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사역에 상처를 주지 않으시려고 유대에서 갈릴리로 옮겨 가셨습니다. 성도의 사역의 방법은 지고 죽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경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서 부활의 능력과 승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가거나 해안을 따라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는 BC722년에 앗수르에 멸망을 당하고 혼혈정책으로 인해 남자들을 다 죽이고 여자들은 이방인의 씨를 나았으며 구약성경도 다 믿지 않고 모세오경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상종도, 교류도 하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들은 차별로 인한 상처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이유는 바빠서 빨리 지나가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3, 4).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만나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예수님의 찾아가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 속에 수가성 여인의 구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원하는 곳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싫은 곳도 가고, 좋은 곳만 가지 말고 불편하고 나쁜 곳도 가야 합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갈 이유가 없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연약하고 영적인 빈궁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찾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물에 도착한 6시는 현재 낮 12시였습니다. 지중해 연안국가들은 이 시간이 너무 덥고 힘들어 낮잠 자는 씨에스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더운 시간에 물을 길러 오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본래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자들이었고, 여인으로서는 남자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여인은 결혼의 실패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유대인이면서 남자이시니 차갑게 대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도 없고 영향력도 없고 떳떳하지도 못한 미숙하고 연약한 약자이자 실패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려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서 정중히 그녀가 갈급한 것에 대한 대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충고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냥 물 좀 달라고 접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게오에게도 네 집에 거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며 그의 변화된 마음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정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위해서도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시며 다 물리치시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정중히 대화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하시니 여인은 쌀쌀맞게 말하면서도 주님의 대화를 받아줍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왜 물을 달라고 하느냐’ 이때부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눈 높이에 맞는 대화를 시작합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으로 그의 수준에서 중요한 답을 주셨고, 이 여인에게는 구원이 선물(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말씀해 주셨고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사랑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전해야 합니다(고전 9:20-23). 교만함이란 ‘당신이 틀렸으니 나같이 해야 돼’입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에게 내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눈높이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의 눈높이로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의 눈높이로 더 낮추셔서 구원이 선물이고 생수임을 말씀하십니다(10).
그런데 그 선물과 생수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선물로 받고 물같이 마시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떡이니 당신을 먹으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는 대상이란 예수님과 섞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교회를 학교로 만들어 가르치려 하니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라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그를 아는 것이지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고 그가 누군지 안다는 것은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나로 살지 않고 예수로 생각하고 예수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으로 내 안에서 말씀하시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같이 순종하고 미래적이고 불가능한 것들은 예수님을 신뢰하며 맡기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 목마른 것이지 예수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솟아나는 생수이시기에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것을 깨닫고 달라고 한 것은 예수를 영접한 것이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기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사니까 전하는 삶이 되고, 사마리아를 변화시키는 삶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에 설득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던지시는 말씀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살며 예수 안에서 그를 먹고 마시며 영생을 누리는 성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