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천재
김시습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도 김해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유모가 맷돌로써 곡식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년기에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 김반, 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인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조 정변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유응부·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신숙주와 정인지, 정창손의 행차를 길에서 보게 되면, 나타나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이었다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 유응부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 유응부이 증축한 건물은 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유응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명회, 유응부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 유응부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그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홍산의 무량사((당시 충청도 공주목 홍산현, 현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위치한 사찰)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사후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향년 59세(1493년).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 유응부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윤춘년은 김시습, 유응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명종실록을 적은 사관은 이를 비꼬아 '요사하고 허탄하고 속된 전설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을 추존하여 공자(孔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는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윤춘년은 불교사상과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두어, 당시 조선 주류 사상인 주자성리학의 학문만이 진리라며 집착하지는 않았다. 윤춘년 외에도 윤춘년의 먼 친척인 윤유후는 성삼문을 높이 평가하여 성삼문의 저서와 시문을 수습해 성근보유고를 남기기도 했다. 윤춘년과 윤유후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 쪽 후손들이었다.
김삿갓 (김병연)
김병연(金炳淵, 1807년(순조 7년) ~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은 조선 시대 후기의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이다. 그는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 그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이다.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으로서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반란군 세력에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함흥 중군(中軍:정3품)으로 있다가 선천부사 겸 방어사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防禦使)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4]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이(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4형제를 키워내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김익순이 적장 앞에 무릎 꿇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온 어머니 때문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이 찍히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결국 영월 백일장 때 시제에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비판하는 답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이것을 계기로 그는 삿갓을 쓰고 방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嘉蓮)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을 만나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안 참봉의 사랑방에서 죽었는데 아들 김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곳은 훗날 지금의 김삿갓면이 되었다.
중국의 천재
이백
이백(중국어 정체자: 李白, 병음: Lǐ Bái 리바이, 701년 2월 8일 ~ 762년)은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가 남아 있다. 그의 시문학과 관련된 주제는 도교, 술 등이 유명하다. 이백은 당나라 면주(綿州)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당나라 쇄엽(碎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데 범전정(范傳正)이 지은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唐左拾遺翰林學士李公新墓碑)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황실의 먼 친척으로, 서량(西涼)의 군주 이고(李暠)의 8대손이라 한다. 