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3일 주일설교 * 사순절 셋째 주일
마가복음 12:28-40
으뜸계명
사순절이 시작 되면서 우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성전입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여러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해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모두 일반 백성들이었는데, 성전관리들은 대부분 예수로부터 흠을 잡아내려고 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 바리새파와 헤롯당원들 그리고 사두개파도 찾아와서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거나 예수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12장 28절 이하에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몰라도 그동안 벌어진 논쟁을 곁에서 모두 본 사람입니다. 마가는 그의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대답이 이 율법학자의 마음에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가 목수출신 예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시실 이 질문은 그 당시에 여러 형태로 존재했던 질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저명한 랍비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분은 랍비 <힐렐>이고 다른 한 분은 랍비 <샴마이>입니다. 당시에는 토라에 나오는 계명들을 613가지로 분류하고 그 계명들을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랍비 샴마이는 여기서 으뜸가는 계명을 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613가지 계명을 다 지켜야하기 때문에 으뜸계명을 정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랍비 힐렐은 율법계명의 총괄을 “네게 달갑지 않은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고 한 줄로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도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라고 같은 의미의 황금률을 말씀하였는데, 이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위한 시험(목사고시)를 치르는데, 1교시 성경시험 문제 1번이 “성경의 총 주제는 무엇입니까?”였습니다. 시험 끝나고 나서 전도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끼리의 결론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수 있는 답변인데, 우리 중에 제일 많은 답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성경의 총 주제는 <황금률>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처럼 으뜸계명을 둘로 나눈 분은 예수가 처음인 것이 분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5절 말씀이고, 둘째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입니다. 이 대답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는 예수에게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험하려고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 율법학자가 이 대답을 들은 후에 다시 시험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선한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주목하여 보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율법학자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복창을 하듯 말입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한 말씀과는 좀 다르게 반복합니다.
30절, “우선 마음(καρδία, heart)을 다하고, 목숨(ψυχή, soul)을 다하고, 뜻(διάνοια, mind, understanding)을 나하고, 힘(ἰσχύς, strength, power)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 중에서 목숨과 뜻을 합해서 “지혜(σύνεσις, understanding, insight, intelligence)를 다하고”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혼입니다 그리고 뜻은 생각입니다. 이 율법학자에게는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해력, 즉 통찰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발언이 더 중요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말씀에 대한 자신의 해석입니다. 이 으뜸계명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사 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으뜸계명을 들은 이 율법학자는 그 계명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 명령이 담고 있는 본뜻의 깊이를 자신의 통찰력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희생제사만 열심히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당시의 유대교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람에게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칭찬을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우리 역시 이 율법학자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가르침은 그 안에 깊고도 넓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담고 있는 그 깊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종교활동의 외적인 형식을 갖추는 것과 더불어서, 그 내면 깊은 곳에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성찰이 있어야합니다 이 율법학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물을 드리면서 이 헌금이 이웃들을 사랑하는데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예배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눌 때에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하는 인사를 종종 듣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말만 아니라며 참 기분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인사를 들으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은혜를 받지?”라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교우들께서 만일 저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제가 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제가 받은 은혜를 전달한 것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표기도에서도 은혜를 받고, 성경봉독을 들으면서도 느끼는 은혜가 많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은혜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면, 그 다음은 받은 은혜를 어떻게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까 고민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으뜸 계명이 갖는 본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받기만 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여기서 성경의 단락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의 단락과도 매우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해서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이무리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오히려 다윗의 주라고 말입니다. 혈통에만 목숨을 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일침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어록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속에는 앞에 나온 통찰력 있는 율법학자와 달리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의 문제점들이 담겨있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는 지식이 높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명예욕과 소유욕과 과시욕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랍비 힐렐의 가르침을 배웠고, 613가지나 되는 율법의 내용들을 남들에게 가르치는 율법학자는, 자신이 정작 깨달아야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그들 앞에서 온갖 욕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미와 남미대륙을 연결하는 통로에 파나마라는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는 약 82km 에 달하는 파나마 운하가 1914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이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 짓는 통로입니다. 만일 이 운하가 없었다면 모든 배는 남아메리카를 빙 돌아 약 20,000km를 몇 주에 걸쳐 항해 해야만 합니다.
이 파나마 운하는 갑문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중간에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배를 올리려면, 갑문 안에 배를 대고 윗 갑문을 열어 물을 채워서 수위를 높여, 양쪽의 수위를 똑같이 맞추어야 합니다. 네 번 정도의 이런 단계를 반복하여 배는 대서양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이것이 배가 산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파나마 운하를 채워 배를 지나가게 하는 물처럼, 우리의 은혜도 받은 곳에서 주어야 할 곳으로 흘러나가서 서로 평등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소수가 독점해서 주기만 하고, 다수는 앉아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처럼 욕심으로 소유하려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마치 손 안의 물이나 모래처럼 흘러나와야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통찰력 있는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모두 은혜 받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란 소유욕과 명예욕과 과시욕이 강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을 자신처럼 대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으뜸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고,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5년 3월 23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