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戱子由희자유<아우 자유를 위해>
蘇軾소식
宛丘先生長如丘 완구선생장여구
宛丘學舍小如舟 완구학사소여주
常時低頭誦經史 상시저두송경사
忽然欠伸屋打頭 홀연흠신옥타두
斜風吹帷雨注面 사풍취유우주면
先生不愧旁人羞 선생불괴방인수
任從飽死笑方朔 임종포사소방삭
肯爲雨立求秦憂 긍위우립구진우
眼前勃蹊何足道 안전발혜하족도
處置六鑿須天游 처치육착수천유
讀書萬卷不讀律 독서만권부독률
致君堯舜知無術 친군요순지무술
勸農冠蓋鬧如雲 권농관개요여운
送老齏鹽甘似蜜 송로제염감사밀
門前萬事不挂眼 문전만사불괘안
頭雖長低氣不屈 두수장저기불굴
餘杭別駕無功勞 여항별가무공로
畵堂五丈容旗旄 화당오장용기모
重樓跨空雨聲遠 중루과공우성원
屋多人少風騷騷 옥다인소풍소소
平生所慚今不耻 평소소참금불치
坐對疲氓更鞭棰 좌대피맹경편추
道逢陽虎呼與言 도봉양호호여언
心知其非口諾唯 심지기비구낙유
居高志下眞何益 거고지하진하익
氣節消縮今無幾 기절소축금무기
文章小技安足程 문장소기안족정
先生別駕舊齊名 선생별가구제명
如今衰老俱無用 여금쇠로구무용
付與時人分重輕 부여시인분중경
완구선생 키가 커서 작은 산만 한데
진주 학사 쪽배처럼 조그마해서
언제나 고개 숙이고 경사서를 읽다가
아뿔싸 기지개 켜다 천정에 머리 찧네
바람이 비껴 불어 비가 장막 안으로 들이쳐도
선생은 태연한데 옆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네
배 터지게 사는 키 작은 이 동방삭을 비웃어도
빗 속에 선 군인 되지 키 작은 노래꾼 되겠는가
눈앞에 다툼이야 말할 것도 없어서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문 채 천상에서 노니네
읽은 책이 만 권이지만 법률 같은 건 읽지 않아
임금 도와 요순 만들 재주 없는 것을 아네
벼슬아치들 갓과 수레 구름처럼 성대해도
늙은이에게는 나물과 소금이 꿀맛과 같네
문 앞에서 일어난 일 눈에 담아두지 않고
고개 숙이고 살면서도 기개만은 안 굽히네
여항별가 작은 벼슬로 이룬 공도 없으면서
오장기 들어가는 단청집에 살다 보니
하늘에 걸린 이층집 빗소리마저 아련하고
집 많고 사람 적어 바람소리 쓸쓸하네
내 평생의 부끄러움 지금 사람 부끄러운지 모르지만
가난한 백성들 채찍과 곤장으로 겁박했네
길 가다 양호 만나 불러 말을 해보지만
속으로는 안 그러면서 입으로만 맞장구치네
지위 높고 뜻 낮으면 무슨 이익 있으리
기개와 절개 줄고 졸아 남은 것이 별로 없네
문장 같은 잔기술 쳐주지도 않겠지만
완구선생 동파거사 이름 나란했었네
지금은 늙어가며 모두 쓰임 없으나
사람들에게 맡겨서 경중 가려봐야겠네
▶ 宛丘(완구): 진주陳州 별칭. 소철蘇轍이 이때 진주의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 學舍小如舟(학사소여주): 학사學舍가 좁고 누추한 것을 가리킨다.
▶ 經史(경사): 경전과 사서
▶ 欠伸(흠신): 피곤할 때 몸을 늘려 기지개를 켜는 것을 가리킨다.
▶ 任從(임종): 맡기다. 듣다. 순종하다.
