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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포지션은 공격수다. 왜냐하면 언제나 팀의 공격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멋진 슈팅으로 상대팀의 골문을 가르면서 팬들의 환호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고생을 많이 하는 포지션이 어디일까? 바로 골키퍼다. 요즘은 덜하지만,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골먹히면 가장 먼저 비난받았던 순서는 골키퍼고, 그 다음이 수비수였다. 그만큼 '잘해도 본전치기' 였으며, 그렇기에 가장 외로운 싸움을 견뎌야만 했다. 게다가 골키퍼는 단순히 슈팅을 막는 것을 넘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비수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수비라인까지 조정해야하는 임무 또한 중요하다. 그렇기에 90분 내내 사자후를 장착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겠거니와, 필요할 때는 막말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그만큼 수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었던 레프 야신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골키퍼들도 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지안루이지 부폰이나 이케르 카시야스, 페트르 체흐, 마누엘 노이어 등도 그 전례를 이어가고 있다.
1990년대, 그 당시 골키퍼가 주목받지 못했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남다른 외모로 축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골문을 사수하던 염색한 꽁지머리 골키퍼가 있었다. 정말 주목받기 힘든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감안한다면, 그는 K리그 내내 이슈거리었다. 단순히 선방쇼만 펼치는 것을 넘어 때때로 직접 드리블하여 40m 드리블로 전진하는 대담성을 보이거나, 위기상황일 때 세트피스 상황까지 올라와서 직접 헤딩슛으로 골을 만들어내질 않나,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독특했다. 기존 팬들이 접할 때에는 분명 '이단아' 성향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그렇게 1990년대에 프로축구계에 발을 들인 그 20대 골키퍼는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골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길 갈망하면서 K리그 역사의 산증인이 되길 원하고 있다. 그가 한 경기 한 경기 뛸 때마다 역대 최다 리그 출장기록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전설이다'를 외치는 골키퍼, 김병지가 세번째 주인공이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3. '나는 전설이다' 김병지
(사진출처 KFA)
1. 가난함을 딛고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다
김병지는 1970년 경상남도 밀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밀양중을 거쳐 1986년 마산공고로 진학할 때, 등록금 납입 기간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었다. 중학교부터 축구선수로써 꿈을 키우고 있던 김병지에게 축구회비를 집에서 지원해준다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김병지는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국비 지원을 조건으로 그는 부산 소년의 집(지금은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고등학교로 바뀌었다)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기 학비와 축구회비를 국가에서 지원을 받으면서 김병지는 축구부로 계속 활동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당시 '소년의 집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세간에는 그리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았기에, 그어느 대학교에서도 김병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진학이 사실상 어려워진 그는 축구부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취득한 용접공 자격증을 가지고 선반 용접공이 되면서 축구선수 생활을 올스톱해야만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김병지가 하마터면 영원히 선반 용접공으로 지낼 뻔 했다. 그는 실제로 창원 기계공단의 금상산전에서 1년 6개월동안 용접공 생활로 산업의 역군이 되었고, 1989년 상무 입단 테스트를 받고 합격함으로써 용접공 생활을 청산했다. 김병지는 계속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의 첫 축구선수 생활을 상무에서 시작하게 된 셈이다. 상무 소속으로 실업리그를 뛸 당시, 김병지는 그렇게 주목받진 못했다. 특출나게 띄는 포지션이 아니었던 골키퍼였으니까. 그러다 1991년, 추계실업축구연맹전 국민은행과 결승전에서 김병지는 국민은행의 공격을 모두 다 막아낼 뿐더러, 승부차기 접전 끝에 PK까지 하나 막아내면서 상무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는 그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2. '김병지' 세 글자를 키워낸 울산, 그리고 그 영광스런 순간(1992~2000)
상무에서 보여준 활약 덕분에 김병지는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월급 80만원 연습생 신분으로 1992년에 울산으로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울산의 주전 골키퍼는 한국 국가대표 넘버원 골키퍼이기도 했던 최인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김병지가 넘어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과도 같았다. 최인영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로 출전했었고, 조별리그 3경기 전부 선발출장하였다. 그렇기에 김병지는 처음에 서브 골키퍼로 울산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전인 최인영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2년 아디다스컵 때 PK만 3개를 막아내면서 무서운 신예의 탄생을 예감케 했고, 김병지의 장점 중 하나인 민첩성과 반사신경 덕에 그는 2년 만에 기존 주전이었던 최인영을 벤치로 끌어내리고 주전 골키퍼로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25경기에 나서 19실점을 기록, 평균 0.76 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당시 동유럽 골키퍼 열풍이었던 한국 골키퍼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다 최인영이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알까기로 인한 실점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쓸쓸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에 접어들었고, 그와 맞물려 본격적인 김병지의 시대가 열렸다. 최인영이 은퇴한 이후, 다음 한국 대표팀 차세대 골키퍼 1순위로 김병지가 물망에 올랐고, 그는 1996년 아시안컵 대표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면서 국가대표 생활까지 겸비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울산의 첫 리그 챔피언 영광을 함께 했던 김병지(가운데))
