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2024년 11월 24일 살전 4:13-18
1.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1) 도그마
도그마(dogma)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치 않는 신조, 원리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그마란 말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변하지 않는 고지식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너는 도그마에 빠져 있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사실 유연하게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그마가 아닙니다. 아무튼 이런 고약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말이 도그마지만, 그러나 역사적으로, 특별히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도그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지금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도그마를 교리(敎理), 혹은 교의(敎義)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도그마는 왜 필요했을까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신앙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무기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외적이란 이단사상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시절 영지주의, 마르시오니즘, 몬타니즘 등의 이단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도그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도신조란 이러한 도그마들을 정식화해 문서화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하고 사도신조의 마지막 신앙고백인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란 라틴어로는 vitam aeternam입니다. 영어로는 eternal life입니다. 우리말로는 영원한 생명, 줄여서 영생(永生)이라고 하지요. 이 영생을 믿는다는 것이 사도신조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2) 사나 죽으나
이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은 협소한 생명관을 거부합니다. 흔히 말하는 “나 죽으면 끝이다.”라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사 22:13, 고전 15:32)라는 말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이런 생명관은 굉장히 뿌리 깊은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런 생명관은 좀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면, 육체적인 관점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온전한 생명을 육체, 물질 덩어리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 물질 덩어리조차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원소로 이루어져 있기에 소멸되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의 존재형태가 바뀌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물질적 형태가 바뀐다고 하여 생명이 소멸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이런 생명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 품 안에 있다.” 다르죠? 다릅니다. “죽으면 끝이다.”와 “사나 죽으나 하나님 품 안에 있다.”는 천지차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 품 안에 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니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우주와 창조질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는 산 자나 죽은 자나 일반입니다. 때문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들었다”, 혹은 “돌아갔다”고 표현했습니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서도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던 본회퍼 목사님은 평생을 이와 같은 신앙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3년 영국 런던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그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젊었느냐 늙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세상살이가 끝날 때에만 삶은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막이 오르기 전 도입에 불과합니다. … 죽음이 공포의 대상인 것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다면, 죽음은 사납지도 무섭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이며, 가장 큰 은혜의 선물입니다.】 에릭 메택시스(Eric Metaxas), <디트리히 본회퍼(Bonhoeffer)>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죽음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3) 목마르지 않는 삶
또 하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영생 신앙은 깊이가 없는 삶을 거부합니다. 마셔도 다시 목이 마르게 되는 물과 같은 인생살이를 거부합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결코 목마르지 않는 그런 삶을 추구합니다. 이런 삶을 일컬어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영생신앙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궁리하는 덧없는 삶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기뻐 뛰며 춤을 춥니다. 비유컨대 이런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크리스천,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런 삶을 추구하며, 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 4:13-18
(1) 배경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불과 얼마 안 되어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종말론적인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늦어지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교우들 가운데 연만한 이들은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지 못한 채 세상 떠나게 된 이들을 보면서 초대교회의 교우들은 실망하였고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던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에게 사도 바울은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이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먼저 간 교우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이겨내고 위로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2) 위로의 말씀
오늘 본문 살전 4:16-17입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안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이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휴거(携擧)입니다. 매우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만, 그러나 이를 사실적인 묘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일부 신도들이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가운과 같은 흰옷을 입고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는 상상을 하며, 그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림의 그날로 특정한 날짜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재림의 지연에 대한 실망과 사별한 교우들로 말미암은 슬픔에 깊이 빠져 있었던 데살로니가교회의 교우들을 위로하기 위한 바울의 위로일 뿐입니다. 결코 재림사건의 청사진이 아닙니다. 주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 날과 그 때의 시간과 모습을 사도 바울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재림과 종말의 장면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따뜻하고도 웅장한 위로의 말씀일 뿐입니다.
3. 영원주일에
(1) 추모의 날
모든 문화에는 선조들을 추모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사에도 기제가 있고 시제가 있지요. 기제(忌祭)란 해마다 사람이 죽은 날(전날 밤)에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기제는 보통 4대 조상까지 드리는 것이 한도지요. 5대 이상의 조상들은 몰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드리는 제사를 시제(時祭)라고 하지요.
기독교 문화에도 성인들을 추모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성인들을 기리는 날을 정해놓고 지키지요. 축일(祝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인들마다 그 축일을 모두 정할 수 없기에 따로 날을 정하여 몰아서 추모합니다. 마치 우리의 시제와 같은 것이지요. 이 날을 모든 성인의 날이란 뜻에서 만성절(萬聖節, All Hallows’ Day)이라고 하는데, 11월 1일입니다. 이 만성절의 하루 전날 10월 31일 저녁이 핼로윈입니다. 만성절 전야제지요. All Hallows Evening이 줄어서 Halloween이 된 것입니다. 요즘은 단순한 축제로 변했습니다만, 그 역사상 의미는 신앙의 선조들을 추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신앙의 선조들을 추모하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단순한 추모를 넘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계승을 위하여 교회와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며, 이런 계승의 전통을 통하여 신앙의 역사는 발전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이 날을 영원주일로 지키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2) 영생 신앙
재림의 신앙을 설교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제가 먼저 갈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이 짧고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할까만 남았습니다. 어떤 마음, 어떤 신앙으로 살아야 할까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 품 안에 있다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기에 당당하지요. 이 유한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이 세상에서는 이 몸으로, 또 다른 세상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지요. 또 다른 모습이란 아마도 사도 바울이 얘기했던 것처럼 ‘썩지 않을 몸’이고 ‘죽지 않을 몸’일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오늘 하루를 살아도 온전히 살겠다는 신앙,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는 삶, 이것이 영생 신앙이지요. 이런 영생신앙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