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거나 봉사나 헌신을 많이 해서 얻는 것도 아니며 타인의 도움으로 얻는 줄 알고 자기 부인의 치맛자락만 붙들고 있으면 천국 가는 줄로 착각한다.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사람의 인식차원으로 여기며 입으로만 시인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다.
아무리 주여! 주여를 외치며 아멘 할렐루야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십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을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착각은 무한지대로 커트라인도 없으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에는 하나님마저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인간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반영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성경 여러 군데에서 시사하고 있다. 안 믿어지는 것을 믿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는 상황 속에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하나님의 은총이며 섭리인 것이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면 di,kaioj(디카이오스, 의로운) di,kaiosu,nh(디카이오쉬네에, 의) di,kaio,w(디카이오오, 의롭게 하다) di,kai,wj(디카이오오스, 의롭게) di,kai,wsij(디카이오오시스, 의롭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이 단어들이 확대되어 di,kai,wma(디카이오오마, 규례) di,kasth,j (디카스테에스, 재판장) di,kh(디케에, 판결)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이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하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심충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면상 전부 다 거론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간단한 핵심만을 제시한다면 이 단어들의 동의어인 dei,knu,w, dei,knumi(데이크뉘오오, 데이크뉘미, 보여주다) deigm a(데이그마, 거울) deigmati,zw(데이그마티조오, 드러내다) 단어들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은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뜻과 목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사람의 욕망과 탐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례로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그 어느 누구라도 그 법에 따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살다가는 몇 초도 못 견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한다면 해괴망측한 요괴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힘으로 풀어 나갈 수 없다.
가끔 만화영화를 접하게 되면 아주 멋지게 생긴 왕자가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되거나 흉물스러운 괴수로 변하여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어 괴로워하는 과정을 거쳐 마지막 부분에 가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는 내용의 장면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존재가 죄로 인해 우리 육체나 정신보다는 영혼이 아주 찌그러져 보기 흉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우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우리의 원래 모습대로 되돌리고자 속죄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위해 거룩한 죽음으로 삼일 동안 장사지내었다가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되돌려 놓으셨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되돌아와 의로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행함의 믿음과 구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 구원을 갖는 것이 행함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구원이란 단어도 헬라어로 swthri,a(소오테에리아, 구원)라는 단어는 swth,r(소오테에르, 구주), sw,zw(소오조오, 구원하다), swma (소오마, 몸)의 동의어로 구주의 몸과 내 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인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일원, 이원, 삼원 하는 정도의 돈이 가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와 연합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와 목적대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된 것이다. 그것을 항상 자각하고 의식하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영생복락이며, 교회며 성령 충만인 것이다. 이게 영원한 기쁨이고 감사와 찬양이며 하나님께 향한 예배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나 장황하게 설명하고 복잡하게 믿도록 연구도 아닌 연구를 하여 어렵게 믿도록 유도하고 있다. 오히려 신학인지 교리인지 신앙인들을 더욱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 문제로 더 이상 탁상공론하지 말고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복음을 접했으면 한다. 하나님의 일도 아주 다양하게 생각하며 아주 힘들게 임하려고 하는 이들 때문에 교회가 복잡해져 있다. 요한복음 6:29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첨가해서 얼마나 복잡하게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요한복음 5:17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을 지금까지 인류에게 옷 입히시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다시 돌아온 아들에 대한 비유에도 둘째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는 사건이 비유로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둘째 아들이 바로 나로 여긴다면 옷 입혀 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감당하려는가?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존재하신다면 무엇을 내가 행할 것이 있는가? 아직 내가 살아있다면 마음대로 행동해봐라. 그러나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면 무엇을 행할 건더기나 남아 있는가? 내게 나타나는 행동이 아직도 미숙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행동이라면 속히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말이나 글로 그렇게 표현하지만 새사람보다 옛 사람이 더 나타나는 것 같다. 주님보다는 내가 더 드러나고 정과 욕심에 가득 차 있어 숨길 수가 없을 정도로 모순된 것만 보인다. 어쩌면 야수와 같이 마술에 걸린 슈렉처럼 보이지만 원래 본질적인 존재의 속성을 찾아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마법에서 벗어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다.
즉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믿고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구원이며 행함으로 얻는 구원인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