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의 膏肓
無恤 이 완 순
AIDS만큼 세인의 가슴에 크게 회자된 병은 없었다. 가히 천형이라고 할 만큼 치명적인 위력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각 계층마다 서로 다른 독특한 병인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에 대해서도 그렇다.
종교계는 하늘이 타락한 인간에게 내리는 벌로, 환경학자는 생태계파괴가 불러온 병으로, 미국은 소련에게 소련은 미국에게 상대국 미생물 실험실에서 유전자조작에 의해 생성된 바이러스가 유출되어 발생한 병으로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는 아프리카 녹색원숭이가 전염시킨 병으로 동물과 인간의 종간전염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병인이야 어떻든 AIDS는 전 세계가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임에 틀림없다. 우리 모두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감염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진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자제하고, 속히 실추된 성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는 AIDS보다 훨씬 더 심각한 병이 창궐하고 있다. 개인적인 윤리회복과 물리화학적인 요법에는 전혀 효험이 없는 전염병일뿐더러 이병율이 거의 100%에 가깝다. 남녀노소, 성속, 귀천, 지위의 고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감염되어 있다. 더러는 심각한 폐해와 착란증세 등, 신경정신과적 질환으로 진화하고 있어 자못 큰 걱정이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앓고 있는 이 병은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전염경로나 병인을 몰라 현재로써는 대응책이 전무한 포악무도한 반문명병이다. 선진국의 기치를 무색하게 하고도 남을 만한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민족적인 고황이다. 뚜렷한 병증도 일정한 병세도 없는 돌림병이다. 유독 한국에만 창궐하는 병이지만 아직 병증조차 파악하지 못해 학계도 정치계도 경제계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일부 젊은이들이 병명을 제시하고 나와 어렴풋하게나마 병의 실체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매우 풍자적이고 자괴어린 진단이며 병명이다. 그들의 말마따나 우리나라 국민은 모두 심각한 기억력상실증을 앓고 있다. 이렇게 기성세대가 앓고 있는 망각증을 그들은 AIDS에 빗대 후천성IQ결핍증, 즉 AIQS라고 부른다.
사실 젊은이들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모두 후천적 기억력결핍증에 허덕이고 있다. 물론 관제화한 언론의 뉴스 아닌 홍보세례, 뉴스 먹기 식의 다른 뉴스 띄우기, 뉴스 조작, 우리들의 눈과 귀를 병들게 하는 광고성뉴스와 뉴스차단, 허접스럽게 발표를 서두르는 무책임하고 까마득한 미래에 펼칠 복지정책의 융단폭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고 빠르게 우리의 아픔과 수치스런 사건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생명을 권력의 제물로 내던지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일본을 우방처럼 여기다가 독도의 침탈을 목전에 두고 있다. 36년간의 살인적인 압제와 수탈을 까맣게 잊고 주적을 슬그머니 북한으로 돌려놓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친일파의 횡행을 방치했다가 식민지근대화론이란 반민족적 역사관에 학계가 모두 오염되었고, 시름시름 민족적 자긍심을 잃어 버리고 있다. 또 세계 어디에서도 진정한 우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미국에 모든 외교를 의지하다가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뒤통수를 맞고 허둥대고 있다.
우리는 6.25 동족상잔을 잊고 산다. 반공은 구호 일뿐 이렇다 할 멸공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하나 없이 반공을 단지 정권차원에서 해석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이용한다. 동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고 오로지 물리쳐야 할 적으로만 간주하니 문제가 풀릴 일이 없다.
또, 우리는 유신독재의 허상을, YH사건의 교훈을,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을 벌써 잊었다. 수구정권의 실책으로 맞은 IMF환란을 잊고, 그들의 술책에 속아 수구세력에 다시 권력을 넘겨주었다가 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살인적인 물가고에 허덕이며 사상 최고의 국가부채 증가 여파로 또다시 IMF환란을 맞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광주 인화학교의 성폭력 사건을 잊고 있다가 영화 “도가니” 로 인해 그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때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제이, 제삼의 장애자성폭력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성폭행한 교사와 종교재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구조적 문제, 소위 “불멸의 신성가족” 판검사, 종교인, 지역사회 특권층이 엮여 기득권을 옹호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현대 한국인의 망각증이다.
또한,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 북을 통해 “영화 도가니 같은 일을 막기 위해 2007년 노무현정부가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한나라당과 사회복지재단을 운영하는 종교단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며 영화팬들은 법 개정과 재수사를 촉구하는 국회 앞 1인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는 사회복지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까지 인화학교 사건을 잊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그러면 현재 정부당국과 정치권의 대응은 어떤가? 또 종교계의 대응은 적절한가? 결코 아니다. 모두 AIQS에 걸려 있다. 어쩌면 종교계가 더 고질적인 무감각증에 걸려있는 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배 이외에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기도만으로는 이 암담한 상황을 타계할 수 없다. 아무리 기득권자 혹은 권력층의 발호가 극심하다고 해도 국민들이 잊지 않고 자꾸 문제를 제기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영화 도가니로 촉발된 인화학교사건의 재수사도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언제, 어떻게 적당히 끝낼지 모른다. 영화의 영향으로 어쩔 수 없이 재수사를 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지만 재수사하여 성폭행한 사람 몇몇만 벌주는 것으로 끝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사자 몇 명 벌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흥분하고 있는 문제의 초점을 잘 파악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국민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여당뿐만 아니라 야당도 마찬가지다. 대증요법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할 만큼 근본적으로 썩었다.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뿐만 아니라, 성범죄에 취약한 문화를 바꾸는 대대적 내과수술이 불가피하다. 또 건강한 성문화와 잃어버린 도덕성을 되찾는 인간성회복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국민 모두가 앓고 있는 AIQS를 하루 빨리 치료해야 한다. 이것은 실종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이고, 우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일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치료가 될 수는 없다. 원인을 찾아 반성함이 없이 묻어버리려고만 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다. 아픔은 아픔대로, 치부는 치부대로 모두 내보이고 기억해야 한다. 잘못은 잘못대로 적나라하게 고하고, 그 만큼의 벌을 받을 때 그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인권유린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밝혀내고 응당한 처벌을 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도록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함에 있어 AIQS가 가장 악질적인 적이고 가장 무서운 병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해 갑니다.
안녕하시지요?
늘 빚진 자의 가슴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모든 것에 소홀해서....
평화 누리시길 빕니다.
그래요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주 들러 무훌님의 글을 읽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좋지요.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