그에 의하면 그는 당 태종이나 이헌성, 이원길과 같은 항렬의 족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이백의 할아버지가 이헌성, 이원길 중의 한 명으로, 현무문의 변을 피해 달아났던 자손이 그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백의 아버지가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나 26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라는 선인과 사천(四川)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744년 43세에 현종(玄宗)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에 머물렀으나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44세에 현종의 측근인 고역사와 다투고 사직하였다. 사직 후에 뤄양시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당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 지금의 구이저우 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1세에 안휘성(安徽省) 당도(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백이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백은 고시와 절구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는 천래의 재, 즉 '천재'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가 1자 1구의 조탁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두보
두보(중국어 정체자: 杜甫, 병음: Dù Fǔ 두푸, 712년 ~ 770년)는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품은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정의가 없는 경제구조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시인이다.두예의 13대손으로 소릉에 거주했고, 조부는 두심언(杜審言)이다. 과거 급제 직후 공부원외랑이 되었기 때문에 '두소릉', '두공부'라고도 불린다. 중산 관리 계급의 아들로 허난성의 공의(巩義, 궁이) 필가산 아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을 맞아 제국의 붕괴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 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둥에 가서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1년, 《삼대예부》를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아, 755년 10월에 우위솔부 주조참군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10년간 벼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冑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때 당의 현종이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여 국운이 쇠퇴했는데, 이런 나라의 형편을 읊은 장편 시 《영회》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촉으로 피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鄜州)에 맡겨둔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당시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그 후 그의 시는 비장함을 더하는 변화를 보였다. 황제의 피난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지은 장편 시 《북정》은 그의 최대 걸작이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청두(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 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770년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본의 천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일본어: 菅原道真, 조와 12년 음력 6월 25일(845년 8월 1일) ~ 엔기 3년 음력 2월 25일(903년 3월 26일))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학자, 한시인(漢詩人), 정치가이다. 산기(参議) 스가와라노 고레요시(菅原是善)의 셋째 아들이다. 관위는 종2위 우대신(右大臣)이며, 사후 정1위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추증되었다. 스가와라노 미치마사, 스가와라노 도신이라고도 한다.나라시의 깃코지(喜光寺)라는 절에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미치자네는 지금의 나라 시 스가와라마치(菅原町) 주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교토 시모쿄구의 간다이진 신사(菅大臣神社)와 가미교구의 스가와라노인덴만구(菅原院天満宮), 미나미구의 깃쇼인덴만구(吉祥院天満宮), 나라현 요시노군 요시노마치(吉野町)의 스고사(菅生寺), 시마네현 마쓰에시의 스가와라덴만구(菅原天満宮) 등이 미치자네의 탄생지로 여겨지고 있어 확실하지 않다.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있는 요고 호수(余呉湖)의 날개옷 설화에서는 "천녀와 그 지역의 동연대부(桐畑太夫)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였으며 어려서 근처의 스가야마지(菅山寺)에서 공부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시가에 재주를 보였던 미치자네는 조간(貞観) 4년(862년), 18세로 문장생(文章生)이 되었다. 조간 9년(867년)에는 문장생 가운데 단 두 명만이 뽑혔던 문장득업생(文章得業生)으로 뽑혔고 정6위하에 봉해져 시모스케노곤노소죠(下野権少掾)가 된다. 조간 12년(870년)에는 방략시(方略試)에서 상등으로 합격했는데, 규정에 따르면 3계를 높여야 했지만 그렇게 될 경우 5위에 이른다고 해서 1계만을 더해 정6위상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현번조(玄蕃助)가 되고 나아가 소내기(少内記)로 옮겼다. 조간 16년(874년)에는 종5위하 병부소보(兵部少輔)에 이어 민부소보(民部少輔)에 임명되었다. 간교(元慶) 원년(877년)에는 식부소보(式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에 집안 대대로 맡아온 관직인 문장박사를 겸임하게 된다. 간교 3년(879년), 종5위에 서임되었으며, 닌나(仁和) 2년(886년)에 사누키노카미(讃岐守)로 임명되어 식부소보 겸 문장박사의 직책은 사임하고 부임지 사누키로 낙향했는데, 닌나 4년(888년)에 일어난 아코 사건(阿衡事件)에 즈음해 후지와라노 모토쓰네에게 의견서를 보내 충고함으로써 사건을 수습했다. 