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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서적 소개
개혁주의 신앙을 지향해 나가는 분들에게 유익하며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기록하여 계시해 주신 본의에 의해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하고자 하여, 저자의 서문과 역자의 서문을 함께 올립니다. 본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발행 예정일은 9월 15일입니다. 책의 정가는 50,000원이나 올해 12월까지 특별판매 기간을 정해 본 까페를 통해서 구입하시는 분들에게는 35,000원으로 제공해 드리나, 우편배달비를 포함하여 40,000원으로 책정하겠습니다. 하오니, 소개해 드리는 저자와 역자의 서문을 읽으시고 구입하여 소유하기를 마음에 정하여 원하시는 분은 먼저 댓글로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일정한 기간에 구매자의 수가 결정되어 구입하게 되면 구입 계좌번호를 정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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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의 주석 시리즈 :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요한복음’
저자(게르하르트 마이어) 서문
마이어 박사는 요한복음의 한국어 번역을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짧은 서문을 보내왔다. 뒤에 긴 서문이 소개되므로 저자는 이곳에서 핵심적인 것만 소개한다.
요한복음은 고대 기독교 문서의 증거에 따르면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쓰였다. 이것은 아마도 70년대, 혹은 80년대인 것 같다. 요한복음서 진술로부터(예: 19:38; 21:24) 우리는 저작자가 목격자임을 알 수 있다. 고대 문헌은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가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고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는 데에 입을 모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매우 오래되고 매우 귀중한 문헌 앞에 서 있다.
요한복음은 지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예: 4:20; 18:1). 저자는 히브리어(예: 1:38, 41, 42; 19:13, 17; 20:16)와 헬라어(예: 12:20 이하)를 사용하는 유대인이다. 그런데 요한의 언어 사용이 수수께끼이다. 그의 복음서를 잘 보면 사용하는 언어 스타일이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문체와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나온 그대로 말씀하셨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11:25 이하(“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에서는 요한복음 문체로 말씀하시고, 반대로4:46-53(왕의 신하 아들을 치료하심)에서는 공관복음적 어투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두 가지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를 가르치실 때는 대중에게 가르치실 때와 다른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공관복음을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썼다. 기존 복음서를 대치하려고 의도적으로 다르게 쓴 책이 아니다. 요한이 공관복음에 있는 대부분의 내용을 보도하지 않는 이유가 그 보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을 보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20:31에서 그 목적을 매우 분명하게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진술한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이 믿음이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역자(송다니엘) 서문
저자 마이어 박사는 독일 국가교회(Landeskirche) 소속이면서도 복음적인 신학과 삶을 견지하는 학자이다. 비록 국가교회는 성경비평가들과 종교혼합주의자 손에 넘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소수의 신실한 신자들이 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 경건주의 계통 교회들이 연합을 이루어 국가교회에 남아 있으므로(Gnadauer Gemeinschaftsverband) 마이어는 이들의 신학적, 신앙적 지주가 된다. 그가 성경비평과 종교혼합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국가교회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 영방교회의 수장(비숍)을 역임하면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경건주의자들의 지원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독일에 적지 않은 복음주의 신자들이 있다. 그의 주석이 이들에게 애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학문적인 논문에도 마이어 주석은 인용된다. 그러나 그가 국가교회 소속이라는 이유로 근본주의 성향의 신자들에게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마이어 주석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성경해석학에 따른 정밀한 주석
마이어 주석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해석학“ 원칙에 따른 매우 정확한 주석이라는 점이다. 그는 정밀한 학문적 분석을 바탕으로 주석하면서 항상 교회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그가 성경을 해석한 방법은 도표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책 뒤에 부록으로 싣는다. 정확한 성경 해석이 왜 필요한가? 성경은 계시의 책이기에 우리는 계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올바로 알고 그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정확한 성경 이해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하나님 이해와 구원이 직결되기 때문이다(계시가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구원의 길을 올바로 아는 길은 성경 외에는 없으므로, 올바른 성경 이해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올바르고 깊은 성경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을 읽되 학문적인 주석 책을 참고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신앙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신다. 성경 읽기나 연구에서 빠지기 쉬운 일반적인 오류는 독자가 이미 대답을 가지고(혹은 해석의 주관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므로 어떠한 본문을 대할지라도 항상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을 읽을지라도 생각과 삶이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독일 주석가들의 특징은 엄밀함과 정확함인데, 이러한 이유로 본서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해설이 되었다. 본 주석을 읽는 사람은 성경 해석이 매우 정밀한 과학임을 깨달을 것이다. 성경은 결코 감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감성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본 주석서가 상당한 도전이 된다. 자기 느낌, 자기가 은혜받은 것, 결국 자기 생각에 자기가 감동하고 자기가 은혜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본문(계시,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성경해석학의 원칙에 따라 마이어는 당시의 많은 문헌과 성경 구절을 연관 짓는다. 이를 통해 성경 구절의 역사적 배경을 밝히려고 애쓴다. 그는 당시의 유대문헌뿐만 아니라 많은 고대문헌을 섭렵하여 본문을 고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고대문헌을 접할 수 있다: 다양한 랍비문서, 탈무드, 미쉬나, 쿰란문서, 외경, 가경, 위경, 고대 근동 문서, 그리스 로마 문서, 요세푸스 저작 등. 또한 당시 풍습과 지리에 관한 해박하고 정밀한 지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경을 정밀하고 생생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성경 주석은 보통 너무나 학문적이어서 주석한 내용과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계시는 듣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할 것을 요구하기에 성경 주석은 독자의 삶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즉, 말씀이 추상적인 이론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인격적으로 듣고 자기가 변화되어야 한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과 같은 품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강해식 주석이나 설교는 그 성격상 본문 분석이나 해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이것을 감안하여 마이어 주석은 학문적이지만 반드시 실제 삶과 연결이 되도록 했다. 각 단원을 주석한 후에 별도로 “성경공부” 문제를 만들어 주석 내용을 정리하며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이 주석과 성경을 잘 이해했는지를 검사하게 된다.
