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종부시 정(宗簿寺正) 변공(邊公) 묘갈명 병서
내가 아직 조정에 들어가기 전에 호중(湖中)에 변언시(邊彦時)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또 일찍이 호중을 다닐 때 호중의 인사 중 언시의 재주와 행실을 칭찬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언시는 자주 실패와 곤란을 겪었고 관직에 오래도록 임용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후진(後進)으로서 먼저 승진하여 판서(判書)가 되었을 때에도 공은 여전히 백수잠랑(白首潛郞)이었고 더구나 같은 관사(官舍)에서 근무하며 누차 하리(下吏)로서 복무하였다. 이 기간을 통해 나는 공이 재능이 있고 또 조수(操守)가 있어 구차하게 득실을 따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나는 공이 호중에서 칭찬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실패와 곤란을 겪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내가 묘도(墓道)에 새길 글을 부탁받음에 어이 차마 공의 행적을 글로 쓸 수 있겠는가.
공은 어릴 때부터 영오(穎悟)하여 재기(才氣)가 남보다 뛰어나고 문예가 숙성하였다. 그래서 약관의 나이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여 재주가 뛰어나다는 명성을 한 몸에 받았다. 23세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교서 권지(校書權知)에 임명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576, 선조 9), 정축년(丁丑年, 1577, 선조 10)에 연이어 양친의 상(喪)을 당하여 지나친 애훼(哀毁)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으며, 상제(喪祭)를 한결같이《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다. 묘소 아래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며 묘소를 바라보고 배곡(拜哭)하였다. 그래서 그 집 이름을 망암(望庵)이라 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박사(博士)로 예천(例遷)하고 감찰(監察)에 승진하였으며, 전적(典籍), 공조(工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좌랑(佐郞), 황해 도사(黃海都事), 형조 정랑(刑曹正郞), 풍기 군수(豐基郡守)를 역임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론하고, 어가(御駕)가 진주(進駐)하여 광복(匡復)을 도모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봉상 첨정(奉常僉正)에 제수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소모사(全羅道召募使)가 되었다.
이때 공은 샛길로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정을 재촉하여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겨우 한 달이 걸렸으며, 병졸을 모집하여 수천만 명을 모았으며, 전마(戰馬)와 수레를 끌 소, 무기 등을 빠짐없이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진군하여 수원(水原)에 주둔, 기호(畿湖)의 적을 막았다.
오래지 않아 조정이 중국 군사가 승기(勝機)를 타고 있으므로 군졸을 소모(召募)할 필요가 없다 하여 공을 조도 어사(調度御使)에 제수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대적(大賊)이 아직도 경성에 머물러 있으니, 군사를 해산할 수 없다.” 하고 도리어 몸소 정예병을 거느리고 양천(陽川)에 주둔하여 전후로 누차 적과 싸워 죽이고 포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공은 스스로 화차(火車) 3백 량(兩)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에게 나누어 주어 행주산성(幸州山城)의 승첩을 도왔다.
조정이 공에게 조도(調度)의 일을 매우 다급하게 독책(督責)하자 공은 군사를 병사(兵使)에게 맡기고 호남(湖南)으로 돌아가 군량을 맡았다. 한 달도 못 되어 체직되어 행재(行在)로 가다가 도중에 다시 조도 어사에 제수되어 다시 호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고 종부시(宗簿寺)로 자리를 옮겼으며, 오래지 않아 분조(分朝)의 호조(戶曹)에 임용되어 강도(江都)로 가서 중국 군사의 군량을 조운(漕運)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상주(尙州)와 성주(星州)의 목사(牧使)에 제수되었으나 군량을 조운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으니, 마침내 독운사(督運使)에 기용되었다.
공은 무릇 세 차례 조도 어사가 되었고 두 차례 독운사를 맡아 곡식 수십만 섬을 모았고 중국 군사에게 군량 30여만 섬을 수송하였다.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 덕분에 군량이 부족하지 않았다. 이에 관하(管下)의 관원들은 모두 상전(賞典)을 받았는데도 공은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억울한 일이라 하였으나 공은 그 일을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다.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 사옹 정(司饔正)에 제수되었고,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에 함안 군수(咸安郡守)에 제수되었으며,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 38)에 벼슬을 그만두고 장성(長城)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사환(仕宦)에 뜻을 끊고 전원에서 신병(身病)을 조섭하다가 신해년(辛亥年, 1611, 광해군 3)에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이 66세였다. 장성 구기봉(九岐峯)에 안장되었다. 후일에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원종(原從) 1등에 녹훈(錄勳)되고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변씨(邊氏)는 황주(黃州)에 세거(世居)하였다. 고려 때 공부의랑(工部議郞) 휘 유(宥)가 그 비조(鼻祖)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휘 제(制),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휘 눌(訥)을 거쳐 사정(司正) 휘 정(靜)에 이르러, 고려 부마(駙馬)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고려에 정란(政亂)이 일어났을 때 사정은 왕실의 외손으로서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남쪽으로 재를 넘어가서 장성(長城)에 집안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드디어 장성을 관향으로 쓰게 되었다. 고조는 휘 효우(孝友)이고, 증조 휘 호(浩)는 생원이고, 조부는 휘 처정(處楨)이다.