간표(寛平) 2년(890년)에 임지 사누키 국에서 교토로 돌아왔다. 그 무렵부터, 여지껏 집안의 신분에 따른 관직 안에 머물러 있었던 미치자네는 우다 천황의 신임을 받으며 이후 요직을 역임하게 되는데(당시 황실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두르던 후지와라 씨에 유력한 인물이 없었던 점 등을 계기로 우다 천황은 미치자네를 이용해 후지와라 씨를 견제하려 했다) 간표 3년(891년)에 구란도노카미(蔵人頭)에 보임되고 나아가 식부소보와 좌중변을 겸무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종4위하에 봉해지고 좌경대부(左京大夫)를 겸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또 다시 산기 식부대보로 보임되고 좌대변(左大弁) 감해유장관(勘解由長官) 춘궁량(春宮亮)을 겸임한다. 간표 6년(894년)에 견당대사에 임명되지만 미치자네의 건의에 따라 견당사는 폐지되었고, 엔기 7년(907년)에 당(唐)이 멸망함으로써 일본의 견당사 파견은 간표 6년을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간표 7년(895년)에는 종3위 곤노주나곤(權中納言)에 서임되고 춘궁권대부(春宮権大夫)를 겸임한다. 첫째 딸 렌시(衍子)를 우다 천황의 뇨고로 들여보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민부경(民部卿)을 겸임하게 되었으며, 간표 9년(897년)에는 셋째 딸 료시(寧子)를 우다 천황의 황자 · 도키요 친왕(齋世親王)의 비로 했다. 이 해에 우다 천황은 다이고 천황에게 양위하면서 미치자네를 계속 중용할 것을 강력히 다이고 천황에게 지시하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두 사람에만 공무에 관해 아뢰는 것을 특권으로서 허용했으며, 미치자네는 정3위 곤노다이나곤(權大納言)에 서임된 데 이어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 ・ 중궁대부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우다 천황의 조정에서 태정관을 통솔했고 미치자네와도 친교가 있었던 우대신 미나모토노 요시유키(源能有), 몬토쿠 천황의 황자로서 우다 천황과는 사촌형제지간)가 훙서하였다. 다이고 천황의 치세에서도 미치자네는 승진을 거듭했지만, 미치자네가 주장한 중앙집권적 재정에 대해 조정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후지와라 씨 등 유력 귀족의 반발이 표면화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기존의 집안의 품격에 따른 나름의 생활 유지라는, 현상 유지를 원했던 중하급 귀족 가운데에서도 미치자네가 진행하는 정치 개혁에 불안을 느끼고 이러한 유력 귀족들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미치자네가 우대신으로 승진하여 우대장을 겸임하게 된 이듬해인 쇼타이(昌泰) 3년(900년)에 미요시 기요유키(三善淸行)가 미치자네에게 지족(止足)하는 삶을 즐기라고 달랬지만 미치자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쇼타이 4년(901년)에는 종2위에 봉해졌지만 다이고 천황을 끌어내리고 도키요 친왕을 황위에 앉히고자 하였다는 무고로 죄를 얻어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로 좌천되고 말았다. 우다 상황은 이 사실을 알고 곧장 다이고 천황과의 면담을 청했지만 천황은 응하지 않았다. 장남 다카미(高視)를 비롯한 미치자네의 네 명의 아들도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쇼타이의 변). 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미치자네의 정적이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에 의한 완전한 참언이라는 설부터 우다 상황과 다이고 천황의 대립에 미치자네가 말려든 결과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미치자네는 엔기 3년(903년), 다자이후에서 사망하여 현지(지금의 다자이후덴만구)에 묻혔다. 미치자네가 교토를 떠나 다자이후로 향하면서 읊었다는 「동풍 불거든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도 봄을 잊지 말지니(일본어: 東風吹かば 匂ひをこせよ 梅の花 主なしとて 春な忘れそ)」 라는 와카는 유명하며, 이 와카에 등장하는 매화가 교토에서 하룻밤 사이에 미치자네가 살던 다자이후의 집 뜰까지 날아왔다는 「도비우메(飛梅)」 전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자신의 시와 산문을 모은 『관가문초(菅家文草)』전 12권(쇼타이 3년, 900년), 다자이후에서의 작품을 모은 『관가후집(菅家後集)』(엔기 3년, 903년경), 편저에 유취국사가 있다. 일본기략에 의하면 간표 5년(893년), 우다 천황에게 『신찬 만요슈(新撰万葉集)』 2권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신찬 만요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편집하였다는 것이 일반설이지만, 이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와카집으로 『관가어집(菅家御集)』등이 있지만, 후세의 위작이 다수 들어있다는 지적이 있다.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2수의 와카가 채록되어 있다. 육국사의 하나인 일본삼대실록의 편자이기도 하다. 일본삼대실록은 좌천 직후의 엔기 원년(901년) 8월에 완성되었다. 다만, 좌천되었기 때문에 미치자네의 이름은 편찬자의 명단에서는 빠져 있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스가와라 가문의 사숙인 칸케로카(菅家廊下, 산인테이(山陰停))를 주재하면서, 인재를 육성하였다. 한때는 일본 조정에 그 출신자가 100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은 이후, 수도에서는 재난이 빈발했다. 우선 미치자네의 정적이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엔기 9년(909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들어 죽은 것을 시작으로, 다이고 천황의 황자이자 동궁이었던 야스아키라 친왕(保明親王)도 엔기 23년(923년)에 서거(친왕은 도키히라의 조카였다), 친왕의 아들로 황태손(皇太孫) 요시요리 왕(慶頼王)도 엔쵸(延長) 3년(925년)에 사망하였다. 5년 뒤인 엔쵸 8년(930년), 황궁의 청량전(清涼殿)에서 조정 회의가 진행되던 중 갑작스럽게 떨어진 벼락으로, 앞서 쇼타이의 변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인 다이나곤 후지와라노 기요유키(藤原清貫)를 비롯한 조정의 많은 요인들이 다치거나 죽기까지 했다(청량전 낙뢰 사건). 