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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이 어떤 서사를 빚는지 살펴보자.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 달리 논리적 인과성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인물 성격의 일관성이라거나 플롯의 개연성 등을 따지지 않는다. 시적 서사는 오로지 시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등장인물 대신 이미지들이 등장하며 인물들간의 갈등 대신 이미지들이 충돌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비약한다.
시와 소설은 우리가 일상어라 부르는 산문에서 분화되어 특장화된 장르이다. 그래서 산문 쓰는 이는 장르의 벽을 허무는 통섭적 노력의 일환으로 시와 소설 공부를 등한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시와 소설을 일방적으로 추수한다거나 그 틈새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다거나 공유하는 부분을 이용해서 접목만을 시도한다면 결국 시와 소설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문에는 원형만이 가질 수 있는 사유의 힘이 있다. 그것은 언어 자체의 근원적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시를 읽으면 깊은 사념에 빠진다. 시가 우리의 철학적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나는 몇 편의 시에 나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남겨 보았다. 철학이라고 하면 무슨 대단한 의미를 천착하려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여기서의 철학이란 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직관이나 일상적 통찰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시를 해설하거나 분석하거나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 식으로 읽고 내 나름의 기쁨을 얻고자 할 따름이다. 그것은 시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더 넓게 모든 예술 작품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기도 하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삶을 텍스트로 한다. 그래서 거기에, 문학과 예술을 텍스트로 하는 산문들의 근거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위(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ㅡ 꽃나무/ 이상
우리는 나무와 끊임없이 교감한다. 아니 교감하려고 애를 쓴다. 나무는 아름다운 자태와 굳건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나무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키지만 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영원한 수수께끼며 그들의 삶은 신비에 쌓여있다. 한 나무가 꽃을 피울 때 우리는 경탄의 시선으로 그 꽃을 바라본다. 나무는 온힘을 기울여 꽃을 피운다. 나무는 자신의 존재에 집중하는 실존주의자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꽃을 피워가지고 서있다. 나무는 옆 나무에게로 갈 수 없다. 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자는 카오스 이전에 이미 우주화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고 전한다.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不在春風不在天 부재춘풍부재천
(원각산중에 나무 한 그루 있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꽃이 피어 있었다네/그 꽃은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바람도 없었고 그 바람이 불어오는하늘도 없었다네)
ㅡ 광덕사 적선당 주련에 있는 칠언 절구 (졸역)
색도 없고 공도 없는 카오스의 세계에 나무 한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다. 그 꽃을 들여다보는 것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존재의 심연이 두렵다. 우리의 삶이란 경계 짓고 구획을 나누고 분별하여 스스로 안심하여야 비로소 안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꽃에 매료되어 나와 식물의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 확고한 관념의 기반이 흔들리는 듯한 모호한 순간이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일컫는 것도 사실은 혼돈 이전에 피어나는 모호한 착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ㅡ 멜랑콜리아 / 진은영
어떤 그림이 그려진다. 이미지가 형성되어 우리의 감각을 건드린다.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다. 감각은 촉발되지만 그로 인한 어떤 행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장면은 바뀐다.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이번엔 사막이다. 그는 신처럼 나타나 모래 위에 나를 그린다. 그는 나를 그려놓고 왜 물고기를 그렸다고 기억할까? 나와 물고기와는 어떤 유비가 있는 걸까? 나는 혹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심지어 신은 바람을 불러 나를 지우기까지 한다. 또다시 장면이 전환된다. 이번엔 바다다. 사막에서 바다로 전환되는 장면 이동에는 어떤 설명도 없다. 단지 물고기라는 이미지만 공유할 뿐이다. 신의 낙서가, 아니면 신의 기억이 푸른 바다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 것이다. 신은 얼마나 낙관주의자인가. 단지 나를 이승에서 내 존재를 지움으로써 나를 물고기의 천국인 바다로 보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시적인 상상력을 지닌 신을 만들어낸 우리는 또 얼마나한 낙관주의자들인가!
오늘 석양 무렵 그곳으로 떼지어 나르는 되새떼들의 하늘을 햇살 남은 쪽으로 몇 장 모사해 두었네 밑그림으로 남기어 두었네 그걸로 무사히 당도할 것 같네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날개붓이여, 새들의 운필이여 붓 한 자루 겨우 얻었네 秘標 하날 얻어 두었네 한 하늘에 대한 여러 개의 질문과 응답을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지덕지 할 일인가 오늘 서쪽 하늘에 되새떼들이 긋고 간 飛白이여, 되새떼들의 書體여, 자유의 격식이여 몇 장 밑그림으로 모사해 두었네 가슴팍에 바짝 당겨 넣은 새들의 발톱이 하늘을 찢지 않으려고,
흠내지 않으려고 제 가슴 찢고 가는 그게 飛白이라네 하얀 피라네
ㅡ 되새떼들의 하늘 / 정진규
황욱선생이 노년에 악필(握筆)로 글을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떨리는 왼손으로 붓 끝을 찍어누르듯 한 자 한 자 영혼을 기울여서 쓰셨다. 그 떨리는 붓 끝에서 웅크린 생명들이 태어났다. 나는 그 붓을 들어 석양녘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싶었다. 내 붓의 털들이 낱낱이 살아서 날게 하고 싶었다. 자유는 이런 것이다. 소리없이 따르는 것이다. 수천 수만의 깃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목적도 좌표도 없이 온몸을 허공에 투신하는 것이다. 때로는 흔적을 남기는 것들도 있고 빈 자리로 남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비백의 헛된 궤적까지도 사랑한다. 그러나 이 군무는 오래가지는 않는다. 석양의 빛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되새떼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다. 화선지 한 장의 너비 때문이다. 붓은 화선지 밖의 세계는 모른다. 붓은 화선지 이면의 세계도 모른다. 붓은 뒤집힌다. 되새떼는 거꾸로 난다. 왼쪽에서 반전하여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내리꽂히다가 다시 솟구친다. 이 모든 것을 일념으로 한다. 이 모든 것이 화선지 한 장의 일이며 우리에겐 오로지 화선지 한 장의 삶만 주어졌을 뿐이다. 한정된 공간과 짧은 순간에 우리는 되새떼처럼 자유를 위하여 몸부림치다 죽는다.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에 대하여 끝없이 반문하다가 어둠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진다.