▶ 方朔(방삭): 한나라 때 사람 동방삭東方朔을 가리킨다. 《한서漢書·동방삭전東方朔傳》에서 그가 무제武帝에게 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데, ‘朱儒長三尺餘, 奉一囊粟, 錢二百四十. 臣朔長九尺餘, 亦奉一囊粟, 錢二百四十. 朱儒飽欲死, 臣朔飢欲死(주유는 키가 세 자 남짓하지만 녹봉은 곡식 한 가마에 이백사십 전을 받습니다. 신 동방삭은 키가 아홉 자를 넘는데도 녹봉은 역시 곡식 한 가마와 이백사십 전을 받습니다. 주유는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고 신은 배가 고파 죽을 형편입니다)’라고 하면서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한 내용이다.
▶ 秦憂(진우): 진시황秦始皇의 가동歌童이었던 우전憂旃을 가리킨다. 그도 역시 키가 작았다. 궁에서 진시황의 주연이 끝났을 때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호위병들이 모두 지쳐 있었다. 우전을 그들을 안쓰럽게 여겨 황제에게 만세를 연호할 때 난간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호위병을 불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키가 크지만 비가 와도 서 있는데 그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나는 키가 작아도 비가 내리면 이렇게 편히 쉬는데.” 그 말을 듣고 진시황은 호위병들이 반반씩 쉴 수 있게 했다. 《사기史記·골계열전滑稽列傳》에 실린 이야기이다. 키가 작은 것은 같지만 상대에 대한 태도는 주유와 우전이 같지 않다.
▶ 勃豀(발혜): 언쟁하다. 다투다. 싸우다. ‘勃溪’로 쓴 자료도 있다. ‘溪’는 ‘豀’의 이형동의자異形同意字이기도 하다.
▶ 六鑿(육착): 귀, 눈 등 얼굴에 있는 여섯 구멍을 말하기도 하고, 희로애락애오喜怒哀樂愛惡의 육정六情을 이르기도 한다.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서 ‘胞有重閬, 心有天游, 室無空虛, 則婦姑勃溪; 心無天游則六鑿相攘(배에도 빈 곳이 있고 마음에도 빈 데가 있어 자연의 자적함이 있는데 집에 빈 곳이 없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게 된다. 그렇듯이 마음에 자적함이 없으면 육정이 서로 다투게 된다)’라고 했다. 불교적으로 보면 육근六根으로 읽지 못할 것도 없겠다.
▶ 天游(천유): 자연에 맡기다.
▶ 律(율): 법률을 가리킨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소식은 필화를 겪었다. 두보杜甫는 「奉贈韋左丞丈二十二韵」이란 시에서 ‘致君堯舜上, 再使風俗淳(임금 도와 요순보다 위에 가고 하고 / 풍속도 또 다시 도탑게 하려 했네)’라고 읊었다.
▶ 勸農(권농): 지방의 농지와 수리, 세금, 부역 등을 살피도록 조정에서 파견하는 관리
▶ 冠蓋如雲(관개여운): 원래는 관리들이 입는 옷을 가리켰으나 나중에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冠’과 ‘蓋’는 각각 관모官帽와 수레의 차양을 가리키고, ‘如雲’은 성대한 것을 가리킨다.
▶ 送老(송로): 노년을 보내다.
▶ 齏(제): (생강, 부추, 마늘 등을) 잘게 빻아서 만든 양념. 한유韓愈는 「送窮」이란 글에서 ‘太學四年, 朝薺暮鹽(태학에 있던 4년 동안 아침에는 나물을 저녁에는 소금을 씹으며 살았다)’이라고 하며 학관으로 지낼 때의 청빈한 삶을 회고하였다. 시에서는 ‘甘似蜜’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생스러움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餘杭別駕(여항별가): 여항餘杭은 항주杭州를 나타낸다. 이때 소식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餘杭別駕’라고 칭한 것이다.
▶ 旗旄(기모): 야크의 꼬리를 막대 끝에 단 깃발로 장군이 있는 곳에 세운다. 자기가 지내는 곳이 아우가 지내는 곳에 비해 화려하고 크고 넓은 것을 대조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疲氓(피맹): 가난하게 사는 백성
▶ 鞭棰(편추): 채찍. 채찍질하다. 통제하다. 독촉하다. 정복하다. ‘鞭箠’로 쓴 자료도 있다.