낙뢰의 현장에 있었던 다이고 천황 자신도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컨디션이 무너진 나머지 3개월 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것을 미치자네의 저주로 여겨 두려워한 조정은 결국 미치자네의 죄를 사면하고 관위를 추증했으며 그의 자손들도 유배형에서 풀어주고 교토로 불러들였다. 엔기 23년(923년) 4월 20일(5월 13일)에는 미치자네가 좌천되기 이전 직위였던 우대신으로 복구되고 정2위 관위를 추증한 것을 시작으로 쇼랴쿠(正暦) 4년(993년)에는 정1위 좌대신(左大臣), 같은 해에 다시 태정대신에 추증되었다(이러한 명예 회복의 배경에는 미치자네를 참소한 도키히라가 요절하여 대가 이어지지 못한 것에 그치지 않고 우다 천황의 측근으로서 미치자네에게 호의적이던 도키히라의 동생 다다히라가 후지와라 가문의 적통을 잇게 된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청량전 낙뢰 사건은 미치자네의 원령을 '뇌신(雷神)' 즉 벼락의 신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뢰천신(火雷天神)을 제사지내던 교토에 기타노 덴만구(北野天満宮)를 지어 미치자네의 재앙을 가라앉히고자 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에서는 백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대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것을 미치자네의 저주로 여겨 두려워하게 되었고, 「천신님(天神様)」으로서의 미치자네에 대한 천신 신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각지에 모셔지게 된 「천신님」은 재해의 기억이 사그라들고 미치자네가 생전에 뛰어난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점 등으로 해서, 차츰 흉폭한 벼락신이 아닌 온화한 학문의 신으로 신앙의 방향이 변화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쇼타이의 변을 소재로 한 『천신기(天神記)』, 『스가와라 전수 수습감(菅原伝授手習鑑)』, 『덴만구 채종어공(天満宮菜種御供)』 등이 공연되었으며 특히 『스가와라 전수 수습감』은 인형 조루리, 가부키로 상연되어 크게 히트를 쳤으며 기다유 교겐(義太夫狂言)의 3대 명작 중의 하나로 여겨져 오늘날까지 이 작품의 일부가 인기 상연 종목으로서 공연되고 있다. 근대, 특히 2차 대전 이전에는 황실의 충신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었다. 지폐 인물로도 채택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천황을 원망하지 않고 근신함으로써 충성을 다한 미치자네의 모습을 히로세 다케오(広瀬武夫)가 한시(漢詩) 「정기가(正気歌)」에 「간구(菅公) 쓰쿠시(筑紫)의 달이 되려나」라고 읊고 문부성(文部省)의 창가(唱歌)로도 불렸는데, 1928년(쇼와 3년)에 고단샤(講談社) 발행지 「킹」에서 「(주상께서) 내려주셨던 의복이 지금 여기에 있어/날마다 받들고 남은 향기를 맡고 있네(恩賜の御衣今此に在り捧持して日毎余香を拝す)」라는 미치자네의 시를 패러디한 「중의 대변이 지금 여기에 있어/날마다 받들고 남은 향기를 맡고 있네(坊主のうんこ今此に在り捧持して日毎余香を拝す)」라는 구절에 대해서 '불경하다'는 비판이 일어, 고단샤나 이카호 온천(伊香保温泉)에 체류 중이던 사장 노마 세이지(野間清治)가 폭한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마쓰오 바쇼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년~1694년 11월 28일(음력 10월 12일)), 또는 마쓰오 주에몬 무네후사 (松尾 忠右衛門 宗房)는 에도 막부 전기의 시인이다. 아명은 긴사쿠(金作)다 그의 생애 동안 바쇼는 공동 하이카이노 렌가 양식에서 그의 작품을 인정받고 있었다. 오늘날, 그는 당시 시대에 홋쿠라 불린 하이쿠의 명인으로 꼽히고 있다. 마쓰오 바쇼의 시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으며, 일본에서 그의 시 중 대다수는 기념물이나 역사적 장소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다. 바쇼는 그의 홋쿠로 서구에서 유명하지만, 그 자신은 그의 최고의 작품이 렌쿠에 참여하고 주도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많은 나의 제자들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홋쿠를 잘 쓸 수 있다. 내가 보여주는 내가 진짜 누구인지는 하이카이 구문과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바쇼는 어린 나이에 시에 입문했으며, 그 스스로를 에도의 지적인 풍경에 합침으로써, 그는 일본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교사로써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북쪽, 동쪽, 서쪽을 비롯한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문학계가 있는 사회적, 도시적 삶에서 벗어났다. 그의 시는 그 주위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영향을 받았으며, 간단한 요소들을 통해 풍경에 대한 감정을 압축시켰다.하이쿠의 성인(俳聖, 배성)으로 칭해질 정도로 일본 하이쿠 역사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쇼는 배호(하이쿠 시인의 필명)이다. 본명은 무네후사(宗房) 지금의 미에현 이가시인 이가우에노 출신으로 재야무사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농사도 짓고 했다는 듯. 13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 생활이 어려워져 지역 유지인 토도 가에 시종으로 들어간다. 무네후사가 모시던 사람은 두 살 위인 토도 요시타다였는데 이 둘은 함께 하이쿠를 배웠다. 요시타다를 모시던 마츠오는 따르던 주군이 25살로 요절하자 갈 곳이 없어졌는데 무사를 그만두고 젊은 나이에 기타무라 기긴에게 사사한 뒤 하이쿠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자주 여행을 다니며 노자라시 기행, 가시마 기행 등의 기행문을 남겼다. 제자 중 카와이 소라와 함께 겐로쿠 2년(1689년)부터 반년간 도호쿠, 호쿠리쿠 지방을 돌며 기후현 오가키까지 여행하고 남긴 '오쿠로 가는 작은 길(奥の細道, 오쿠노호소미치)'이라는 기행문이 가장 유명하다. 최후도 여행 도중의 객사였다. 향년 51세. 쇼몬짓테쓰(蕉門十哲)라고 불리는 다카라이 기카쿠, 핫토리 란세쓰, 모리카와 교리쿠, 무카이 교라이, 가가미 시코, 나이토 조소, 스기야마 산푸, 다치바나 호쿠시, 시다 야바, 오치 에쓰진 등 특히 뛰어난 수제자 10명을 포함한 각 지역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사진 :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