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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이 남긴 절명시
사육신이 남긴 절명시
명분 없는 계유정난
조선 7대 왕 수양대군 세조만큼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증오를 산 임금은 없을 것이다.
자기 친형 문종의 아들, 곧 어린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그것도 모자란 유배를 보내고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극악함에 세상을 경악시켰던 것이다. 당대에는 백성들이 그를 저주했고, 후대에는 사림들이 그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유교 윤리가 지배했던 조선시대 내내 수양은 비록 왕이기는 했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폐륜과 살인을 저지른 인간말종으로 취급받았다. 어진 임금 세종에게서 어찌 저런 무도한 아들이 태어났나 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였다.
병약한 문종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6대 단종이 즉위했을 때는 겨우 12세였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수양은 권람·한명회 같은 인물을 포섭, 백성들에게 추앙받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를 1453년 10월 무사들을 이끌고 집으로 쳐들어가 살해한 데 이어,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한명회의 살생부를 들고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 반대파 중신들을 궐문에서 모조리 철퇴로 쳐죽였다.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금성대군이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둘 다 유배 보낸 후 이내 사약을 내려 죽이는 폐륜을 서슴지 않았다. 자기의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배다른 아우 방석, 방번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지만, 자기 친형 방과만은 끝까지 죽이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다. 그리고 어떤 일에 임해서도 명분을 앞세워 행동했다.
그러나 수양의 행위에는 그런 명분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없었고, 오로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칼과 모략만 있었을 뿐이다.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퇴출시키고 끝내 목숨까지 빼앗은 것에 어떤 명분이 가당할까.
이에 맞선 가장 대표적인 저항이 사육신이었지만, 실기와 밀고로 실패하고, 사육신을 비롯한 70여 명이 세조의 잔인한 처벌에 희생되었다. 또한 그들의 처와 자식을 포함해 3족이 멸문되는 비극을 겪었다.
세조는 사육신을 직접 신문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으나, 어느 한 사람도 절의를 꺾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과 절명시들을 모아보았다.
성삼문(成三問) 태종 18(1418)∼세조 2(1456)
세조의 친국(왕의 직접 신문) 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다.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는가?”
“옛 임금을 복귀시키려 했을 뿐이오.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면 어째서 내가 왕위를 받을 때 막지 않고, 나에게 붙었다가 이제야 배반한단 말이냐?”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소. 물러나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상왕을 복위한다면서 사실은 제 잇속을 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상왕이 계신데 나리(왕자에 대한 호칭)가 어찌 나를 신(臣)으로 할 수 있겠소. 나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믿지 못하겠거든 내 집을 몰수해서 조사해보시오.”
분노한 세조는 형리들을 시켜 달군 쇠꼬챙이로 삼문의 팔과 다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삼문은 낯빛 하나 변치 않고, “나리의 형벌은 참혹합니다그려” 하고는 세조 옆에 서 있는 신숙주를 보고 일갈했다.
“나와 네가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英陵/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대들이 이 아이를 보호해달라’시던 간곡한 말씀이 아직 내 귓전에 쟁쟁한데, 너만 까맣게 잊었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 극악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신숙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이어 시·서·화에 능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던 제학 강희안이 삼문과 친했다는 이유로 끌려와 고문받았으나 불복하므로, 세조가 삼문에게 관련 여부를 물었다.
“선조(先朝)의 명사들은 나리가 다 죽이고 남은 이가 이 사람뿐이오.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남겨두어 쓰는 것이 좋을 것이오.”
삼문의 이 한마디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했다.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삼문은 마지막 길 떠나는 것을 보러 나온 동료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섬겨 태평성세를 이룩하게.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다.”
형장에서 희광이(망나니)의 칼이 떨어지기 전에 삼문이 읊은 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울리는 저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擊鼓催人命)
돌아보니 해는 서산에 걸렸구나(回頭日欲斜)
저승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黃泉無客店)
오늘밤에는 뉘 집에서 묵었다 가리(今夜宿誰家)
죽은 후 그의 가산을 몰수해 보니, 과연 세조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두었으며, 자기 방에는 거적을 깔았을 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성삼문은 평소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늘상 떠돌아다니며 맺힌 데가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범접할 수 없는 서릿발 같은 기개를 지닌 사람이었다. 세조 역시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다”고 토로했다 한다.
