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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 24,2-7.15-17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식별>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마태 21,25ㄱ)
발상(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말도 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생각이 생겨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이 있다면 생겨나온 것입니다.
발생(發生)이나 발출(發出)과 같은 뜻입니다.
관건은 자가 발생이냐 아니냐입니다.
자체 발광처럼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고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요한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속적인 사람인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우리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
일상적으로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데 이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심지어 지금 나의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건지 내게서 온 건지 묻는 사람이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그것들이 영적인지 세속적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겠지요.
앞에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사랑도 어디서 온 사랑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시하고 제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하려는 사랑은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지요.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굴리에모 아빠스는 성령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의 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최고선이시고 궁극선이신 당신이 지니신 사랑은 선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물 위에서, 즉 인간 자녀들의 출렁이는 마음 위에서 휘돌고 계시면서,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며, 그들에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시며,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시고 유익한 것을 대주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하느님을 우리와 일치시키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사랑할 때도, 늘 영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지,
공동선을 지향하고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지 식별하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집회 42,20)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현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 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 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
(@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 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 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 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 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은 하느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1)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말은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왜 당신 마음대로 이런 일을 하는가?”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좁은 뜻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전체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말하는 ‘권한’은 유대교에서 주는 권한을, 즉 제도권 안에서의 권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권한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제도권 밖에 있는 예수라는 ‘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언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 대부분 제도권의 ‘밖에’ 있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시면서 ‘반문’하신 것은,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에게는 권한을 어디에서 받았느냐고 묻지 않았으면서, 왜 나에게는 그것을 묻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이미 나에 대해서 증언했다. 너희가 요한의 증언을 믿는다면 내가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음을 믿을 것이고, 나를 믿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권 안에 있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앞의 3장을 보면,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세례를 받으려고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3,7).
그러나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인정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3)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라는 말은 사제들과 원로들이 요한을 보내신 하느님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재물만 섬기고 하느님은 섬기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4)
여기서 “모르겠소.” 라는 사제들과 원로들의 말은 정말로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 “관심 없다. 말하기 싫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정말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에 대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갖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같은 일을 하심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험하게 하신 것만 신경 썼습니다.
5)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면, 너희는 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에서 아예 배제하신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사제들, 원로들 같은 위선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도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잃은 양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와 구원을 ‘저절로(자동적으로)’ 얻는 일은 없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권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 분별의 지혜>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교황님 홈페이지 뉴스에 감동했습니다.
영원한 청춘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47차 해외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태리 사이에 있는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의 섬인 인국 35만의 “코르시카”섬입니다.
교황님의 생년월일은 1936년 12월 17일이니 내일이면 만88세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12월17일은 교황님의 생신입니다.
고령의 연세에 여전히 지혜의 절정을 누리시는 교황님을 통해 새삼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교황님의 존재 자체가 노령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붇돋아 줍니다.
코르시카에서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라, 언제나 용서하라.”
(Forgive everything, forgive always)
코르시카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하신 강론의 요지입니다.
역시 현자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교황님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삶을 돌아보면 기뻐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굶지는 않으니 애써 다시 근심하지 마라.”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는 아울러 그가 먹을 양식도 함께 주신다.
그런데 어찌 근심 때문에 방황하며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입니다.
제가 볼 때 지혜와 무지의 대결 같습니다.
정말 눈밝은 현자라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데, 편견의 무지에 눈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신학적 지식이 반드시 지혜와 함께 가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직후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소?”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무엇으로 답변해도 무지한 이들은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이에 대해 질문으로 역공하는 예수님의 지혜와 용기가 빛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들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근거를 묻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물음입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믿지 않느냐는 물음에 직면할 것이고, 인간에게서 왔다 하면 하늘에서 왔음을 믿는 군중이 두려워 도저히 답변할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의 답변에 더 이상의 질문을 봉쇄해 버립니다.
“모르겠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정말 볼 줄 하는 지혜를 지닌 자라면 교황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오듯,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권한도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심을 이기는 위정자들은 없습니다.
민심이 바다라면 위정자들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 같습니다.
엊그제 국회의 탄핵 결정에 200백만 시민이 감격의 환호로 응답한 사실은 이 결정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 말고도 가짜뉴스와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분별의 지혜가, 지혜로운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지혜의 눈이 열리는 개안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실입니다.
바로 개안의 모범이 예수님은 물론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입니다.
두 환시가 그대로 대림과 성탄에 있을 이상향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무지의 눈이, 무지의 귀가 활짝 열린 참 멋진 발라암은 두 환시가 대림을 지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아름답기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현실을, 주님과 함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꽃자리 환경을 묘사하는 듯 합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발라암이 전하는 선물같은 비전이자 환시입니다.
발라암의 두 환시는 그대로 인간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두 번째 멋진 환시도 그대로 메시아 탄생을 예시하는 환시입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야곱에게서 솟는 별 하나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왕홀이 상징하는 바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무지의 눈을 열어주시어 하느님의 지혜인 주님과 하나되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시편 25,5ㄱ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개혁과 혁신’>
교회는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2025년 사목 지침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뜨겁게 하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습니다.
2025년의 ‘화두’는 ‘지킴과 바꿈’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본은 200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선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관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유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개혁과 혁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에게 권위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과 율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틀’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 같은 인생을,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이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과 시대적 책임,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 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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