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예수 –
광우병(狂牛病)은 광인병(狂人病)
몇 년 전 어떤 신학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동물을 사랑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예수는 동물을 사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예수가 자연과 동식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양과 목자, 씨 뿌리는 사람과 밭, 들의 백합과 하는 나는 새의 이미지를 통해 그토록 인상 깊은 가르침을 전할 수 없었으리라.
예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나귀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유심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편안한 멍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30)
그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마태복음 10:16)
이 말에는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심층심리학적 인간 이해, 그리고 유머가 녹아 있다.
이천 년 전에는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동물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 대한 감상주의를 정확하게 구분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끌어 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랑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인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챦다.” (마택복음 12:11~12)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 사람만이 이런 생생한 논증을 전개할 수 있다. 자연이 새로운 동물 종(種)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3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매일 1백여 종의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있다. 저 매력적인 동물과 식물의 세계가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될까? 마술과도 같은 생명의 다채로움을 상실한 인간은 무엇이 될까? 마술과도 같은 생명의 다채로움을 상실한 인간은 무엇이 될까? 생태적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새로운 동물 윤리가 없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정신적 빈곤을 겪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량 사육장에서, 도살장에서, 혹은 운반 차량에서 수많은 동물들에게 자행되는 합법화된 범죄행위다.
동물을 키울 때는 그 동물의 자연스러운 생명에 합당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법에 명시되어 있건만 인간들은 ‘경제적인’사항 강제 운운하며 수많은 동물을 고문하고 살육한다. 대다수 닭, 돼지의 일생은 일어나고 먹고 눕고 죽는 것이 전부다.
동물은 묵묵히 수난을 당하고 인간도 아무 말 없이 이런 상황을 지속시킨다.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후대의 역사가가 ‘교회와 동물보호’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면, 중세의 ‘교회와 마녀화영’과 비견될 만큼 우울한 내용이 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오데르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동물 수송 취급소가 있다. 매달 수천 마리의 말이 여기서 유럽 각국으로 이송된다. 이 말들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트 제국, 폴란드 등에서 오는데 대개는 프랑스에 있는 도살장에 끌려갈 운명이다.
이 말들이 가야 하는 수난의 노정은 프랑스에까지 평균 40시간, 이탈리아까지는 70시간이다- 그 사이에 먹이나 물을 주지 않는다. 특히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서는 많은 말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이렇게 이탈리아에 도착한 말들이 어떤 모습인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적이 있다. 여기저기 골절되고, 곳곳에 상처가 나 있고, 목이 말라 거의 탈진 상태다.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주어야 하는 가? 왜!
이 죽음의 길은 중개업자들에게 재정적으로 큰 이득이 된다. 프랑스에서는 1킬로그램의 ‘생체 중량’에 대한 비용이 폴란드의 두 배다.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 동물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오히려 ‘이득을 보는’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뒤에는 소유욕에 가득 찬 인간이 있다. 동물의 문제는 우리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고기를 먹어 비대해진 바로 우리의 문제다. 동물은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 가축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질병, 즉 인간의 외로움을 경감시켜 준다. - 말은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 병원에 강아지가 찾아가면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 - 돌고래와 만나면 그전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인간의 치유 능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점점 많은 과학자들이 증명하듯이, 동물 사랑은 아주 특별한 치유 능력이다. 그런데 요즘 언론인들은 이런 긍정적인 소식을 활발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정치가나 언론인은 광우병 파동이나 돼지페스트가 터져야 선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다.
고함과 흥분은 대단하다. 1996년 봄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고 “ 19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4백만 마리의 소에게 주저 없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 동물들이 그렇게 떼죽음을 당할 만한 짓을 인간에게 했던가?
소들이 미치는 것은 미친 인간 때문이다. 야채를 먹고사는 동물에게 인간은 육류를 가공한 사료를 먹여 치명적인 해를 입혔다. 이제는 그 동물의 고기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것이다. 자연보호는 당연히 동물에 대한 태도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40)이라는 예수의 말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방의 신학은 억눌리고 고통 당하는 모든 생명을 끌어안는다. 여기에서 물론 동물도 포함된다. 동물의 대량 사육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광기를 직시하고 그것을 통제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광우병을 비롯한 다른 파동들을 겪어야 하는가/ 동물도 인간으 생명권과는 별도의 생명권과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대량사육은 죄악
산상설교의 핵심 말씀으로 그 유명한 ‘황금률黃金律’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마태복음 7:12)
우리는 이 황금률을 동물들이 당하는 집단적 비극의 맥락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의 생각을 이해하고, 동물과 함께 느껴보려고 함으로써 동물에게 무엇이 불쾌하고 무엇이 좋은지를 동물의 입장에서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이런 간단한 실험을 할 수 있다. 자 여기에 내 암탉이 있다. 만일 이 암탉이 닭장에 있을 건지 밖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건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고를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행동과학자들은 동물에게 놀이 본능과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 자연과학의 인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윤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오이겐 드레버만은 이렇게 말한다.