삼문은 학문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해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원을 위해 노력하여, 그가 대역죄로 죽은 지 130여 년 만인 1691년(숙종 17)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장릉(단종의 능) 충신단,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 의절사(義節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2. 서울 노량진 의절사.(사진/문화재청)
박팽년(朴彭年) 태종 17(1417)∼세조 2(1456)
팽년이 세조에게 친국을 당할 때 줄곧 ‘나리(왕자에 대한 호칭)’라고 세조를 불렀다. 노한 세조가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했는데, 지금에 와서 부정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윽박질렀다.
팽년이 대꾸하기를,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지 나리의 신하는 아니오. 충청감사로 있을 때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소” 했다. 세조가 그의 장계를 다시 살펴보니 ‘신’자를 쓸 곳에 ‘거(巨)’가 씌어 있었다. 분노한 세조가 더욱 심한 고문을 가하는 바람에 거사일 엿새 만인 1456년 6월 7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거사의 밀고자인 김질이 세조의 명을 받고 옥중의 박팽년을 찾아와 술을 권하며, 이방원의 ‘하여가’로 회유하려 했다. 이 시조는 그에 대한 답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초장의 까마귀는 물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일컬으며, ‘희는 듯 검노매라’는 표현이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한 것이다. 야광명월이 밤이라도 어둡지 않듯이, 단종이 여전히 임금임을 나타내고, 그 임을 향한 붉은 마음을 고칠 뜻이 전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꿰차자,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으나, 함께 뒷날을 기약하자는 성삼문의 만류에 단념했다. 그러나 김질의 밀고로 거사가 탄로나는 바람에, 아버지, 동생, 아들들이 모두 처형되는 3대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어머니, 처, 제수 등도 대역부도의 가족으로 노비가 되었다.
그는 당대의 쟁쟁한 재사들 중에서도 경술(經術)·문장·필법이 두루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인재였다.
하위지(河緯地) 고려 우왕 13(1386)∼세조 2(1456)
세종 때 〈역대병요〉의 편집에 참여, 이를 총괄한 수양대군이 단종 1년에 편집에 공로가 많은 집현전 학사들의 승진을 왕에게 건의하자, 왕권이 미약할 때 왕족이 신하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자신의 승진을 반납했다.
객산문경하고 풍미월락할 제
주옹을 다시 열고 싯귀를 흩부르니
아마도 산인득의는 이뿐인가 하노라
객산문경客散門:손님 모두 돌아간 후 문을 잠그다│풍미월락風微月落:바람은 잔잔하고 달이 기울다│주옹酒甕:술독. 술항아리│흣부르니:흩어 부르니. 되는 대로 부르니│산인득의山人得意:속세를 떠나 산에 사는 사람의 자랑스러움
이 시조는 다른 사육신의 시조와는 달리 자연 속에서 세사를 잊고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예조참판으로 올렸으나,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봉록을 별실에 쌓아두기만 했다. 거사 실패 후에 세조의 친국을 받을 때,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모의한 사실을 실토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냥 웃어넘겼다. 문초를 받자 “이미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처형하면 그뿐일 텐데 다시 물을 것이 무엇이 있겠소” 하여, 세조의 노여움이 좀 풀려 그만이 단근질을 당하지 않은 채 거열형을 받았다.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박도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작은아들 박은 나이가 어렸으나 두려운 빛이 없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 그리고 하직 인사를 올린 뒤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면서 감탄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은 〈추강집(秋江集)〉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발라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유응부(兪應孚) ?∼세조 2(1456)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세조가 “너는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는 물음에 유응부는 “한 칼로 족하(足下/‘자네’ 정도의 호칭)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네”라고 대답하여 살가죽을 벗기는 혹심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낯빛 하나 변치 않고 옆에 있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약한 서생들과는 큰일을 도모하지 말라 했거늘 과연 그 말이 옳구나. 그때 연회에서 칼을 뽑았어야 했는데, 말리더니 결국 이 모양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는, 다시 세조에게 말했다. “족하가 더 물어볼 말이 있으면 저 쓸모없이 똑똑한 학자들에게나 물어보게.”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불에 단군 쇠꼬챙이로 배 밑을 지지게 했다. 기름과 불이 이글거리고 노린내가 진동했으나, 유응부는 오히려 “쇠꼬챙이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느라”고 형리에게 호령했다.
