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과 120년 연대기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사과는
일본인 이주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산업 경영으로 이어졌고
빠르게 성장하여 금세 대구를 성장하는 과일이 되었습니다.
그 명성은 멀리 중국과 러시아까지 전해 젔고
일본에서는 아오모리산 사과를 압도하고
시장을 석권하며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광복 후에도 사과는 수출 효자상품으로서
홍콩,타이완,캐나다로 실려 갔습니다.
또 축제로,예술로, 지역 화합의 상징으로
꽃을 피우며 지역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기후 변화로 사과 재배지역은 북상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명맥은 대구 곳곳에서
또 경북 여러지역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과와 함께한 지역사의 120년을 돌아 봅니다.
대구에 서양 사과나무를 처음 심은 이는 누구인가?
우리 지역에서 거장 성공한 문화 상품을 꼽는다면 단연 단연 대구 근대골목 투어가 아닐까?
청라언덕이며 3.1만세 운동길은 인싸들의 성지가 된 지 오래이다. 이 곳에 또 하나 그냥 스쳐지나가시엔 섭섭한 존제가 있으니
한 때 전국을 주름 잡았던 대구의 상징, 사과(능금)의 조상,대구 최초의 사과나무
이다. 그 최초를 인정 받고 후손목이 심어지기까지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이 길다.
과연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는 어디서 왔으며 그걸 심은 이는 누구일까?
시작부터 잘못된 대구사과 재배의 원조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 재배에 대해 맨 먼저 기록울 남긴 이는 양잠및제사 기술자로 대구에 와 있던 일본인 미와 조테쓰 였다.
전문분야 외에도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지 그는 <조선대구일반>,<최근대구요람>등 대구에 대한 개론서를 여러권 저술 했는데, 1910년에 쓴 <조선대구일반>에서 대구사과 재배의 원조를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라 하였다.
그리고 30년 뒤인 1943년에 나온 <大邱府史>에서는 1892년 선교사 플래처가 스미스사아더,레드베아민 및 미조리의 3종을 수입하여 저택 안에서 재배한 것이 시초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가이긴 했지만 대구부에서 펴낸 역사서이다 보니 이 이야기는 그대로 옮겨졌다.
제일 먼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이는 <大邱說話>의 저자인 언론인 박영규였다.
그는 1992년에 나온 <中岳志>2호에서 이를 반박하였다.
우선 1892년 대구에는 김보록 로베르 신부를 제외하고는 외국인 선교사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 그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는데 1972년 본인이 직접 들었다는 의료선교사 존슨의 조수로 활약했던 서자명의 아들 서주복의 증언이었다.
"내가 8~9세 되던 해에 張의사(존슨) 집에 가서 집안에 심어 놓은 능금나무에서 수확한 능금을 한 양동이 얻어온 일을 지금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다. 내 기억으로 그때 능금나무는 상당히 큰 성목이었다."
서주복이 1900년생이니 그가 존슨의 집에 가서 사과를 얻은 해를1909년으로 잡아도 그때는 플레처가 대구에 오기 전이다.
박영규는 이와같은 여러가지 ㅇ역사적 사실을 따져 1899년 동산을 매입해 동산병원을 낙성한 존슨이 이듬해 봄에 사택의 뒷뜰에 눙금나무를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디만 후에고 <대구시사>에 실린 내용은 그대로 전파되어 1997년에 나온 <대구능금 百年史>와<경북능굼 百年史>와<경북눙금농협80년사>에도 대구사과의 기원은 선교사 플래처에서 비롯 되었다고 하였다.
대구 사과의 명맥을 잇는 평광동
대구 공항에서 팔공산 쪽으로 가다가 불로시장 입구 다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10여분 달리면 만나는 마을 평광동.
예전엔 물소리도 청량한 협곡이 계속 이어져 대구에도 아직 이런데가 있었어?하는 생각이 절로 둘기 마련이었다. 길이 조금 넓어지긴 했지만 지금도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변함 없이 무릉도원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평광은 달성군 공산면에 속한 마을이었는데 1957년 대구시에 편립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평리와 광동이 합처져 평광동이 되었는데 넓은 들판에 있는 평평한 마을이란 뜻이다. 시랑리,중시랑리,샛터,평리,섬뜸,아랫뜸,큰마을,당남리까지 8개의 자연부락이 있다.추계추씨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입향한 단양 우씨 집안이 번성하여 주민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팔공산 기슭 깊은 계곡에 산으로 둘러 싸여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사과 농사를 짓는다. 해발 280미터의 준산간지역이라 일교차가 크고 대구의 여러곳에 비해 사과꽃 개화기가 7~10일 늦다.그기다 모래가 섞인 사질 토양이라 사과 재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을날 구불구불한 마을 길을 따라가 보면 굵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사과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용틀림하듯 가지를 내려 뻗고
있는 늙은 사과 나무와 빨간 사과의 조화는 어떤 각도로 찍어도 작품이다. 이곳 평광에 오면 실감 나는 말한마디
" 대구 사과 살아 있네 "
국내 최고령 홍옥 사과나무 보호수로 지정 되어 있다.
DGB대구은행의 지역사랑지에서 발췌
첫댓글 이미지 한 장 달랑!
화두인가?
좀 있다 다시 와야지^^
이미지 한장 올려 놓고 내용 발췌하여 올리려는 순간 들어오셨네.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어머머
대구사과 살아 있었네!
그 땐 주로 홍옥이었지요. 그 맛을 지금은 사라졌답니다.
개량종이 많이 나오고 홍옥이 귀해졌답니다.
또한 옛날의 사과 나무를 모두 제거하고 키가 작은 사과나무로 대치(代置)하고 있더라구요.
보호수 사과나무를 보니 너무너무 반갑네요.
대구사과 덕분에 '미쓰코리아'선발대회에서 대구에서 미인이 속출되었었는데.....^^
===7회 고 정희수 선배님의 사과밭에 갔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사과하면 경산이 떠 올랐는데 대구사과 유래 자료를 보고 새로워젔습니다.
한메 선생은 이런자료를 어떻게 확인 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