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일반 종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 위해 이렇게 해주셨다는 것을 먼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해 하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렇게 해야, 저렇게 해야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에 처했을 때 우리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대신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해결 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6시간동안 고통당하시다가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른편과 왼편에 강도 두 명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에 최고로 극악한 범죄자들을 죽이는 형틀로써 죄인을 나무에 못 박아 고통 중에 죽어가게 하는 형입니다. 보통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도 하루가 지나야 죽습니다. 그런데 33세 되신 예수님이 6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 앞날 밤에 채찍을 맞으며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 그것이 제 9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큰 지진과 함께 땅이 어두워진 현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잠시 동안 일어난 현상도 아니고 무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일어난 현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음 당하실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징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피조물인 해조차 빛을 잃고 땅도 흔들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의 희생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빛보다 더 찬란히 빛난 것입니다. 창조주의 놀라운 사랑의 빛 앞에 태양도 빛을 잃은 것입니다.
2.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 안에서 나타난 징조입니다. 휘장은 성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기 위해 쳐놓은 막입니다. 지성소에는 제사장 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사장도 들어갈 때는 반드시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 당하실 때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악의 담이 예수님의 희생의 속죄를 통해 허물어졌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갈1:4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라고 했습니다.
배를 만들 때 바닷물에 닿는 부분은 녹이 잘 슬기 때문에 그 부분에 아연을 입힌다고 합니다. 철이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아연을 덧입히는 것은 아연이 녹이 안 슬어서가 아니라 놀랍게도 아연은 녹이 더 잘 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연을 사용하는 것은 철에 슬 녹을 유도해서 아연에 녹이 슬게 하므로 철이 부식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아연과 철이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철에 아연을 입히면 철에 슬 녹이 아연으로 옮겨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녹과 같은 우리의 죄를 당신에게 옮겨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막힌 휘장을 찢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죽음을 통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했으니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나오는 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히10:19이하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3.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이 사형 당한 이유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 말하자면 신성모독죄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십자가에 매달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즉 이것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죽음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가장 잔인한 고문인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 영혼까지 아버지의 손에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부터 죽음 당하실 때까지, 그리고 부활하여 다시 아버지께로 승천하여 가실 때까지 그 주장이나 가르침이 한결같습니다. 만약 그 증거가 이랬다저랬다 하면 우리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했는데 내일 저 말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고 가까이 하겠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말을 뒤집는다면? 잘 될 때와 잘 안 될 때 다르면 어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도 이랬다저랬다 하셨다면? 그 주장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하거나 약속이 변개되거나 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그의 가르침도 오직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다 하셨고, 그러한 주장 때문에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지만 죽음의 순간에서 어떤 고문과 위협 속에서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므로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야말로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 영혼을 누구에게 의탁해야 하는가를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낡은 옷과 같은 육신을 벗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옷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이 중요하듯 육신이 본질이 아니라 영혼이 본질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썩어질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을 영혼을 위해 준비하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집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을 위해 집이 있지, 집을 위해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 옷이 아무리 화려해도 몸을 위해 옷이 있지, 옷을 위해 몸이 있지 않습니다. 즉 집이나 옷은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에만 필요로 하는 것일 뿐,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영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영혼이 들어갈 영원한 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르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면서 자기 육신을 위해서는 온갖 준비를 합니다. 영혼이 거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수고하지 않으면서 잠시 누릴 육신의 안식과 만족을 위해 인생을 다 보냅니다. 헛되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세월을 낭비하고 허비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말씀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라도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쌓은 것이 무엇이 되겠느냐?” 그것이 네 영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자기 영혼을 위해 사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아니 반드시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반드시 드려야 할 간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됨을 약속하셨지만 믿지 않고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떤 순간에라도 이처럼 우리도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는 자는 참된 안식과 영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이 귀한 진리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4.이러한 죽음을 지켜 본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그 날 한 번 처형을 책임 맡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처형했던 장례집행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온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저가 진실로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호스피스는 죽음이 가까워 온 환자에게 목숨 연명술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돕는 사람입니다. 30년 이상 호스피스 일을 하신 어떤 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명하는 장면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끝까지 손을 잡고 위로하고 편히 가시도록 도와주었는데, 자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답니다.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한 순간에 구별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 두려움이나 조바심이 없고 도리어 자기보다 더 편안해서 더 이상 위로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가는 분도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억울해하고 서러워하고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신세한탄을 하는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고 하면서 그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노라고 간증했습니다.
이 백부장도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을 처형시키면서 사람들이 막상 죽어갈 때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와 같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못 박을 때 모든 이들이 저주하고 원망하고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온갖 욕설을 내뱉고 레이저를 쏘는데 예수님은 조금의 원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못 박는 군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부터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았을 때 이 백부장은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도무지 보통 사람으로는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그는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십자가 앞에서 눈물이 말랐다면 우리는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드라마 보다가도, 영화 보다가도 주인공이 슬퍼서 눈물 흘리면서, 때때로 자기 신세 처량하다고 눈물 흘리면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생각해도 눈물이 말랐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돌같이 굳은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울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돌아가신 것을 전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을 더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며 진실로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시간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