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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동쪽은 여주시, 서쪽은 성남시, 남쪽은 용인시·이천시, 북쪽은 하남시와 한강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 08′∼127° 26′, 북위 37° 15′∼37° 33′에 위치한다. 면적은 431.05㎢이고, 인구는 31만 257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읍, 4개 면, 3개 행정동(13개 법정동), 174개 행정리(68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여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고 있다. 동쪽에는 정암산(正巖山 403m)·해협산(海狹山, 531m)이 남종면에 입지하고, 앵자봉(鶯子峰, 667m)·천덕봉(天德峰, 635m)이 여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불곡산(佛谷山, 313m)·검단산(黔丹山, 535m)이 성남시와, 남쪽에는 해룡산(海龍山, 367m)이 이천시와 접하고 있다. 중앙에는 용마산(596m)·태화산(泰華山, 644m)·무갑산(武甲山, 578m)·관산(冠山, 556m)이 있으며 이들 산지 사이로 남한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주변에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용인에서 발원하는 경안천(京安川)은 광주시의 서부를 복류하면서 능원천(陵原川)·직리천(直里川)·중대천(中垈川)·목현천(木峴川)과 합류하고 초월읍에서 곤지암천(昆池巖川)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한강은 군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고 있다.
동부읍과 서부면 북부에 형성된 범람원과 당정리·미사리의 하중도를 제외하면 평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산지가 많아 지역 간의 교류를 위해 일찍이 고개가 개발되었는데 그중에서 성남시로 통하는 갈마치(葛馬峙)·태현(台峴)·곧은골고개·이배래고개·새나리고개, 이천으로 통하는 넓고개, 용인으로 통하는 봉골고개·부천당고개·말치고개가 있다. 이 지역의 기반을 이루는 암석은 화강편마암이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4.7℃, 8월 평균기온 25.5℃, 연강수량은 1,256㎜이다. 서리는 10월 중순에 내리고 다음해 4월 중순에 끝나 무상기일은 200일 내외이다.
1986년중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광주 궁평리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이후, 각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구석기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한강변에 위치한 남종면의 검천리, 오포면의 양벌리 등이 있으며,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취락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보다 분포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평동·궁평동·쌍동리 등에서 지석묘와 주거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에도 광주지역에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였음을 보여준다. 삼한시대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마한이 지금의 군청소재지인 경안에 도읍을 정하여 광주의 별호를 회안(淮安)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여 년 동안 도읍을 하였던 곳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였다. 이곳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에 속해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광주지역에 속해 있었다. 한강유역에 도읍했던 백제는 국력이 날로 신장해 근초고왕대에는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475년(문주왕 1)고구려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개로왕이 피살되고 백제는 공주로 천도했으며, 이후 76년 동안 광주지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유적과 몽촌토성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토기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551년광주지역은 백제·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탈환되어 잠시 백제의 영역에 속했지만, 553년(진흥왕 14) 나제동맹을 파기한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에는 신주(新州)로 되었다가 660년(태조무열왕 7)에 한산주(漢山州)로, 다시 756년(경덕왕 15)에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합한 지역만큼 넓었던 신주와 한산주·한주의 읍치(邑治)지역으로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940년(태조 23)에 한주는 현재의 이름인 광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을 12도로 나눌 때 광주목을 두어 관내도(關內道)를 다스리게 하였다. 995년(성종 14)에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를 예속시켰다. 1012년(현종 3) 절도사를 폐하고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1018년 12목을 줄여 8목으로 고칠 때도 광주는 목사를 그대로 두었다.
세종 때 진을 두어 광주목 진영소속으로 여주목·이천도호부·양근군과 지평·음죽·양지·죽산·과천의 5현을 두었다. 1566년(명종 21) 방어사와 토포사를 겸하였고 1577년(선조 10) 부(府)로 승격되어 방어사를 겸하였고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다.
1623년(인조 1)남한산성을 쌓고 주치(州治)를 옮긴 뒤 1630년 광주부윤으로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45일간 항쟁의 격전을 치러 국난극복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세종 때의 상신인 맹사성(孟思誠), 세조 때의 대신이며 학자인 최항(崔恒),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 등이 있으며, 묘가 모두 군내에 있다. 또한 실학자 안정복(安鼎福)도 이곳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광주군으로 되었으며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대왕면에 쓰여진 뒤로는 광릉(廣陵)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강과 경안천의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사옹원(司甕院)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분원백자의 산지로 유명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백자 요지만도 85개 소에 달하고 있다.