부친 휘 택(澤)은 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으로써 누차 증직이 올라 모관(某官)에 이르렀다. 함풍 이씨(咸豐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이조 참판(吏曹參判) 긍(兢)의 손녀이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1)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는 이중(以中)이고 언시(彦時)는 자이다.
전배(前配) 나주 오씨(羅州吳氏)는 학생(學生) 인준(仁俊)의 따님이며, 2남을 낳았다. 장남은 요절하였다. 둘째 경윤(慶胤)은 문과에 급제하고 봉상 주부(奉常主簿)가 되었다. 계배(繼配) 진산 소씨(晉山蘇氏)는 부장(部將) 형선(亨善)의 따님이며, 4남을 낳았으니 소윤(騷胤), 효윤(孝胤), 후윤(厚胤), 달윤(達胤)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사인(士人) 김자점(金自點)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경윤은 2남을 낳았고, 소윤은 2남 1녀를 낳았고, 효윤은 1남을 낳았고, 후윤은 2녀를 낳았고, 달윤은 1녀를 낳았으며, 김자점은 1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하여 조수(操守)가 확고하여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적이 없었으며, 교제하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명인(名人)이었다.
일찍이 우계(牛溪)ㆍ율곡(栗谷) 두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강론하고 질의하여 두 선생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사암(思庵) 박 상공(朴相公)이 공의 재능을 매우 인정하여 크게 기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공(諸公)이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하였고 공도 앞길이 더욱 순탄치 못하였다.
공이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있을 때의 일이다. 송사(訟事)가 있었는데 상대방이 권귀(權貴)와 결탁하고 있어 수십 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공은 부임하는 날로 법에 따라 즉시 판결하고 관찰사가 누차 청탁하였으나 끝내 바꾸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강개(忼慨)하여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다. 소모사를 맡아 의병을 모집할 때 반드시 충의(忠義)로 사람을 면려하였고, 두려워 몸을 움츠리는 사람이 있으면 엄히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조도 어사를 맡을 때나 독운사를 맡을 때에도 대체로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였기 때문에 이를 갈며 공을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공은 누차 탄핵을 받았으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독서할 때는 반드시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문(禮文)에 특히 정심(精深)하여 고례(古禮)의 절목 중 난해한 것을 모두 고증하였다. 그래서 상(喪)이 있으면 사람들이 공에게 와서 자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년에 한가히 살 때는 향리의 부로(父老)들과 사귀며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하여 봄가을로 강례(講禮)와 독법(讀法)을 실행하니, 향속(鄕俗)이 교화되었다.
공이 졸(卒)하자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조곡(弔哭)과 부의(賻儀)가 극진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남들은 승진하는데 공은 뒤처졌고 / 彼馳而我後
남들이 헐뜯을수록 더욱 온전했어라 / 愈毁而彌全
지위가 낮아도 남들이 넘을 수 없고 / 卑不可踰
직책이 낮아도 언제나 의연하였도다 / 汚不受憐
행실이 가정에서 쌓였으나 / 行積于庭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하였고 / 而世不容
노고가 나라에 베풀어졌으나 / 勞施于國
크게 등용되지는 못했어라 / 而不見庸
마침내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니 / 卒坎壈而終
아 하늘의 뜻인가 보다 / 吁其天
내 이 명을 비석에 새기노니 / 我書于石
이것은 바로 군의 무덤이라네 / 玆惟君之阡
---------------------------------------------------------------------------------------------------------------------------------------------------------------------
[각주]
[주01] 백수잠랑(白首潛郞) :
좋은 재능을 품고도 불우하여 오래도록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한(漢)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관(郞
官)이 되어 경제(景帝)ㆍ무제(武帝) 때까지 승진하지 못하고 낭서(郞署)에서 늙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
--------------------------------------------------------------------------------------------------------------------------------------------------------
[原文]
邊以中 墓碣銘[李廷龜]
蓋余未籍于朝, 已聞湖中有邊彦時, 又嘗薄遊湖中, 湖中人士多稱彦時才行。 然彦時數困躓, 官久不調。 及余上積薪爲尙書, 公猶白首潛郞, 乃反辱爲同舍, 而屢共吏事。 益知公才且有守, 不苟焉徇得失者始驗。 公見稱於湖中者以此, 其得困躓亦以此。 亡何, 人報公亡矣。 今於墓道之托尙忍言哉?
