하여 그 발원지를 백두산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강희제는 목극등에게 정계를 명하면서도, 그가 그토록 중시한 그들 조종의 발상지라 언급한 대목은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극등은 실록 등 기록에도 나오듯이 정계 중에 ‘장백산(백두산)은 조선의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조정의 관원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발상지인 장백산을 들어갈 때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예(瞻視行禮)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목극등에게는 현 백두산을 그들의 발상지로 여기는 인식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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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하루 원문보기 글쓴이: 자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