1917년에는 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이전되었고, 1919년 3월 23일 이후 군내 각지에서 봉화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26일에는 중대면·동부면에서, 27일에는 서부면에서, 28일에는 돌마면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있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역대의 시가를 모아 『가곡원류』를 편찬한 안민영(安玟英), 신소설 『추월색(秋月色)』을 발표하여 신문학 개척에 공이 큰 최찬식(崔瓚植),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이종훈(李鍾勳), 개화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 근대의 정치가였던 신익희(申翼熙) 등이 있다.
1963년에 구천면·중대면·언주면과 대왕면의 일부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64년중부면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 성남시가 신설되면서 중부면 일부와 대왕면·낙생면·돌마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에 광주면이 읍으로, 1980년 12월 1일에 동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는 동부읍·서부면 및 중부면 산산곡리가 하남시로 승격, 분리되어 군세가 일시 약해졌으나 수도권 위성지역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2001년 3월 21일에 군에서 시로 승격되었으며, 오포면도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 6월 21일에 초월면과 실촌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2011년 6월 21일실촌읍이 곤지암읍으로 2015년 10월 16일중부면이 남한산성면으로 개칭되었다.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된 지역으로 각처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유물·유적이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면 산성리의 남한산성(사적 제57호) 내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숭렬전(崇烈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현절사(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침과정(枕戈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연무관(演武館,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지수당(池水堂,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장경사(長慶寺) 등과 성터·궁궐터(행궁, 경기도 기념물 제164호)가 남아 있다.
도요지로는 광주조선백자도요지(사적 제314호)가 퇴촌면 등 1개 읍 5개 면에 분포되어 있고, 남한산성면 상번천리요와 초월읍 선동리요를 비롯하여 80여 개 소가 산재해 있다. 봉수지는 검단산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망월사지(望月寺址,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개원사지(開元寺址,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도척면의 광주유정리석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8호)·백련암부도(白蓮庵浮屠) 등이 있다.
또 직동에 맹사성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 퇴촌면 도마리에 최항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33호), 초월읍 지월리에 허난설헌묘(許蘭雪軒墓,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곤지암읍 신대리에 신립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오포읍 신현리에 김자수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98호), 오포읍 능평리에 김균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05호), 퇴촌면 영동리에 신흠묘역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45호), 초월읍 서하리에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 도척면 진우리에 신경유선생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남한산성면 엄미리에 의안대군 이방석묘(경기도 기념물 제166호)가 있다. 산성리에 영춘정(迎春亭), 초월읍 대쌍령리에 정충묘(精忠廟)가 있다.
곤지암읍 곤지암리에는 신립의 전설이 깃든 곤지바위가 있다.
곤지암읍 열미리의 광주산성소주(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3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 산성향교(山城鄕校)를 위시하여, 1667년(현종 8)에 건립된 구암서원(龜巖書院), 1685년(숙종 11)에 건립된 수곡서원(秀谷書院), 1725년(영조 1) 건립된 사충서원(四忠書院), 1688년 세워진 현절사 등 각처에 서당들이 있었다.
신교육 실시 이후에는 1912년에 남한산성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6년 후에 광주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 일면일교(一面一校)의 시칙에 따라 8개 면에 16개 교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43년광주농업실습원이 설립되어 최초로 3∼6개 월 간의 단기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광복 후 광주농업실수학교(廣州農業實修學校)로 되었다가 1947년광주농업중학교로 개명되었고, 1954년광주농업고등학교로 되었다. 이후 은광고등학교·광서고등학교·양영상업고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5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서울장신대학교와 동원대학이 있다.
문화행사로는 매년 10월에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문화제가 열린다.
이 지방 민속놀이로는 해동화(解冬火)놀이가 있다. 그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100여 호 전체주민들이 참여한다. 놀이장소는 남한산성 동문 밖의 노적봉 밑 계곡을 내려와서 마을 앞 개울가에 있는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놀이는 해마다 행하여지지만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 마을에 부정한 일이 있을 때는 거른다. 대보름날 마을 전체가 집집마다 나무 한 짐씩을 해다가 높이 10m, 둘레 6m 정도로 세워서 쌓아놓은 다음 시작한다. 한 사람이 싸리방망이를 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달 뜨는 것을 보고, 방망이에 불을 붙여 신호를 하면, 마을에서 뽑힌 대표자가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불을 붙인다. 불이 타기 시작해서 나무가 다 탈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그 주위를 돌면서 농사의 풍작과 재앙이 물러갈 것을 빈다.