▶ 陽虎(양호): 인명.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양화陽貨를 가리킨다. 공자는 그를 바르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 諾唯(낙유): 대답하다. 고분고분하다. 이 구절은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말로만 ‘알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 伎(기): 기녀를 뜻하는 ‘妓’와 같다. 양웅揚雄은 시부詩賦에 대해 ‘彫蟲小技, 壯夫不爲(벌레를 새기는 작은 재주라 장부는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 程(정): 고려하다. 계획하다. 계산하다. ‘安足程’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는 ‘쳐줄 게 무엇인가’ 정도의 뜻을 갖는다.
▶ 衰老(쇠로): 이때 소식과 소철의 나이 각각 서른여섯과 서른셋이었으므로 ‘衰老’라고 한 것은 분한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희령熙寧 4년(1071) 항주杭州에서 지은 것이다.
이때 소식의 아우 소철蘇轍은 완구宛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진주陳州에서
학관學官, 즉 오늘날의 교관으로敎官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그 고생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제목에 ‘戱’자를 쓰고 있지만 아우 소철을 위로하는 뜻으로 시를 지었을 것인데
시의 후반에는 시인 자신의 자조와 불만의 소리를 늘어놓았고
특히 끝 네 구절에서는 쓰임이 없는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소식은 결국 이 작품 속에 나오는 ‘讀書萬卷不讀律’이라는 구절 때문에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필화사건을 겪으며 백 일 넘게 투옥되기도 했다.
법보다 위에 두어야 할 것으로 요순시대의 태평한 시대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반대당에서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소식의 뜻으로 해석한 때문이었다.
‘오대시안’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배경이라 하면서도
자료들이 모두 ‘독서만권부독률’이라는 한 구절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 구절이 들어있는 작품 전체를 읽어보고 싶었다.
◈ 소식蘇軾 [1037~1101]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 서화가로 자는 자첨子瞻과 화중和仲,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미주眉州 미산眉山(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사람이다. 그는 문학에서 시와 사, 부와 산문 등 모든 분야에서 고른 성취를 보였으며 서법과 회화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중국문학예술사상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걸출한 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산문에서는 구양수歐陽脩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구소歐蘇로, 시詩에서는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사詞에서는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소신蘇辛으로 불렸고, 서법에서는 황정견, 미불米芾, 채양蔡襄과 함께 북송사대서법가라는 의미의 송사가宋四家로 꼽혔으며, 그림에서는 호주화파湖州畵派의 개창자가 되었다.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삼부자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글이 명대明代와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과거科擧의 제목으로 채용되는 때가 많아서 사람들이 ‘蘇文熟, 喫羊肉, 蘇文生, 喫菜羹(소식의 문장에 익숙하면 양고기를 먹고, 소식의 문장에 서툴면 나물국이나 먹게 된다)’라고까지 하였다. 시문집만 해도 《동파칠집東坡七集》, 《동파집東坡集》, 《동파사東坡詞》 등이 있는데, 시가 2700여 수, 사가 300여 수에 이를 뿐만 아니라 다량의 산문을 함께 남겼다.
◈ 소철蘇轍 [1039~1112]
자는 자유子由와 동숙同叔을 썼고, 만년에는 영빈유로穎濱遺老를 자호로 삼았다. 미주眉州 미산眉山(지금의 스촨성四川省 미산시眉山市) 사람이다.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식蘇軾의 동생이다. 가우嘉祐 2년(1057) 형 소식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하였다. 삼부자가 함께 당송팔대가의 반열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이들 세 사람을 부를 때는 ‘삼소三蘇’로, 소철만을 부를 때는 ‘소소小蘇’라고 하였다. 《난성집欒城集》, 《후집後集》, 《삼집三集》 등이 전한다. 사후에 문정文定이란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