“동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늘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추측건대 기독교적 희망의 핵심은 그 범위를 넓혀 기독교적 전통으로 고수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승의 운명을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하나의 주제로 대하는 종교만이 정치적 유효성의 영역에서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예수의 산상설교에 토대를 둔 교회보다 평화운동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예수의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데 나서는 것처럼, 동물보호단체는 생태적 예수의 정신으로 교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동물이 고통 당하는 데 맞서 싸우고 있다.
예수의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정신에 기초한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래도 교회 안보다는 밖에 있는 것 같다. 교회가 평화운동가, 생태운동가, 동물보호운동가의 공동체가 될 때 진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핵심은 그런 미래지향적 공동체를 통해 형상화된다.
우리 딸 카렌은 잠자러 가기 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양이한테, 오늘은 밖에서 자도 되는 지 물어봐주세요.”
우리 집 고양이는 매번 아주 분명한 ‘의사표시’를 한다. 어떤 때는 “좋아”, 어떤 때는 “싫어”다. 여름에는 좋아, 겨울에는 싫어!
“남이 나에게 안 했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독일 격언의 황금률인 이 말은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동물의 관계를 위한 중요한 암시를 준다. 예수를 비롯하여 윤리의 대가들은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고 가르쳤다. 사랑은 모든 생명을 포괄한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마음씨, 관용, 연민, 평화의 실현에 나서도록 하는 종교가 진실하고 쓸모 있는 종교라고 말한다. 인간 사이의 보편적 미덕은 그것을 동물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때 더 큰 의미를 띄게 된다.
그렇다면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말라미틀어진 식물, 목말라 괴로워하는 동물에게 물을 주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한 번쯤 개나 고양이를 안고 사랑과 신뢰에 가득 찬 마음으로 그 동물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자신의 가슴에 어떤 미동은 느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간의 신비로운 교감을 맛보게 된다.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의사소통에 대한 연구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난 15년간 아주 놀라운 사실, 여태껏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언론인 라이너 홀베는 (동료 피조물 – 동물과 식물의 신비한 능력)이라는 저서에서 놀라운 자료들을 공개했다. 다그니 케르너와 임레 케르너도 (장미의 외침)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내용을 소개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미 50년 전에 인간과 동물, 식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미지의 의사소통 가능성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지각 능력 이면에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말이나 개, 고양이를 사랑하며 키우는 사람들, 동물을 사랑하는 농부들, 심지어 꽃이나 식물을 잘 가꾸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추측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식물도 슬픔을 느끼고 동물에게도 눈물이 있다. 이런 발견에 상응하는 윤리가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인간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면서 동물을 단순한 자원으로 취급한다. 동물을 철저하게 착취하는 데 종교가 얼마나 치명적으로 관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어느 연구단체에서 1996년에 발표한 ( 생명공학과 유전자공학의 미래)라는 문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생명 및 유전자공학의 윤리적 타당성은 성서의 명령, 즉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개간하여 뭔가를 만들어 내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가져다가 조형하도록 허가한 창조 명령이다.”