이 때 미혼자는 혼인의 성사를 빌기도 하고, 아이를 원하는 부부는 잉태를 빌기도 한다. 이 행사가 끝나면 농악의 짠지패가락과 함께 밝은 대보름달 아래서 밤새는 줄 모르고 전 주민의 뜻이 하나로 응집되어 대동단결을 다짐하며 마을 전체를 돌면서 집집마다 소원을 빌어준다. 이 때 농악대가 들르는 집에서는 으례 음식을 차려서 이들에게 대접한다.
남한산성면 엄미리에는 마을 전체가 지내는 장승제가 있다.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병자호란 이후 쯤부터 격년으로 음력 정월보름이 지나서 행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입구에는 이미 세워져 내려오는 장승(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이 십여 개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제를 지내는 것이다. 제를 지낼 때마다 장승 두 개씩을 새로 깎아서 세우면 오래된 장승은 자연적으로 없어진다.
제관은 동네노인 중에서 신망이 두텁고 심신이 깨끗한 사람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보름 동안 목욕재계를 한 다음, 떡과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동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사를 지낸다. 축원의 내용은 2년 간 온 동네에서 재앙이 물러가고 농사가 풍년이 들며 동민들이 운수대통할 것을 비는 것이다. 장승제가 끝나면 온 동민들이 한데 어울려서 즐거운 축제를 벌인다.
이 지방에는 지명유래담, 자연물과 관련된 전설, 사찰연기설화가 많이 전하는데 대개 역사적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서장대의 매바위전설」은 남한산성 축조에 관한 설화로, 인조조에 광주유수로 있던 이서(李曙)는 이회(李晦)와 승려 벽암(碧巖)에게 성을 나누어 쌓게 했다. 북쪽을 맡은 벽암은 일을 순조롭게 진행시켜 기일 안에 축성을 끝내고 공사비를 남겨 환납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회는 세심하고 견고하게 성을 쌓다보니 기일 안에 공사를 끝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공사비가 부족해 사재를 털어넣기까지 하였다.
벽암은 이회가 게으르고 무능하며 주색을 탐하는 데 공사비를 낭비하였다고 소문을 내었다. 결국 이회는 광주유수에게 잡혀와 문책을 당하게 되어 사실대로 고하였지만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회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시체를 빙빙 돌더니 뜰 앞 바위에 앉았다가 사라졌다.
바위 위에 매발자국이 뚜렷이 남자 이상하게 여긴 관가에서 성을 조사했더니, 벽암이 쌓은 성은 허술했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견고했다. 그래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려고 청량당을 지었다. 지금도 이회의 성은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매가 앉았던 ‘매바위’도 남아 있다.
설월리의 「가마소전설」은 지명유래담으로, 지월리에는 넉넉하고 금슬이 좋으나 자식을 두지 못한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부인이 꿈에 한 노인으로부터 “냇물의 가장 깊은 곳에 다리를 놓고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것이나, 혼사에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라.”는 전언을 듣고 잉태하여 ‘구슬아기’를 낳았다. 같은 시간 머슴 박서방도 아들을 낳았는데 두 아이는 훌륭하게 자라났다.
드디어 구슬아기는 이웃 마을 김초시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했는데, 혼인 전날 “박서방의 아들 돌쇠와 혼인하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지만, 아버지는 예정대로 혼사를 진행시켰다. 신부가 신랑을 따라 가마를 타고 신행을 가게 되었는데, 아이를 낳기 위해 치성을 드렸던 다리의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달이 구름에 가려지고 온 누리가 깜깜해졌다.
일행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가마는 다리 아래 물속으로 떨어져버렸고, 그 이후 돌쇠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구슬아기가 빠진 웅덩이를 ‘가마소’라 하고 눈 내리는 달밤에 일이 일어났으므로 마을을 설월리(雪月里)라 하였다.