그렇게 하나하나씩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던 김병지는 1996년 울산을 이끌고 리그 첫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큰 힘을 보탰고, 기량과 폼도 최상의 정점을 찍고 있던 터라 클럽에서든 국가대표팀에서든 김병지를 제치고 넘버원이라고 외칠 만한 골키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김병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주전 골키퍼까지 무난하게 승선할 수 있었다. 1998년 프랑스에서 한국대표팀의 성적은 처참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김병지는 같은 클럽팀 동료였던 유상철과 함께 유일하게 월드컵 대회 기간에 제 몫 이상을 해줬었다. 특히, 네덜란드에게 비록 5골을 실점했지만 90분 내내 수차례 파상공세를 펼치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김병지는 수많은 슈퍼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설문조사에서도 김병지가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나왔을 정도다(한동안 유럽진출한다는 루머까지 나오기도 했다).
(김병지 개인 커리어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이었던 경기로 남은 포항과의 플레이오프전)
하지만 김병지의 1998년은 프랑스 월드컵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라이벌팀인 포항과의 K리그 플레이오프전이었고, 수많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경기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1998년 10월 24일, 1차전에서 울산은 포항 원정에서 3대2로 패배하였기에 무조건 홈경기에서 승리해야하는 입장이었다. 후반 40분에 포항의 박태하에게 실점을 허용하면서 점수는 1대1, 이 상태로 갔다가는 울산이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었기에 세트피스 기회에서 김병지까지 상대 골문까지 올라왔다. 후반 45분, 휘슬 소리와 함께 김현석의 프리킥은 골문 쪽으로 날아갔고, 김병지는 헤딩골로 만들어내면서 탈락 위기에 놓여있던 울산을 극적으로 살렸다. 이 때 기록한 김병지의 골이 K리그 역사상 최초로 골키퍼가 기록한 골이었다. 1,2차전 도합 3대3이었기에 동해안더비는 연장전까지 치뤘고 승부차기 접전끝에 4대2로 울산이 포항을 누르고 결승전에 올라섰다. 김병지 개인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그렇게 김병지는 2000년까지 K리그 올스타전에서 독보적인 넘버원 골키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국가대표팀 감독인 히딩크에 의해 발탁되어 칼스버그컵 출전준비를 하게 되었다.
3. 충격적인 포항으로의 이적, 영원한 라이벌 이운재와의 조우(2001~2005)
(2001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병지는 울산에서 포항으로 이적하였다)
2001년 새해 첫 뉴스는 울산에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울산의 수문장으로 활약해오던 김병지는 새 팀으로 이적했는데, 하필이면 울산의 최대 라이벌인 포항으로 이적하면서 울산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울산과 포항간에 선수 이적이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이슈임에는 확실하다. 김병지가 8년간 뛰었던 울산을 등지고 포항으로 이적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6월에 구단과의 갈등이 적잖게 작용했다. 김병지는 그당시 해외진출을 요청하였고 특히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을 원했었으나, 구단에서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었다. 때마침 포항은 주전 골키퍼였던 조준호가 지난 시즌 부상을 당한 이후 컨디션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골키퍼 보강이 필수였던 터였고, 때마침 김병지가 울산 구단과의 불화를 겪고 있었기에 당시 최고 이적료 5억 5천만원에 연봉 1억 2천만원, 계약기간 3년으로 그를 데려오게 되었다. 김병지가 물꼬를 터주면서 울산과 포항 사이에서의 선수거래가 시작되었다(김병지 이후로는 이진호-노병준 임대 트레이드도 있었다). 그가 이적하고 나선, 울산이 유독 포항만 만나면 고전했다. 그래서 '김병지의 저주' 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포항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김병지는, 새로운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에게도 단연 1순위였다. 하지만 2001년 홍콩에서 열렸던 칼스버그컵이 자신에게 파장을 몰고 올 지는 예상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칼스버그컵 3,4위전인 파라과이전은 김병지 본인에게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전반전 추가시간에 김병지는 페널티박스 밖으로 드리블하는 무리한 행동을 보이면서 히딩크의 반감을 샀다)
파라과이와의 경기 도중, 전반전 추가시간에 김병지는 갑작스럽게 페널티박스 밖으로 드리블하여 나오는 돌출행동을 보이면서 히딩크 감독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팀 스태프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하마터면 파라과이 공격수에게 공을 빼앗겨 실점할 위기를 초래했다. 김병지의 이러한 돌출행동이 사실 이 칼스버그컵에서 처음 보였던 것만은 아니다. 1996년 수원과의 아디다스컵 대회 개막전에서도 골문을 비우고 미드필드로 전진하는 불안한 장면을 연출하다가 팀의 패배를 자초했고 이로 인해 한때 국가대표팀 명단 제외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그러한 전례가 있던 김병지는 5년 후인 칼스버그컵에서 재현했고, 히딩크는 지시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김병지를 전반전 끝나고 김용대로 교체하면서 그에게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호통쳤다. 요즘에는 이러한 김병지의 플레이를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가 가끔씩 보여주곤 하는데, 그 당시에 골키퍼가 페널티 에어리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로 여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병지가 국가대표팀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 라이벌인 이운재가 들어오게 되어 이 때부터 '김병지 vs 이운재' 의 구도가 시작되었고, 1년 뒤 2002년 월드컵에서도 그는 이운재에게 밀려 4강 신화의 조연에 머물렀다.