유응부는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를 잘 했을 뿐더러 학문도 뛰어났다. 청렴결백하여 재상으로 있을 때도 집안에 양식 떨어지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가 죽던 날 그의 아내가 울면서 길 가는 사람에게 말했다.
“살아서는 고생시키더니 죽어서는 큰 화를 남겼다.”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 하리오
유응부는1452년(단종 즉위)에 의주목사, 세조 1년에 동지중추원사(정2품)에 임명되었다. 이해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까지 맡았으나, 김질의 밀고로 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사육신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며, 유일한 무인으로서,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남효온이 〈추강집〉에서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이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을 3주역이라 했다. 과천의 민절서원, 대구 낙빈(洛濱)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개(李塏) 태종 17(1417)∼세조 2(1456)
이개는 그의 삼촌 계전(季甸)이 세조와 친분이 두터워, 전향을 회유받았으나 끝내 거절했다. 같이 잡혀 국문을 당하는 거사 동지들은 이개의 몸이 워낙 가냘파 혹형을 이겨내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같은 날 처형당했는데, 한강변 새남터(지금의 새남터 성당 자리)로 가는 수레에 실려 가면서 절명시 한 수를 읊었다.
우정(禹鼎)처럼 중히 여겨질 때는 삶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선 죽음 오히려 영광이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顯陵)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우정:우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만든 9주를 상징하는 9개의 솥│홍모:기러기 깃. 아주 가벼운 물건│현릉: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의 능
방안에 혓는 촉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촉불 날과 같아야 속타는 줄 모르도다
혓는:켠│눌과:누구와│
‘홍촉루가’로 불리는 이 시조는 영월 땅으로 귀양을 떠난 단종과 헤어진 뒤 남몰래 임금을 그리는 충정을 노래한 것이다. 옥중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이색의 증손 이개는 세종 18년(14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훈민정음 창제, 〈동국정운〉 편찬에도 참여했다. 문종 원년에 좌문학으로 세자(뒤의 단종)에게 〈소학〉을 강의했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시문이 청절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영조 때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대구 낙빈(落賓)서원, 홍주의 노운(魯雲)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유성원(柳誠源) ?∼세조 2(1456)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교서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쳤으나, 그 혼자 잡혀 협박 끝에 교서를 기초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세조 제거를 위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했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다
초당草堂:집의 본채 밖에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이은 조그만 집채│수성어적數聲漁笛:어부들이 부는 몇 마디 피리소리│깨와다:깨운다│
이 시조는 문면 그대로 보면 한가로운 어촌의 풍경을 읊은 듯이 보이나, 실인즉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황보 인 같은 중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움켜쥔 계유정란을 빗대어 노래한 것이다. 세종조의 30년 태평성대의 꿈이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깨어져버렸음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뒤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당시의 공론에 의거해 단종복위 사건의 주동인물 6명을 선정, 〈육신전〉을 지었다. 이 책이 세상에 공포된 뒤 이들 6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하고 관작을 복위시킬 때, 유성원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愍節)서원, 영월의 창절사 등에 제향되었다.
3. 영월 청령포 왕방연 시비.
왕방연(王邦衍)
왕방연은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 중인 노산군(단종)에게 세조 3년(1457) 사약을 갖고 간 의금부 도사였다.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므로, 나장이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뜰에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다. 왕방연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단종을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관가의 심부름꾼)이 아뢰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단종은 세조가 내린 사약을 거절하고 스스로 목에 올가미를 걸고는 하인에게 창 밖에서 당기게 하여 자진했다고 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안:속. 마음│예놋다:가는구나
어떤 자료에 따르면, 위 시조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 길에 오를 때 그를 호송하고 나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영월의 곡탄(曲灘) 기슭에서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괴로운 심정을 울면서 읊은 노래라고 한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 기슭에 이 노래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조선 500년 역사토픽 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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