남한산성의 북문 안 ‘효자우물’에는 때아닌 잉어를 구해 부모를 살려낸 효자설화가 남아 있다. 그 밖에 「매바위전설」에 나오는 벽암, 이서의 설화가 따로 전하고 있고 장항(獐項, 노루목)·진우리·상서동·진터벌·미륵동·굴우물·토끼봉 등 많은 지명유래담과 명당에 얽힌 임경업의 출생담인 「임도령과 암쿠렁이 이야기」 등 많은 설화가 남아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는 민요는 노동요가 가장 많은데, 노동요 중에서 농업노동요는 적은 편이나 「논매기소리」 중간에 ‘이리’라는 여음을 쓰는 것이 특색이다. 여성노동요 가운데는 이 지방에 디딜방아가 많아 작업 중에 많이 불리었다고 하는 「디딜방아소리」가 있다. 또한 다른 지방의 서사적이고 안정된 형식과는 달리 율격이 불안정하며 비교적 짧은 형태를 취하는 「베틀가」가 있다.
「나물타령」은 나물 이름을 엮어 부른 어희요(語戱謠)이다. 이것은 “……이개 저개 지진개/오용에 도용에 말뱅이/한푼 두푼 돈나물/쑥 뽑아라 나생이/……” 등과 같이 ‘지진개, 말뱅이’ 등의 나물 이름을 재미있게 풀이한 것으로 해학성이 뛰어나다. 타령요류 중에 「범벅타령」과 「달거리타령」은 대부분을 월령체로 엮어가고 있으며 「떡타령」은 집에 오신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으니 떡타령으로 대접한다는 재미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을/무엇으로 대접할까/변변찮은 떡타령이나마/한 마디라도 올릴까/들어보시오 들어보시오/떡타령 들어보시오/얼기설기마구설기/어떻게 보아도 마구설기/저기 가다가 왔다봐도/저렇게 봐도 주먹맞이/주먹맞이면 개피떡 아니구/……”이것은 ‘설기·개피떡’등 떡이름을 풀이하면서 어희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흥을 돋우고 있다. 그 밖에도 여요와 동요가 많이 구전되고 있다.
전 토지의 68.6%가 임야로 산지가 많은 이 지역은 경지가 17.2%, 도로용지가 2.8%, 대지가 2.3%, 공장용지가 1.1%이고 경지 3,962㏊ 중 논이 1,636㏊, 밭이 2,326㏊이다. 이 지역에는 태전동의 중앙저수지, 도척면의 도척저수지, 오포읍의 매산저수지가 있어 농업용 관개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콩·감자, 그리고 채소류로 시금치·배추·무·오이·고추, 특용작물로 참깨, 과실류로 사과·배 등이 생산되고 있다. 서울에 인접해 있어 서울을 시장으로 하는 근교농업이 발달해 있었으나 최근 서울의 확대로 농작물 공급지로서의 기능이 감소하고 있다. 광주를 비롯한 주요 도로변에는 목장·수목원·화훼단지 등이 발달하고 있다.
임산자원으로는 밤·도토리·대추 등이 생산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6.9%인 1만 6190명인데 농가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12.6%인 2만 9523명이다.
주요 광산물로 사금·활석·철광석이 과거에는 소량 생산되었으나 현재 폐광상태이고 주요 제조업으로 도자기업이 성하다. 조선시대 이래 궁중에서 쓰던 그릇을 굽던 도자기 요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대도시에 인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제조업체가 늘어나고 있다. 주요 제조업은 조립금속·식료품공업·비금속공업·섬유·의류·종이·인쇄업·나무가구공업 등이 있다.
과거에는 정기시장이 발달했으나 교통기관의 발달과 소득의 증가로 정기시장은 쇠퇴하고 상설화되었으며, 슈퍼마켓 등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은 서울이나 성남의 시장과 대형백화점을 이용한다.
이 지역의 교통은 예로부터 중부내륙과 통하는 서울의 관문이었고 한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 지역을 지나는 도로는 중부고속도로가 군의 중심부로 서북·동남향으로 지나고 국도 3호선이 이천시에서 곤지암읍과 광주시내를 거쳐 성남시로 들어가고 국도 43호선이 여주시에서 들어와 남한산성면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철도로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경강선이 2016년부터 부분적으로 개통하여, 광주시를 지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제조업체가 많이 입주하고 있으나 전 토지의 37%가 개발제한 구역에 묶여 있어 개발이 억제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광주의 생활권 가운데 고속도로가 지나는 경안동·남한산성면·초월읍 등은 서울시의 영향권에 있다.