포항에서 베테랑 트리오(고정운-하석주-김병지)를 구축하면서 그는 포항의 최후방을 담당할 것으로 보였지만 김병지의 첫시즌은 부상과의 싸움이었다. 다행히 시즌 중반에 복귀하였으나, 그 이후 강철 군단은 FA컵에서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무르는 것 이외 이렇다할 기록이 없었다. 2003년 포항이 본격적인 최순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편작업이 이뤄지고 이와중에 핵심전력이었던 홍명보, 이싸빅, 이동국, 하석주 등이 팀을 떠났음에도 김병지는 잔류하였다. 포항은 2004년 전반기 리그 우승을 발판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리그 우승에 정조준하였고, 4강에서 철천지원수인 울산을 만나 1대0 신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다. 우승까지는 이제 단 한 경기 남은 상황에서, 상대는 수원이었고 수원의 골문을 지키는 선수는 공교롭게도 2002년 월드컵 당시 자신의 자리를 낚아챘던 이운재였다.
(라이벌 이운재와의 진검승부에서 김병지는 승부차기 실축으로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사진출처 스포츠서울)
포항은 수원과의 2차례 경기는 두 명의 국가대표급 골키퍼들의 한경기 스페셜이라 할만큼, 그들의 존재는 너무나도 컸다. 그렇기에 승부를 가르지 못하여,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야만 했다. 모든 이들은 김병지와 이운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승부차기에서 과연 누가 웃을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양 팀은 한 명씩 승부차기 실축을 한 상태였고, 수원의 5번째 키커인 우르모브가 포항의 골문을 갈라 4대3으로 수원이 앞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포항의 다섯번째 키커로 김병지가 나섰고, 11m 공간에서 두 골키퍼간 일기토가 일어날 순간이었다. 이운재는 김병지가 찬 공을 막아냈고, 김병지의 실축과 동시에 승부는 이운재의 승리로 돌아간 반면, 김병지는 정상의 문턱에서, 단 한 번의 맞대결에서 그에게 패배했다. 그렇게 수원의 3번째 우승의 들러리가 되었다.
4. 기록의 시작을 알렸던 서울생활(2006~2008)
2005년 말, 김병지는 포항과 재계약 협상테이블에 앉았지만 끝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포항에 입단할 당시, 이적료 없이 타 팀으로 이적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해 그는 이적료가 발생하지 않은 채 타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고 그 때 그를 원했던 팀은 친정팀이었던 울산과 수도권팀인 서울이었다. 특히 서울이 그를 적극적으로 원했는데, 이유는 서울이 지난 시즌 리그 6위를 기록했던 이유가 바로 후방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서울의 아이콘이었던 박주영 못지 않은 네임밸류를 지닌 선수가 필요했고, 김병지가 바로 이에 적합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병지는 김한윤과 함께 서울에 입단하여 서울의 후방을 책임지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서울생활은 비교적 조용했던 김병지, 하지만 자신의 기록을 갱신하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스포탈코리아)
임팩트가 뚜렷했던 울산과 포항시절에 비하면 김병지의 3년간 서울생활은 비교적 조용(?)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서울과 3년 계약을 맺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2005년 시즌 마감을 기점으로 그는 통산 387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출장기록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리그 컵 우승을 공헌하였고, 이적 첫 해에 K리그에서는 2번째로 리그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첫번째는 성남의 레전드인 신태용이었다), 곧바로 리그 최다 출장 기록을 갱신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해인 2007년에는 통산 최다 무교체 기록을 153경기로 갱신하면서 현재까지 이 기록 부문에 있어서 독보적이다. 하지만 2008년 6여년 만에 복귀한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칠레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허리 부상에서 회복하고 다시 피치로 복귀했을 때, 김병지의 자리는 이미 잃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겨우 복귀했던 국가대표팀에서는 라이벌인 이운재와 떠오르고 있던 김영광이 꽉 쥐고 있었고, 클럽팀인 서울에서는 김호준이 성장하면서 자리잡고 있었던 형세였다. 그러던 와중에 7월에 김병지와 귀네슈 감독 간 불화설이 뜨게 되면서 선수와 구단의 관계는 급격히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결국 김병지는 서울과의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3년 계약기간을 채우고 쿨하게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 지 대단해 궁금해했다.