교회 그리고 교회와 가장 가까운 정당의 창조 윤리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가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동물을 괴롭히고 식물의 생존권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사실이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법률적으로 말해, 법치국가에서는 모든 법의 핵심이 약자 존중법이다. 이 기본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곳은 법치국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침해할 수 없다”고 기본법에 나와 있다. 그렇다면 동물의 존엄성은 어떤가? 생태적 예수는 동물도 하늘 아버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독일 헌법 20a조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기초 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20b조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물도 동료 피조물로 존중되어야 한다. 동물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 고유의 생명에 그스르는 처우,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헤센주에 있는 개신교 교회연합회의 활동단체 ‘교회와 동물’은 1996년 아주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가축의 대량 사육은 죄악이다”
이 단에는 동물의 생존권을 강조하며, 동물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므로 학대당한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활동은 아직까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울타리 안에서 ‘창조질서의 보존’이나 ‘자연’에 대한 논의는 아주 흔하고,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단호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구체적인 실천에 나서는 사람만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적대자들을 향햐여 “저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며 거듭거듭 비판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로마서 8:21).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 세상을 그렸다(이사야 11:6). 예수는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햇다(마가복음 16:15)
예수의 복음은 동물도 포함한다. 물론 동물들은 경건한 설교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나 도와주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손길은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교는 행동을 의미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명에 대한 외경’, 마나가 “ 나는 살고자하는 생명이며, 역시 살고자 하는 다른 생명에 둘러싸여 있다”는 그의 실용적 인식은 우리게게 귀감이 된다. 인간의 권리, 감정, 존엄성은 동물의 권리, 감정, 존엄성과 그 격차를 줄여나가야 할 것이며, 또 그럴 수 있다. 독일 – 프랑스계 ‘밀림의 의사’ 였던 슈바이처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말한 것을 실천하고, 실천할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알자스 지방의 귄스바흐에 있는 슈바이처의 집을 자주 찾는다. 거기서 며칠 있다 보면 슈바이처는 결국 우리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슈바이처는 말 그대로 파리 한 마리, 꽃 한송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조심성 없는 사람은 무심코 딱정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일 수 있지만, 이 세상의 박사들을 모두 모아놓고도 그 딱정벌레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동물보호’라는 석연치 않는 주제를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전통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신학은 그 시대의 정점에 서지 못하고, 생태적 예수 이전으로 퇴보해버렸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동물보호단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동물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는가?
이탈리아, 독일,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칸니다비아, 네델란드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수많은 동물보호단체가 결성되었다. 어떤 단체가 발행한 소책자에서 나는 이런 대목을 읽게 되었다.
“수천 마리의 동물이 크고 작은 서커스단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수십만 마리의 동물이 동물원이라는 이름의 사육장에서 자유를 빼앗긴 채 사람들의 눈요기가 되고,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평생 사육용 우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저주스러운 운명에 처한다. 젖소는 사슬에 매여 칸막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돼지는 끈에 묶여 질질 끌려 다닌다. 우리는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화학공장의 거대한 실험실에 보내 이 세상의 모든 병균을 투입한다. 해부도를 벽에 걸어놓고, 무슨 비밀결사단체의 처형반이나 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대량 도살을 자연보호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여기고 수긍하는 꼴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거기에 관한 글을 쓰고, 반대운동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윤리학계는, 우리가 어떻게 동물을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론체계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동물 윤리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생명체는 모두 친척뻘이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아버지는 한 분인데 곧 하나님이며, 모두 한 어머니인 물질 Matter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창조의 월계관을 자임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친척관계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 이성이라는 전무후무한 도구를 선물로 받았는데도 말이다.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
마침내 이성을 회복한 이성이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생태위기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고. 동물과 식물에 혼이 깃들어 있으며 예민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연과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을 좀더 아끼고 보호할 수 있다.
예수가 들려준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하나됨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 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으면, 그는 아흔아홉마리를 산에다 남겨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마리 양울 두고 더 기뻐할 거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 18:12~14, 누가복음 15:4~7)
동물과 인간은 비슷하다. 우리는 친척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어째서 이 엄격한 사실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일까? 프랑크 푸르트대학 가톨릭신학부 조교인 귀도 크노에르체르의 주장에 따르먄, 그것은 아마도 “ 그 불편한 주제를 건드리면 신학교에서 강의 자리를 얻을 수 없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수치스러운 침묵은 전체 피조 세계를 자유롭게 하라는 신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전 세계의 다른 종과 맞서는 상황 – 이것이 예수 이후 이천 년, 말로만 예수를 들먹이는 기독교 신학의 절망스러운 수준이다. 그 신학에 따르면 닭, 소, 토끼는 인간에게 이용되고 인간의 먹이가 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목초지는 시멘트로 뒤덮이는 것이, 숲은 –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 죽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격리된 인간은 동물에 대해서도 전혀 연민을 느끼지 못하며 동물의 감정을 존중하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 사이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보지 못하며, 동물도 혼이 있는 존재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반박한다. 그들은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로 보고 이런 생각에 걸맞게 다룬다.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잠시 동물의 눈을 들여다보라.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물도 그 눈이 영혼을 표현한다. 물론 우리는 동물이 ‘무엇 what’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동물에게 느낌이 있다는 ‘사실that’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가족들은 그것을 우리 집 토끼의 죽음을 통해서 경험했다. 우리 집에서 사는 여러 동물 가운데 하나가 죽자 ‘남겨진’ 동물들은 슬픔을 드러냈다.
