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황진이(黃眞伊)에 얽힌 이야기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은 자신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에서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성정은 ‘은근과 끈기’라고 밝혔다.
특히
이 은근과 끈기는 남자보다는 여성에서 흔히 보였던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규방 깊숙이 자리한 사대부집 여성들은 종족 보존 역할만 강요 당했을 뿐
여자로서 가슴속 깊이 숨어있는 본능과 감정의 발산은
가족 내 뿐만 아니라 사회의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몇 개의 대문을 통과해야 거처가 나오는 구조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대갓집 정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여자였다.
남자들은
사랑채라는 문간방에 거처를 정하고 출입이 자유로웠던 조상들의 생활은
이제 보면 안타까우리만큼 편협한 의식구조를 갖춘 답답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같은 여성이지만 기방에 적을 둔 여자 즉 기생은
이에 비하면 다소 감정 표출이 활발했다.
물론 남자들의
편협된 이기심과 성욕 해소의 방편으로 생겨난 이들은
어쩜 슬픈 역사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 부른다.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것이다.
일부 기생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달관하고
가슴속에 맺힌 한과 눈물을 새롭게 승화 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화담 서경덕을 사랑한 황진이이다.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명월(明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송도 기생이다.
그녀는 송도에 삼절이 있는데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 황진이 자신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명기다.
수많은 남자들이 황진이를 연모하고 쫓아 다녔어도
그녀 자신이 바라던 사람은 화담뿐이었다.
황진이는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인 서경덕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홀로 독야 청정한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하루는 황진이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자주 화담의 초막을 향했다.
초막에서 들려오는 화담의 탄식 소리를 들은 황진이는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온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정에 여린 마음 하나 가눌길 없으니 하는 일마다 다 어렵구나
눈 덮인 산은 깊고 높아 내 사랑 그 님이 올수 있을까마는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와 스쳐가는 바람 소리조차 혹시 그 님이 오는 소리가 아닐까
황진이는 화담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담은 끝내 황진이의 간절한 사랑을 외면했다.
물론 마음속 깊은 곳에 흐르는 그리움이야
누가 볼 수 있었겠으며 막을 수 있었겠는가.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그를 그리며 노래한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있을 손가
주야로 흘러 드니 옛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아니 오는구나
산은 오래돼도 그대로 있지만 물이야 밤낮으로 흐르니 옛물이 없겠지
사랑하던 그이도 물과 같구나 한번가니 다시볼수 없어라
단풍잎새 붉은 모습 , 노란 은행잎 바닥에 굴러도,
눈이 한송이 내려도 무덤덤한 감성으로 변해버린 새태여, 적막한 세상이여
황진이(黃眞伊)를 연모하던 유명 인사는 많았다.
‘청산리 벽계수야’로 유명한 시조의 등장인물 벽계수(碧溪守)가 있다.
그는 조선의 종신(宗臣)으로 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여자를 멀리했는데 황진이의 명성을 듣고도 처음에는 코웃음을 칠 정도였다.
어느 날
벽계수가 밤중에 송도 만월대를 산책한 후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가려 하자 황진이가 그를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倒滄海)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한데 쉬어간들 어쩌리
푸른 산속 시냇물아 흐르기 쉽다고 자랑하지 마라
흐르고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면 너는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데
달 밝고 한적한 이곳에서 잠깐 쉬어 간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라는
뜻으로 자신을 못 본 채 하며 돌아가는
선비 벽계수(碧溪守)를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碧溪水)로 비유하고 밝은 달 명월(明月)을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明月)로 바꿔 표현했다.
정말 놀라운 천재(天才)가 부럽다.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篳談)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황진이(黃眞伊)는 송도 명기다.
미모와 예술에 재능이 출중해 온 나라에 이름이 퍼졌다.
당시 종실에
벽계수란 이가 있어 황진이(黃眞伊)를 한번 만나 보고자 했으나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벽계수는 주변 인물 이달(李達)에게 황진이와의 만남을 부탁했다.
이달은 “眞伊를 한번 보려거든 내 말대로 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벽계수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이달(李達)의 주문은
“ 어린 동자에게 거문고를 들고 따르게 하고 당신은 작은 나귀에 올라 황진이 집
앞을 지나 집 근처 누각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시오
. 그러면
그녀가 와서 옆에 앉을 것이니 관심이 없는 듯 본체만체 일어나 돌아오시오.
황진이가 당신 뒤를 따를 것이요.
한참을 뒤돌아 보지 않으면 일이 성사될 것이고
돌아보면 허사가 될 것이요” 벽계수는 이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이달(李達)의 말과 같이 황진이가 뒤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벽계수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제는 됐구나 하고 희열을 만끽하면서
능청스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청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노랫소리가 갑작스레 들린다.
벽계수는
이 노랫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나귀에서 떨어졌다.