公自幼穎發, 才氣過人, 文藝夙成。 弱冠擧於鄕, 裒然有俊聲。 二十三, 中司馬。 二十八, 登大科, 補校書權知。 丙子、丁丑, 連守
二親喪, 毁幾滅性, 喪祭一依《文公家禮》, 墓下結小庵, 望墓拜哭, 仍號爲望菴。 服闋, 例遷博士, 陞監察, 歷典籍、工・戶・禮佐郞、黃海都事、刑曹正郞、豐基郡守。 壬辰, 以魚川察訪, 上疏極論時事, 請車駕進駐, 以圖匡復, 不報。 拜禮曹佐郞、奉常僉正。 俄出爲全羅道召募使, 間道兼行, 至道僅閱月, 收兵得數千萬人, 戰馬、車牛、軍械悉備, 乃進屯水原以抗畿、湖之賊。 未幾, 朝廷以天兵乘勝, 無所用召募, 除公爲調度御史。 公曰: “大賊尙留京城, 不可解兵還。” 乃親率精銳, 箚于陽川, 前後屢與賊戰, 殺獲甚衆。 自製火車三百兩, 分與巡察使權慄, 以助幸州之捷。 朝廷責公調度甚急, 乃以兵屬兵使, 還湖南治餉。 未一月, 適赴行在, 道復拜調度御史, 更下湖南。 拜軍器正, 轉宗簿, 俄署分戶曹, 往江都, 管漕天兵糧。 拜尙、星州牧使, 皆以重運餉不果赴, 遂稱督運使。 凡三爲調度, 再任督運, 募得穀數十萬石, 輸天兵糧三十餘萬, 軍興賴以不乏。 管下官皆蒙賞典, 公獨不與焉, 人皆稱屈, 而未嘗自言。 庚子, 拜司饔正。 癸卯, 拜咸安郡守。 乙巳, 罷歸長城。 自是絶意仕宦, 養疾邱園。 辛亥, 卒于家, 得年六十六。 葬長城九岐峯。 後以衛聖功, 錄原從一等, 追贈某官。
邊世居黃州。 麗朝工部議郞諱宥是其鼻祖, 歷參知政事諱制、判典客寺事諱訥, 至司正諱靜, 娶麗朝駙馬女。 麗氏政亂, 司正以王室外孫懼及禍, 南踰嶺, 家長城, 遂爲長城人。 高祖諱孝友: 曾祖諱浩, 生員: 祖諱處楨。 考諱澤, 以公原從功累贈某官。 娶咸豐李氏, 吏曹參判兢之孫。 嘉靖丙午生公。 諱以中, 彦時字也。
前配羅州吳氏, 學生仁俊之女, 生男二: 長夭: 次慶胤, 文科, 奉常主簿。 繼配晉山蘇氏, 部將亨善之女, 生男四: 曰蘇胤、孝胤、厚胤、達胤。 女二: 長適士人金自點, 季未婚。 慶胤生二男, 蘇胤生二男一女, 孝胤生一男, 厚胤生二女, 達胤生一女, 金自點生一男, 皆幼。
公剛方守確, 未嘗頫仰順時。 所與交皆當世名人。 嘗遊栗谷、牛溪兩先生門, 質劘講疑, 大爲兩先生嘉賞。 思菴朴相公才公甚, 嘗欲大用。 諸公不久於朝, 公亦益坎軻。 嘗守豐基, 有訟者結權貴, 積數十年不決。 公至之日, 按法立斷, 觀察使屢以爲請, 終不改。 性忼慨, 不能容人之過。 其爲召募也, 勉人必以忠義, 見有畏縮者, 斷治不饒。 爲調度, 爲督運, 率用是道。 以故齮齕者衆, 屢遭彈劾, 而不少悔。 讀書必潛究義理, 尤精於禮文, 古禮節目之難曉者, 悉加考證, 人有喪, 多來咨訪。 晩年, 閑居, 與鄕人父老
倣《呂氏鄕約》, 春秋講禮讀法, 鄕俗化之。 及卒, 遠近畢會, 哭、賻無不盡。 銘曰:
彼馳而我後, 愈毁而愈全。 卑不可踰, 汚不受憐。 行積于廷, 而世不容。 勞施于國, 而不見庸。 卒坎壈以終, 吁其天! 我書于石, 玆惟君子之阡。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