예로부터 사찰·도자기 굽던 가마터 등이 많은 문화유적지이다. 광주산맥 주변으로 잔구성 산지와 구성성 지형이 발달되어 있고 남한강 지류가 흘러드는 유역에 좁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광주 중심부에는 나라의 중요한 방위선이었던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수어장대·장경사·연무관 등이 있으며, 계곡에는 서울·성남 외에도 수도권시민이 많이 찾는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의 확장으로 지역개편에 따라 좁아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도시문화가 접근하지 않은 옛 풍습이 살아 숨쉬는 마을들이 많다. 특히 전국에서 나무장승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남한산성면 엄미리와 서하리, 초월읍 무갑리 등의 마을에서는 나무장승을 깎아 마을의 안녕을 비는 뿌리 깊은 대동제 모습은 우리의 생태문화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광주땅에서 조선시대에는 백자를 구워내어 광주땅 전체가 도자기 굽는 가마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유명했으나 구한 말 격동기를 맞아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자생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꺼진 가마터에 불을 붙여 옛 모습 그대로의 도예단지를 조성하여 곳곳에 도예관광지가 발달되어 있다.
관광명소로서는 남한산성 주변의 나무장승과 솟대를 들 수 있고, 남한산성면 엄미리의 나무장승, 검북리의 나무장승, 하번천리의 양짓말 장승, 서하리 안골 사마루 장승, 무갑리 장승, 퇴촌면 관읍리·우산리 장승을 들 수 있다.
사찰로서는 장경사·국청사·봉은사 등이 있고, 이밖에도 숭렬전과 현절사·서장대·청태종공덕비·청량당·송암정·능묘·백연암, 퇴촌면 우산리의 천진암 등이 유명하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는데 북쪽은 개성, 남쪽은 수원, 서쪽은 강화, 동쪽은 광주 남한산성이었다. 백제 온조왕 13년에 광주산맥 능선을 따라 산세에 알맞게 쌓은 산성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퇴촌면에는 음식점이 많아 별미의 음식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이 찾는다.
1. 오포읍(五浦邑)
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46.93㎢, 인구 8만 726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고산리이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오포면이라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포면의 19개 리가 8개 리로 통합되었다. 1973년에 목리가 광주면으로 이속되어 7개 리로 되었다. 그리고 2001년 3월 2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경안천인 세피천(細皮川)을 중심으로 그 유역에 5개의 보(洑)가 있는데, ‘보’가 ‘포’로 바뀌면서 면의 명칭이 생겨났다.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긴 지형으로 북쪽에 문형산, 서쪽에 불곡산(佛谷山, 345m), 동쪽에 백마산(白馬山, 408m)·발이봉 등이 솟아 있으며, 동부지역을 북류하는 경안천과 남부지역을 동류하여 경안천에 흘러드는 능원천(陵院川) 유역에 띠모양의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전체면적 중 경지율이 약 25%이며 논과 밭의 비율은 엇비슷하다.
논농사 외에 농가부업으로 젖소·돼지·닭의 사육이 활발하여, 과거에는 가축 사육두수가 군내 제1의 위치를 점한 적도 있으나, 현재는 산양두수를 제외하고는 그 자리를 모두 넘겨주고 말았다. 제조업으로는 청량음료·가구·봉제·화공약품·합성수지공업 등을 중심으로 약 200여 개의 업체가 있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업체들이 다수 분포하여 생산량이 많은 편이다.
교통은 광주시와 용인시 모현면으로 연결되는 43번 국도와 45번 국도가 각각 읍의 중부과 동부를 종단하며, 성남시 분당구로 연결되는 57번 지방도가 읍의 서부지역을 관통한다.
문화유적은 신현리에 고려 때 문신인 김자수(金自粹)의 묘와 능평리에 김균묘가 있다.
고산(高山)·신현(新峴)·능평(陵坪)·문형(文衡)·추자(楸自)·매산(梅山)·양벌(陽筏) 등 7개 리가 있다.