동물 안에서 꿈꾸는 하나님
행동과학, 두뇌심리학, 문화인류학, 진화사의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자매형제인 동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무척 많다. 오이겐 드레버만은 말한다.
“우리 두뇌 사이의 층에는 포유동물 진화의 2억 5천만 년에 걸쳐 형성된 메아리가 있다. 그 메아리가 없다면, 전쟁이나 범죄와 같은 인간 실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이나 자녀 양육과 같은 아주 강력한 공동체적 요소는 해명이 불가능하다.”
히브리 성사, 특히 시편과 아가서와 솔로몬의 잠언과 욥기는 생태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본문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 또한 이런 본문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매우 신비주의적이고 페미니즘적이며, 생태적이고 에로틱하며, 창조적인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본문의 일부는 모신母神을 숭배하는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태적이고 여성적인 영감을 함축한 글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교회 가부장제의 사고와 맞지 않는다.
남성 위주의 교회가 신비주의, 생태주의, 동물과 식물을 교회 밖으로 몰아낸 것은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도 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환경위기, 청소년 범죄, 대량실업, 경제 불안의 근본 원인이다. 매튜 팍스는 말한다.
“신비적인 것을 축출하는 문명은 아예 문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문명은 청소년과 예술가들에게 아무런 희망과 모험을 주지 못한다. 희생할 가치가 있는 도전도 기쁨을 주지 못한다. 이런 문명은 대중에게 축제와 안식일, 생생한 제의, 심오한 치유를 제공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이런 문명에서는 중독이 만연한다. 마약 중독, 범죄 중독, 알코올 중독, 소비 중독, 군국주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아직도 교회 안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일요일 설교 시간에나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 빙겐의 힐데가르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네스 타울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에 대해 언급하는 정도다.
계몽주의 이후 이성의 독재는 종교와 신비주의를 일종의 공기로 치부했다. 기독교 교회도 지금으로부터 6백년 전 위대한 신비주의자 미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금지했고 아직까지도 복권시키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되고 1백 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사제 또는 목사)에게 “영혼”이라는 말은 거의 참을 수 없는 외래어다. 인간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동물의 영혼이란 더더욱 낯선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체험이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즉 동물과 식물 속에서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어느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은 별 속에서 주무시고 식물 속에서 향기를 발하시며 동물 속에서 꿈꾸시고 우리 인간 속에서 깨어나시려 하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러한 범재신론panentheism. 萬有內在神論은 – 지금까지 말한 것에 근거하여 확언하건대 – 미래를 지탱해나갈 종교의 근간이다. 범재신론의 깊은 경험은 생태주의적 경험이다.
경외와 경탄은 지혜의 시작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 신비주의란 경외심을 가지고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회’의 윤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문화, 정신의 차원에서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며,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필요하다.
동물보호는 곧 인간보호
“윤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 무한히 확장된 책임이다” 는 슈바이처의 말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는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
병아리 두 마리 가운데 하나는 성별 때문에 곧장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진다. 우리는 칠면조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정도로 사료를 먹이고 닭은 30일 동안 포식시킨 다음에 도살장으로 보낸다. 유럽 농업의 비극은 ‘광우병’이 아니라 인간의 광기 어린 일상이다.
가축을 대량 사육하고, 사료를 수입하고, 잉여생산을 부추기고, 동물을 학대하는 인간의 광기가 결국은 광우병 같은 재난을 초래했다. 광우병 사태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될 수 있다. 영국에서 쇠고기 수출을 금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1989년까지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동물 제분이 6천 톤 넘게 네델란드와 독일로 수출되어 가금류와 돼지, 소 사육에 사용되었다. 이 동물들은 미리 도살되었기 때문에 광우병 같은 병으로 죽지는 않은 상태에서 식료품으로 가공되었다. 동물보호는 인간보호이기도 하다. 인간이 짐승에게 잔인하다면 사람에게도 친절할 수 없다.