5. 고향으로 돌아온 김병지, 맏형 역할과 대기록에 도전하다(2009~2012)
(자신의 고향팀인 경남으로 입단한 김병지. 사진출처 http://eirene88world.tistory.com)
그는 서울을 떠나 2009년 시즌부터 경남에서 뛰었다. 계약기간 3년으로, 플레잉코치 신분으로 합류하였다. 사람들은 김병지의 경남팀 합류에 대해 고향팀에 입단하였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밀양이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고, 구단에서도 그를 고향팀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창단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참 경남 입장에서는 김병지라는 존재가 구성원 한 명 이상의 역할이었다. 아무래도 신예나 무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다양한 개성들을 지닌 선수들을 한 데 아우르고 다독여줄 수 있는 피치 위의 리더가 필요했었고, 김병지가 그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 김병지는 경남에 입단하면서 3가지 목표를 내걸었는데, 바로 "리그 통산 500경기 출장, 경남의 6강 진출, ACL 출전권 획득" 이었다.
2009년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경남은 전북을 맞이하여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둔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쳐야만 했는데, 그 경기가 김병지의 통산 리그 500경기 출장이었다. 그래서 등번호 500번을 새긴 유니폼을 특별제작했고 입고 뛸 수 있도록 프로연맹과 수차례 씨름한 끝에 가까스로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김병지에게 있어 500번째 경기는 자축보다는 슬픈 기억으로 남아버렸다. 하필이면 전북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무려 4실점이나 내주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고, 전북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경남은 자신들과 승점이 동률이었던 인천에게 6강 플레이오프 티켓을 내주기까지 했다(김병지 개인 기록도 500경기 통산 501실점이 되어버려 한 경기당 한 골 내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곧바로 다음 시즌인 2010년에는 경남이 6강 안에 들면서 김병지는 500경기에 이어 6강 진출까지 이뤘다. 그리고 2012년에는 통산 200번째 클린시트 달성과 더불어 통산 600경기 출장기록까지 달성하였다. 600경기 달성을 이뤘던 서울전에서 김병지를 비롯한 경남의 모든 선수들이 경남의 맏형이 세운 기록을 기념하는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2012년 10월 27일 김병지의 600경기 출장을 기념하는 경남 선수들. 사진출처 MK 스포츠)
경남에서 뛰면서 자신이 내세운 목표 중 2개는 충족시킨 김병지, 하지만 ACL 출전권 획득만은 유일하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리그 3위 이내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경남 입장에서는 국제 대회 출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FA컵 우승이었고, 실제로 경남은 FA컵에서도 누구보다도 독하게 임했다. 김병지가 뛸 당시에도 경남이 FA컵 결승전에 한 번 올라갔었는데(2012년), 하필이면 상대가 4년 전 결승전에서 자신들을 쓰러뜨린 포항이었다. 포항과의 재대결에서 연장전까지 0대0으로 팽팽한 승부를 유지하고 있던 그 때, 후반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에 포항의 박성호가 김병지의 마지막 목표달성을 무너뜨리는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박성호로 인해 김병지는 마지막 목표를 접어야만 했고, 경남도 자신들이 그토록 바랬던 '시도민구단 최초 ACL 진출' 이라는 원대한 꿈을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2012년 시즌, 경남은 FA컵 준우승과 리그 최종순위 8위로 2% 아쉬움을 남긴 채 시즌을 마쳤고, 이 시즌을 끝으로 김병지는 FA 자격을 획득하였다.