2. 곤지암읍(昆池岩邑)
시의 동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76.18㎢, 인구 2만 317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곤지암리이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실촌면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30개 리가 14개 리로 통합되었다. 면의 명칭은 명당이 많아 뛰어난 인물이 나고, 마을이 견실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73년도척면의 삼리와 초월면의 신대리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2004년 실촌읍으로 승격되었고, 2011년 실촌읍이 곤지암읍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북쪽의 앵자봉(鶯子峰, 667m), 서쪽의 천덕산(天德山, 635m), 남서쪽의 정개산(鼎蓋山, 407m), 정남쪽의 국수봉, 북동쪽의 감투봉(373m) 등이 면을 병풍처럼 에워싼 형세다. 곤지암천의 지류로 동북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상열미천(上悅美川)과 남쪽의 신촌천(新村川) 주변 분지에 곡저평야가 있다.
여전히 농업이 주요 생산기반이나 점차 확산되는 제조업체의 건립으로 공업화가 진전되고 있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 정도이나, 전체 면적이 넓은 관계로 군내에서 제1의 경지면적을 자랑한다. 쌀을 비롯한 보리·콩·감자 등의 산출량이 두드러지고, 과수농업과 산간지방의 양잠도 활발하다. 예로부터 이 지역의 고추는 경인지방에 소문난 특산물이다. 또한 한우·젖소·사슴·토끼·오리 등의 사육이 활발한데, 사육두수가 모두 군내 제1위이다.
제조업으로는 중부고속도로에 인접한 삼리를 중심으로 식품·전자·도자기·제지·유리·가구·기계설비·피혁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교통은 삼리에 중부고속도로의 곤지암 인터체인지가 있으며, 광주시와 이천시 신둔면으로 연결되는 3번 국도가 면의 남부를 가로지르고, 도척면과 여주시 산북면으로 이어지는 329번 지방도로가 중앙을 종단하는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문화유적은 신대리에 신립장군묘역, 곤지암리에 곤지암바위가 있으며, 열미리에서 광주산성소주(廣州山城燒酒)가 생산되고 있다. 그밖에 삼리에는 독립운동가인 구연영(具然英)의 묘, 열미리에는 육각정 등이 있다.
곤지암(昆池巖)·수양(水陽)·신촌(新村)·봉현(鳳峴)·부항(釜項)·이선(二仙)·만선(晩仙)·유사(柳寺)·삼합(三合)·연곡(蓮谷)·오향(五香)·열미(悅美)·장심(長深)·신대(新垈)·삼(三)·건업(建業) 등 16개 리가 있다.
3. 초월읍(草月邑)
시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55.90㎢, 인구 4만 211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대쌍령리이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초월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월면 25개 리가 15개 리로 통합되었다. 1973년 7월상번천·하번천리가 중부면에, 신대리가 실촌면에 각각 이속되었다. 2004년 6월 2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명칭은 시를 둘러싼 모양이 초생달과 같다 하여 초월(初月)이라 불리다가 뒤에 한자 표기가 초월(草月)로 바뀌었다.
동부지역에는 관산(冠山, 556m)·무갑산(武甲山, 578m), 서부지역에는 칠사산·백마산·발이봉 등이 솟아 있다. 면의 북부지역을 동류하는 경안천과 그 지류인 무갑천(武甲川), 중서부지역을 북류하는 곤지암천과 그 지류인 학동천(鶴東川)·신월천(新月川)·산리천(酸梨川) 유역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전체면적 중 경지율이 약 20%이며 논과 밭의 비율은 비슷하나 논농사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다. 쌀 이외에 고추와 딸기 및 땅콩 재배가 행해지며, 농가부업으로 닭·돼지·산양의 사육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금속·가구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200여 개의 중소기업체가 있다.
교통은 광주시와 곤지암읍으로 연결되는 3번 국도가 대쌍령·쌍동·산이리를 지나며, 중부고속도로가 읍의 중앙을 종단한다. 문화유적은 지월리에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묘가 있으며, 서하리에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가 있다. 그 밖에 대쌍령리의 낙화암(落花巖) 등이 있다. 특히 대쌍령리와 도평리 일대의 남촌(南村)수영장은 연간 수십 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대쌍령(大雙嶺)·쌍동(雙東)·산리(酸梨)·늑현(勒峴)·학동(鶴東)·선동(仙東)·용수(龍水)·신월(新月)·지월(池月)·무갑(武甲)·서하(西霞)·도평(島坪) 등 12개 리가 있다.
4. 남종면(南終面)
시의 북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48.57㎢, 인구 1,61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분원리이다.