육식을 많이 하면 우리의 뇌가 무뎌진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투견장에 가보라. 짐승같은 인간은 두 마리의 투견이 서로 물고 뜯어 결국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을 때까지 싸움을 부추긴다. ‘승자’에게 관중의 환호가 쏟아진다. 투견장은 엄청난 돈이 오고 가는 도박장이다. 판돈으 액수는 10만 마르크에 달한다. ‘승자’에게는 상당 금액의 특별수당이 지급되고, 패자는 다른 ‘신실한 친구’를 조달한다.
독일의 대학은 곤충, 갑각류, 들쥐말고도 비둘기, 토끼, 개, 심지어는 말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수년에 걸친 반대와 법정공방이 있었지만 개구리는 여전히 생물 및 의학 수업의 단골 전시품이다.
인간은 중추신경의 기능을 보기 위해 마취도 하지 않은 살아 있는 동물의 머리 윗부분을 자르고 척추에 구멍을 뚫는다. 실험이 끝난 뒤 토막토막 난 동물의 몸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깨인 사람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변명은 과학이란 원래 이런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동물 사랑은 감상적이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깨인 사람들의 몽매함은 양심을 저버렸다. 뮌헨 동물보호아카데미의 로만 콜라와 같은 대안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끔찍한 동물학대는 무책임한 것일뿐더러 불필요한 것이다.
모든 대학생이 근육반사 실험 같은 것은 자신의 팔과 무릎으로 직접 실험해보아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또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동물실험을 대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벌써 몇 년 전에 마르부르크의 필립스대학 연구진은 이런 대안적 방법으로도 충분히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동물 소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다른 대학도 마르부르크의 모범을 따라 연이은 성과를 거두었다. 1996년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실험을 목적으로 10만 마리가 넘는 동물이 독일의 대학에서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동물이 기술과 과학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같은 운명이 처한다. 독일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176만 마리의 동물이 이런 방식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동물보호단체는 매년 1천만 마리가 그렇게 죽어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규모 동물학대의 현장을 텔레비전으로 방송한다면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돌릴 것이다.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다’ 는 전화가 빗발칠 것이다. 이런 반응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지만 동물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번째 변명은 “그래도 고기는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시지가 맛있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 고기의 성분과 출신을 물어야 한다. 소비자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 우리의 책임은 고기 구입에서 시작하여 고기 소비의 감소로, 종국에는 차기 지방선거, 주 의회 선거, 연방의회 선거의 기표소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미 대안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고기를 살 때마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소, 돼지, 양 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욕구에 상응하는 삶을 살았을까?” “ 이 동물을 키운 농부는 선한 목자였을까?” “ 도살장에서도 동물의 존엄성이 존중되었는가?”
바이오 농부는 이런 물음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질병의 절반은 음식과 관련이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1920년대에 생태적 농경,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가축 사육, 건강한 먹을 거리 생산의 토대를 정립했다. 1923년 1월 13일 루돌프 슈타이너는, 지금 우리의 시점에서 볼 때 매우 예언적인 말을 남겼다.
‘소에게 고기를 먹이는 사람은 소를 미치게 만든다.”
1996년에 광우병으로 죽은 16만 마리의 영국 소 가운데 바이오 농부가 키운 소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는 사실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생태적 농경의 원칙은 육류찌꺼기를 소 사료로 사용하는 것을 원척적으로 금지한다. 생태적 농경이 동물을 그 본성에 맞게 사육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동물은 원래 주인의 농장에서 키우거나, 다른 생태적 농장에게 데려와 키운다. 먹이는 주로 그 농장의 들판에서 나는 식물이다. 대량 사육이나 원거리 이송은 하지 않는다.
동물은 혼이 깃든 생명체다. 필요할 때 부리다가, 필요 없으면 소각장으로 보내는 애물단지가 아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종교와 윤리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동물에게도 영혼과 존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동물에게 하는 행위가 결국에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동물에게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을 우겨넣으면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그 물질을 고스란히 섭취하게 된다.
모든 생명, 모든 음식에는 영적인 에너지가 스며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변질시키면 결국 우리 자신이 변질된다. 윤리란 나눌 수 없으며,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생태적 예수가 가르친 것 가르친 것 가운데서도 핵심적 위치에 있다.
독일에서 동물보호운동은 1970~80년대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거북 수프, 표범 모피, 상아 세공품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동물을 불법으로 운송하는 자들이 적발되었고 보호 동물을 매매하던 파렴치한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동물보호를 둘러싼 노력은 다시 잦아들었다. 호르스트 슈테른은 “지쳐 쓰러진 진리”라는 표현을 썼다. 진리가 지쳐 쓰러지면 무관심이 자라난다. 예수도 말했지만, 오직 진리만이 – 그것이 편안한 것이든 불편한 것이든 –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의 처지에 대한 진리, 유럽 농업의 무자비한 대량 사육에 대한 진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동물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할 것이낙?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다.