사람들은 자유계약신분을 얻은 김병지의 다음 행보에 주목했다. 솔직히, 자신의 고향팀인 경남을 자신의 마지막 커리어 삼아서 기록 갱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남 구단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구단 이사회는 경영 부실을 이유로 사무국을 구성하고 있던 직원과 감독을 필두로 한 코칭스태프 전부 사퇴 권고하는 등의 내부 분열을 조장했었고, 구단의 재정이 열악했던 상황이라 그를 붙잡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때마침 김병지가 이재명과 함께 전남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고, 결국 그는 드래곤던전에 입성하게 되었다.
6. 김병지, 불혹을 넘어선 골키퍼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2013~현재)
(자신의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김병지는 전남에 새 둥지를 틀었다)
김병지가 전남의 새로운 골키퍼로 입단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병지는 슬하에 아들 세 명을 두고 있는데(태백, 산, 태산), 김병지가 전남 이적을 확정지으면서 세 아들 또한 전남 유스로 동시 입단하면서 전남을 이 4부자가 접수하였다. 두 번째는 김병지가 광양으로 오기 전에 전남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찼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운재였다는 사실이다. 줄곧 상대팀에서 경쟁을 펼쳐왔던 두 사람이었는데, 한 클럽에서 두 사람이 거쳐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런 데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또한 그가 입단할 때, 당시 감독이었던 하석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 및 코칭 스태프들 중에서 김병지보다 나이가 어렸으니, 사실상 그가 전남에서 서열 2위라 해도 좋았다(하석주가 물러난 뒤에 노상래가 전남의 새 감독이 되었을 때에는 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노상래 감독은 김병지와 동갑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플레잉코치가 아닌 선수 신분으로 계약했다. 이 말은 즉슨, 선수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노랑색 유니폼을 입고 뛰는 김병지의 한 경기 한 경기 자체는 전설로 쓰여지고 있었다. 이미 K리그 통산 최다 출장기록을 갱신하고 있었고, 불혹을 넘어선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신체적인 감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수비 장악력 및 조율은 젊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된 전남에게 있어서 플러스 요소였다. 김병지는 후에 전남에 합류한 현영민, 스테보, 최효진 등과 함께 이른바 베테랑 라인을 구축하면서 전남의 균형있는 신구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와중 2015년 시즌 어느 날, 김병지는 또 한 번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2015년 7월 26일, 김병지는 '대망의 700경기 출장' 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사진출처 뉴시스)
2015년 7월 26일은 김병지 개인 커리어 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축구 역사에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었다. 30년 넘는 K리그 역사상 통틀어 최초로 700경기를 소화하는 선수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1992년에 프로 데뷔한 이래 23년간 쉴새없이 달려온 김병지가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물이었고, 이 날 제주와의 홈경기를 가졌던 전남은 김병지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했고, 전남 선수들은 700이라는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였다. 이전 500경기 출장 기록 때와 달리 김병지는 이번에는 웃었다. 전남은 이 날 제주를 3대1로 크게 이겼고, 김병지도 제주의 슈팅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으면서 승리와 기념을 자축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중요한 사실은, 김병지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내딛는 흔적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지금 김병지가 남긴 족적만을 보았을 때에는 단순히 울산에서 뛰었던 골키퍼를 뛰어넘어 K리그를 상징하는 골키퍼이자, K리그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가고 있어서 울산 레전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으면, 2000년대부터 축구를 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김병지가 유상철이나 김현석에 비해 원클럽맨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1990년대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항상 어김없이 미친 존재감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꽁지머리 시절 김병지가 뇌리 속에 아직도 남아있고, 그 때가 김병지 커리어 중에서 최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김병지가 K리그를 선도하던 일종의 트렌드세터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행과 페널티 에어리어 밖을 뛰쳐나오던 필드 플레이는 지금은 마누엘 노이어가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골키퍼들도 드리블을 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선도적이었다.
김병지처럼 리그 통산 700경기 이상 달성한 선수, 혹은 20년 넘게 현역 선수생활을 유지하는 선수가 해외에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인 '킹 가즈' 미우라 가즈요시(현역 생활 30년째에 접어들고 있다)나 맨유에서 700경기 이상 출장 대기록을 달성한 라이언 긱스(총 963경기 출장, 리그는 672경기 출장) 정도 비교할 수 있을만큼, 김병지의 존재감은 상당히 크다. 700경기를 달성한 김병지의 다음 목표는 777경기 달성이라고 한다. 술, 담배를 전혀 안하고 항상 꾸준한 몸관리를 하기로 소문난 김병지, 그가 777경기를 달성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경기에 출전할 날도 마냥 꿈은 아닐 것이다.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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