본래 양평군 지역으로 양평읍내 남쪽 끝이어서 남종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평군 남종면의 8개 리가 분원·수청·검천·귀여·우천 등 5개 리로 통폐합, 광주군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초 팔당댐의 담수로 인해 우천리가 침수되면서 지명이 없어졌으며, 1973년퇴촌면의 금사·이석·삼성리 등 3개 리가 편입되었다.
동부와 서부지역이 팔당호로 구분되며, 중동부에 정암산(正巖山, 403m), 중앙에 금봉산(金鳳山, 233m), 남쪽에 해협산(海峽山, 532m)·국사봉(國士峰, 206m) 등이 연이어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면의 중앙을 북류하여 팔당호에 흘러드는 정암천(正巖川) 주변과 팔당호 남안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팔당호를 좌우로 끼고 있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1974년 팔당댐의 건설로 대부분의 논밭이 물에 잠겨 경지율은 미미한 수준이며,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은 엇비슷하다. 벼농사 외에 콩의 경작이 성하고, 채소의 산출량도 적지 않다. 강력한 개발제한 조치로 인해 제조업의 발달이 미미한 편이며, 인구밀도와 인구증가율도 시에서 가장 낮다.
남한산성면과 하남시로 연결되는 45번 국도가 면의 서부지역을 종단하며 5·6번 군도가 면의 서쪽에 정비되어 있지만, 팔당호로 양분된 동서간의 도로망이 원활하지 못하다. 분원리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사기그릇을 관장하던 사옹원(司甕院)의 현지 제작소로 유명한 곳인데, 현재는 분원도요지가 만들어져 향토유적으로 보호받는다. 팔당호가 빚어낸 팔당유원지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며, 삼성리의 구림농원도 여름철에 피서객이 몰리는 장소이다.
분원(分院)·귀여(歸歟)·검천(檢川)·수청(水靑)·금사(金沙)·이석(二石)·삼성(三成) 등 7개 리가 있다.
5. 도척면(都尺面)
시의 남쪽에 위치한 면. 면적 52.15㎢, 인구 9,0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노곡리이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높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 싸여 있으므로 도재 또는 도척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척면의 13개 리와 양지군(陽智郡) 주북면(朱北面) 일부가 9개 리로 통합되었다. 1922년 11월에 면 소재지를 궁평리에서 노곡리로 이전, 1973년삼리가 실촌면으로 이속되었다.
발이봉(發梨峰, 479m)·노고봉(老姑峰, 579m)·정광산(正光山, 524m)·태화산(泰華山, 644m) 등의 연봉이 북서쪽에서 남쪽으로 달리며, 동쪽 지역은 국수봉과 해룡산 등을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분포한다. 면내에는 노곡천(老谷川)·궁평천(宮坪川)·진우천(鎭牛川)·유정천(柳井川) 등이 곤지암천으로 흘러들고, 그 주변에 크고 작은 평야가 소재한다.
전체 면적 중 농경지가 약 20%를 차지하며, 논과 밭의 비율이 거의 같다. 벼농사 외에 잡곡·콩의 경작과 구릉지 일대의 과수농업도 활발하며, 인삼 및 생사의 산출량도 많다. 한우·젖소·돼지의 사육이 성한데, 특히 돼지의 사육두수가 군내 제1위이다. 제조업으로는 제약·가구·전기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약 60여 개의 업체가 있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진우리를 통과하고, 곤지암읍과 여주시로 연결되는 329번 지방도가 면의 중서부 지역을 종단하며, 44번 지방도가 노곡리에서 329번 지방도와 갈라져 용인시 양지면으로 이어진다. 그 밖에 7번 군도가 중앙을 종단하는 등 많은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유정리의 석불좌상과 진우리의 신경유선생영정 및 공신녹권, 그리고 추곡리의 추곡리백연암부도 등이 있다.
노곡(老谷)·유정(柳井)·방도(芳都)·추곡(楸谷)·상림(祥林)·도웅(陶雄)·궁평(宮坪)·진우(鎭牛) 등 8개 리가 있다.
6. 남한산성면(南漢山城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74㎢, 인구 3,01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지원리이다. 2015년 10월 중부면에서 남한산성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광주군청이 있었으므로 군내면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내면(郡內面)과 세촌면(細村面) 상대원리(上大院里), 서부면(西部面) 창동(倉洞)이 13개 리로 통합, 중부면이 되었다.