이를 본 황진이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명사(名士)인 줄 알았더니 한낱 풍류남자(風流男․바람쟁이)이군”
하고는 그길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근엄한 선비 벽계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고 전한다.
황진이는 이미 벽계수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나갔던 황진이는
벽계수의 도도함에 어쩌면 하고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확인 한 방법 즉 아무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기품 있는
방법에 벽계수가 넘어갔다.
헤프지 않은 몸가짐, 골라서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
그래서 황진이를 명기라고 했나 보다.
반면에
사랑을 얻으려 하던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한 벽계수의 처지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타락과 방종에 찌든 땅에서 한줄기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령은 약속의 땅에 도달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한 여인이
뒤를 돌아 본 순간 그녀는 소금 기둥으로 변한다.
시쳇말로 희망이 낙하산이 된 것이다.
조금만 참고 순간을 이겨내면 더 큰 행복이 다가오는데도
이를 못 참는 남자의 조급함이여, 통한의 아쉬움이여...
조선시대 살았던 황진이(黃眞伊)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각자였다.
본능을 감추고 감정을 숨겨야 정숙하고 존경받는 어머니요 현모양처였던 시대에
황진이는 이미 자신의 뜻을 적나라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신여성이었다.
물론 아무도 알지 못한 자기만의 사정 때문에
기방에 몸을 담았지만 황진이를 보면 5천 년 역사 속의 한국인을 보는 듯하다.
감출 듯 뒤돌아선 듯하면서도 은연중에 과시할 줄 알았던 우리 민족
그것도 한 많고 가련한 처지의 한 여성이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눈물과 감성을 볼 수 있다.
황진이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과감히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남다른 용기가 있었다.
그것이 기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처지를 달관한 자신 있는 삶 그리고 머리와 가슴속에 꽉 찬 정열 때문이었다.
권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상대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신 사고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한 여성으로서
어머니가 되고 싶고 한 남자의 지어미가 되고 싶은 욕망은 버릴 수 없었다.
황진이 나이
27세 때 선전관이며 당대 명창인 이사종(李士宗)을 만난다.
황진이가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스승 화담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스승이
생전에 거처하던 서사정 초당에 자주 들러 옛날을 회상하곤 했다.
그날도 화담의 거처를 들렸다가 오는 길에 송도의 절경 박연폭포와 송악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이사종을 만난 것이다.
명사를 알아보는 황진이는 그와 함께 6년을 보낸다.
어우야담(於于野潭)에 이런 글이 있다.
황진이와 이사종은 뜻이 맞아 함께 지냈다.
황진이는 전 재산을 정리하였고 두 사람은 황진이 집에서
3년을 살고 이사종 집에서 3년을 살았다.
기생과 유부남의
이 같은 행동을 지금도 이해 못 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 옛날
그들은 수 세기의 사고를 뛰어넘어 계약 결혼을 한 것이다.
자신을 탐하고자 하는 뭇 남성들의 거짓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의 품에서 가정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사종과 함께
마치 그의 아내처럼 신혼 같은 6년을 보낸 황진이는
이사종의 임기 만료로 헤어지게 된다.
이사 종이 서울로 복귀할 때 그녀는 눈물로 그를 보낸다.
그러고는 밤마다 그가 그리워 애를 태운다.
찬바람이 휘몰아친 동짓달 기나긴 어느 날 밤
황진이는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이사종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 둘을 내어
춘풍(春風)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임 없이 홀로 보내야 하는 밤이 너무 길고 지겨워 싹둑 잘라낸 후 사랑의 불꽃을
태웠던 바로 그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님과 함께 하는 날 밤의
길이를 늘리겠다는 애절한 표현이다.
황진이는
시간을 공간화할 줄 알았고 공간을 시간화할 줄 알았다.
이 은유의 천재는 여유 있는 과거를 남겼다가 부족한 현재에 쓸 요량으로
동짓달의 그 밤 시간을 이미 반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또 자신과 이사 종이 정열의 불을 태웠던 그 이불 속을 생각하면서
잘라낸 시간의 반을 그 속에 묻었다.
황진이는
이사종과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이미 생각만은
황홀했던 그 이불 속에 함께 있었다.
조물주가 만든
시간을 인간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까마는 황진이는 해냈다.
독수공방 지겹고 아쉬운 밤의 길이를 그녀 마음대로 조절해버린 것이다.
아울러 자신과 님을 감쌌던 황홀한 그 공간을 사랑의 열기를
더했던 이불 속으로 표현하면서
멀리 있는 연인이
그날 밤을 회상토록 한 절묘한 방법은 그녀가 아니면
그 누가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깊으면 신(神)이 되는가,
요정(妖精)이 되는가
[출처] 기생 황진이(黃眞伊)에 얽힌 이야기|작성자 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