늑대들이 왔다
피냄새를 맡고
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
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
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
자신의 피인 줄도 모르고
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
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
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늑대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법으로, 날카로운 칼에 동물 피를 발라서 세워 둔다.
ㅡ 늑대들/나희덕
늑대는 왜 울까? 배가 고파서 울까? 하울링은 꼭 배가 고프기 때문에 우는 울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세계의 낯설음, 존재의 외로움 그리고 끝없는 자기 확인의 표현처럼 들린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늑대들은 울지 않는다. 칼날에 묻은 자신의 피를 핥는 늑대들은 울지 않는다. 그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았는가? 소진되면서 더 강렬해지는 욕망,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기 위로와 자기 연민이 바로 우리들 모습 아닌가? 어렸을 때 내 피를 빨아본 적이 있었다. 짭조름했다. 싫지 않았다. 눈물을 맛본 적도 있었다. 짭조름했다. 인생 자체가 짭조름했다.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나도 이제 울지 않는다. 피와 슬픔의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쳐들고 우는 존재의 하울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치대고 매만지고 꽉꽉 힘줘 주무르고
매만지고 주무르고 치대고
마사지를 받는 건 빵 반죽인데
머리가 시원해진다
치대고 매만지고 손끝이 바르르 떨리도록
하염없이 주무르고
무념무상
속속들이 하양
반드르르 매끄러운 반죽 덩어리
튕겨보고 눌러보고
손바닥으로 눌러도 보고
찰진 반죽 덩어리
두근두근, 이것은 실제의 감촉
아, 살의 감촉!
밀가루와 소금과 약간의 설탕과 누룩
그리고 물과 내 팔뚝의 힘!
사람도 만들 수 있을 듯!
누룩 냄새 발그레 피어오르고
ㅡ 반죽의 탄생 / 황인숙
음식을 만든다는 거, 요리를 한다는 거, 그것은 어쩌면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 우리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에너지가 된다는 그런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식재료를 음식으로 만든다는 거, 거기에는 우리의 생명에 대응하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 음식의 가장 근원적 형태가 빵이다. 빵을 빚는 과정이 어쩌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처럼 신비롭다. 만드는 이는 오로지 팔뚝의 힘만으로 빵 반죽을 만지고 치대고 내리누른다. 팔뚝을 통하여 그의 온몸의 무게가 실리고 온 존재의 정성이 전해진다. 이윽고 반죽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말랑말랑하고 탱탱해진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살 속에서 효모의 기운이 생명처럼 불그스레 피어오른다. 사물과의 교감, 아름다운 물활론.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종교는 싹트기 시작한다. 내가 있다면 나에 상응하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빵이 있다면 반드시 빵을 만든 이가 있듯이. 나는 어떤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존재 자체를 사유할 수도 없다. 이 시는 어떤 범신론자가 만유의 신에게 바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기도다.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山거리
旅人宿이 다래나무지팽이와 같이 많다
시냇물이 버러지 소리를 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山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운다
소와 말은 도로 山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 오면 山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人家 근처로 뛰여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츰이면
부헝이가 무거웁게 날러온다
낮이 되면 더 무거웁게 날러가 버린다
山너머 十五里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山비에 축촉이 젖어서 藥물을 받으러 오는 山아이도 있다
아비가 앓는가부다
다래 먹고 앓는가부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ㅡ 山地, 백석
산은 우리에게 시원의 세계다. 우리가 강변에서 농사를 짓기 전에 우리가 뭇 짐승들과 더불어 살았던 곳이다. 강물이 발원하는 곳, 동굴이 있던 곳, 우리가 수렵채취하며 살았던 곳이 바로 산이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도시와 문명을 이루었지만 끊임없이 산을 그리워하고 산을 찾는다. 우리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야생의 삶? 원형으로서의 삶? 훼손되지 않은 삶? 자연 합일의 궁극적 삶을 의미하는 걸까? 그러나 문명에 길든 우리가 산으로 돌아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산은 곧 우리의 이상향이자 실락원이며 절망과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산마을에 살고 싶다. 문명의 변방, 다시 시원의 삶이 시작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소와 말이 절대의 세계로 나아가는 곳, 그러나 그곳은 염소가 된비에 쫓겨 다시 인가로 도망쳐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 염소의 모습은 뒤웅박 차고 싸리신 신고 아버지를 위하여 약숫물을 기르러 온 산소년의 모습을 닮았다. 나도 그런 산마을에 다래나무 지팽이처럼 슬그머니 기대어 살고 싶다.
좋은 시에는 시적 상상력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서사가 있다. 작은 세계가 있다. 그곳으로 통하는 나만의 통로가 있다. 나는 오늘도 시의 숲길을 산책한다. 시의 숲을 걷다보면 대자연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그 맥박과 리듬이 느껴진다. 이 길은 누구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오로지 나 혼자 사유하며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나의 도반이다. 그러나 내 걸음은 더디고 우둔하며 나의 만행(卍行)은 많은 시인들의 그림자밟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삼보일배의 심정으로 성산을 향해 걸을 뿐이지 내 느린 걸음을 굳이 탓하지만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