“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적다고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서양의 철학사와 종교사에서 동물에 대한 윤리 부분은 불교 문화권과는 대조적으로 – 지금까지도 커다란 맹점 가운데 하나다.
이제 이 어두운 구석에도 빛을 비추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물의 영혼은 영원한 존재와 무관하다”는 부끄러운 말을 남겼다.
모든 동물은 가깝거나 먼 우리의 친척이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우리는 한참 후배다. 인간은 나이로 볼 때 훨씬 위인 동물과 식물의 세계를 딛고 서 있는 셈이다.
언제쯤 이런 이런 깨달음을 기반으로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유럽이나 미국사람들처럼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면 1 헥타르의 땅을 이용하여 열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서 북아메리카 시민들이 고기 섭취를 10%만 줄이면 지금 굶주리고 있는 6천만 명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기 소비를 10%줄이면 미국인이나 유럽인의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할 사람은 이제 없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성인 베네딕투스는 지나치게 고기를 좋아하는 사회는 언젠가 거대한 정신병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식품영양학자요 의사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막스 오토 브루커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모든 질병의 절반은 음식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를 통해서 독일인들은 프랑스인과 폴란드인, 이탈리아인과 터키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며 서로 죽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21세기에는 동물도 감정을 지닌 생명체로서 고유의 존엄성과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것을 알고 있다. 인간과 동물은 창조질서 안에서 한 자매형제다. 현대 생물학은 동물과 인간의 구체적 연관성을 이미 오래전에 밝혀냈다.
과도한 고기 섭취를 극복하면 영적인 각성이 뒤를 잇는다. 우리의 영혼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다른 모든 힘보다 몇배나 뛰어난 슈퍼파워다. 영혼을 담아 하는 일은 이 아름다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과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생태적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가복음 8:36)
이 말씀에 대한 옛날 독일어 번역은 훨씬 대중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었지만 그 영혼에 해가 되었다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우리가 동물의 영혼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영혼에 해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맣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요즘 같은 생태적 위기와 정신적 곤경의 시대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고살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생태적 예수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사상가, 어떤 예술가나 정치가, 어떤 문화도 예수가 제시한 해결책보다 나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비현실적인 인간관과 세계관 때문에 죄초한 옛 사회주의의 정치적 파산 이후에는 나사렛 청년의 생태적 휴머니즘이 행복한 21세기를 위한 가장 인간적인 비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생태적 예수의 기쁜 소식을 행복한 미래를 위한 선언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출발 여건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식물과 동물이 멸종하면서 우리 인간과 지구는 점점 빈곤해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와 문명을 잃어가고 있다.
대책 없는 종족 이기주의는 – 지금도 매일 24만 명의 인간이 태어나고 있다 – 다양한 식물과 동물의 세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위협이 된다.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척도다.
힌두교와 불교는 동물의 불명성을 인정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그렇지 않다. 이 세 개의 유신론은 자기네 전통을 중시한다.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는 예수의 생명사상과는 무관하다.
기독교의 ‘구원자’가 오직 인간만을 위해 죽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는 아주 골치 아픈 질문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풍성함”(로베르트)혹은 식물-동물-인간이라는 진화의 발전(생물학자 요아힘 일리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류에 적합한 종교성의 범주가 되지 않았던가?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윤리적 차원이 없다면 어떻게 이 지구의 비밀을 예감하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동물과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의 하나됨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는가? 우리는 지능이 높은 대우주 안에서 동물이나 식물과 공생하는 것 아닌가? 태양도 생각을 한다고, 태양에게도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우리가 새로운 세기에 배워야 할 우주적 깨달음은 우리의 인간관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까지 뒤엎어놓을 것이다. 우주와 우주의 지능에 대해서 우리도 조금은 알고 잇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동물이나 식물의 관심이 ‘무의식적이고’ ‘열등하다’는 추측에 근거하여 동식물을 무가치한 존재로 깍아내릴 수는 없다. 과연 어린이나 갓난아기의 관심 수준이 ‘무의식적’이라고 해서 보호를 덜 받아도 되는 것인지, 기독교 도덕은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1795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피조물들이 독재자의 손아귀에 억류되어 있던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