특히, 산성리는 예로부터 1917년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할 때까지 광주군 전체를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1973년 신설된 성남시에 상대원(上大院)·창곡(倉谷)·복정(福井)·탄(炭)·단대(丹垈) 등 5개 리와 수진동(壽進洞)이 다른 곳으로 이속되었고, 초월면의 상번천·하번천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1974년 면소재지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바뀌었으며, 1989년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승격될 때 상산곡리(上山谷里)가 하남시에 편입되었다. 2015년 중부면이 남한산성면으로 개칭되었다.
서부지역에 청량산(淸凉山, 480m)·한봉(汗峰, 418m)·검단산, 중부지역에 약사산(藥寺山, 400m)·노적산(露積山, 397m), 동부지역에 칠사산 등 산지가 대부분이다. 경안천의 지류인 번천(樊川)과 엄미천(奄尾川) 하류에 약간의 곡저평야가 있을 뿐이다. 면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과 자연환경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제한 규제를 받는다.
전체면적 중 경지율이 10%를 조금 상회하고,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다소 우세한 지역이다. 주곡 생산 외에 과수·원예농업이 활발한데, 특히 복숭아·딸기의 산출량이 많다. 제조업은 개발제한 규제가 심해 거의 발달하지 못했고, 단지 남한산성 주변에 숙박 및 음식점 시설이 상대적으로 많다.
교통은 상번천리에 중부고속도로의 광주 인터체인지가 있으며, 광주시내와 하남시를 연결하는 43번 국도가 남북을 종단하고 광주시와 남종면으로 이어지는 45번 국도도 면의 중서부를 관통한다. 또한 남종면과 성남시로 연결되는 308번 지방도가 중앙을 가로지르는 등 도로망이 발달하였다.
문화유적은 산성리에 남한산성(南漢山城)·수어장대(守禦將臺)·숭렬전(崇烈殿)·청량당(淸凉堂)·현절사(顯節祠)·침과정(枕戈亭)·연무관(演武舘)·망월사지(望月寺址)·개원사지(開元寺址)·지수당(池水堂)·장경사(長慶寺) 등이 있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남한산성 동문에서 광지원리까지의 굽이쳐 흐르는 계곡,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성곽, 일장산(日長山)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풍경, 그리고 각종 토속음식점 등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광지원(光池院)·산성(山城)·엄미(奄尾)·오전(梧田)·불당(佛堂)·검복(黔伏)·상번천(上樊川)·하번천(下樊川) 등 8개 리가 있다.
7. 퇴촌면(退村面)
시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60.74㎢, 인구 1만 333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동리이다.
본래 광주군 지역으로 퇴촌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퇴촌면의 20개 리와 초월면 정자동·무수동·원당동 등이 13개 리로 통폐합되었다. 면의 명칭은 조선 개국공신인 조영무(趙英茂)가 ‘관직에서 물러나 거주한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1973년금사·이석·삼성 등 3개 리가 남종면으로 이속되었다.
북쪽의 해협산, 남쪽의 관산·앵자봉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면내로 뻗어 있는 산지지형이다. 서부지역을 북류하여 팔당호에 흘러드는 경안천과 중앙을 관류하여 팔당호에 흘러드는 우산천(牛山川) 주변에 약간의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나, 경지율이 10%를 약간 상회하고 논과 밭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쌀 이외에 잡곡과 보리의 경작이 성하다. 산간지역에서는 표고버섯과 산나물의 채취 및 사슴과 산양의 사육이 활발하다. 제조업은 미미하나 인근 팔당호의 관광자원을 배경으로 숙박업과 요식업이 발달하였다.
교통은 남한산성면과 남종면으로 연결되는 45번 국도가 면의 서부지역인 도마리를 지나고, 양평군 강하면으로 이어지는 308번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한다. 문화유적으로는 도마리에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인 최항(崔恒)묘가, 영동리에는 조선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우산리의 천진암(天眞庵)은 한국의 천주교 발상지로서 국내외 천주교 신자는 물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광동(光東)·관음(觀音)·우산(牛山)·영동(嶺東)·도수(陶水)·오(梧)·도마(道馬)·무수(無愁)·원당(元堂)·정지(亭支) 등 10개 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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