성경비판에 대한 변증서
18세기에 성경비평이 나온 이후 보수적 신학자는 주석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보적 학자들이 상당히 날카롭게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의심하고 부인하기 때문이다. 독일 신학대학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학을 하고, 주석서도 그렇게 저술하기 때문에 평신도까지도 그러한 주석서를 접하게 된다. 예를 들면, “복음서 기자들은 사실을 기록하는데 관심이 없었다”라는 말이 정설이 되었다(에타 린네만 교수는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에서 성경비평가들은 “증인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꼬집었다.). 즉 복음서는 전혀 사실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적 주석가는 주석 과정에서 자주 이에 변증을 해야 하는 책임을 느낀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고 믿는 신학자는 거의 없기에 그들은 전통적 주석과 전혀 다르게 주석한다. 그러므로 마이어는 이러한 잘못을 비판하고 변증해야 했다. 성경비평에 집중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변증이 큰 도움이 된다. 성경영감설을 믿는 평신도 독자 입장에서는 마이어가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다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위와 같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비평학적인 주석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절이 역사적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주석을 쓰는 학자는 의심받는 구절의 진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저자는 이 구절들을 전부 논증했다. 따라서 독자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성경비평학에서는 복음서를 전부 저자 미상이라고 하며, 요한복음을 교회 편집자들이 여러 자료를 모아서 작성한 것으로 본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서들이 위조, 혹은 날조가 아닌 정말로 신실한 증인들의 증언에 기초한 책임을 역설한다. 예수님에 대한 전승이 신뢰할 만하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곳곳에 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 먼저, 요한은 자신이 본 그대로 묘사했으며, 이 묘사는 유대인의 풍습에 맞고 사실적으로 기술했으므로 나중에 누가 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발상(주장)은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20:5 주석).
또한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에 가본 적도 없는 이방인에 의해 쓰였다든지, 역사 기록과 거의 관계가 없는 날조라는 것이 성경비평학에서는 정설이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증명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 진술들은 복음서들의 전승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준다. 이것은 이 증인들이 얼마나 양심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는지를 보여 준다. 속임수를 사용하거나 내용을 고안하고 창작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 그들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 이들에게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만약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서도 사실 보도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후안무치의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독일 중고등학교 종교시간에서 배우는 것과 같이 “역사적 문서”와 “신앙의 문서”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문서”인 동시에 “신앙의 문서”이다.”(19:35 주석에서).
마이어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충했다는 말을 매우 자주 하는데,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기록이 공관복음의 기록과 많이 차이가 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예루살렘에 가본 적도 없으며 예수님을 전혀 몰라 “복음서를 창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성경비평에 대응하여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저자는 공관복음의 기록을 소상히 알고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예수님 곁에서 겪은 자로서 공관복음서가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예수님 말씀이나 사건을 보도했다.”
예수님과 구약
마이어는 신약과 구약, 예수님과 구약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이것은 사실 당연하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전부 구약과 연관시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인 구약 연구를 통해 진리를 배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예언을 포함한 구약 말씀을 메시아의 전권으로 해석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이 주석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구약이 새롭게 빛이 난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루터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으나, 루터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두 가지를 붙잡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결단도 중요시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를 조화하려고 하지 않고 본문에 주어진 대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주 권 가르침에 익숙한 역자에게 이것은 큰 도전이 되었다. 루터와 칼빈주의 그리고 루터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구원론에서 인간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있다. 루터에서 칼빈주의와 루터주의가 나왔다. 이 세 진영의 공통점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터 :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자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칼빈 및 칼빈주의 :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었다. 멸망받을 자도 예정되었다. 아무도 이 하나님의 작정을 피할 수 없다.
루터주의(게르하르트 마이어도 포함) :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럼에도 인간이 이것을 결단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결단이라는 사실 사이에는 인간이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
루터와 개혁주의, 그리고 루터주의 모두는 구원은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다만 강조점이 다르다. 그러나 루터주의는 인간의 결단을 좀 더 강조하고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이 구원을 지켜 주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말씀 실천과 신앙생활에서 오는 고난을 강조함
성경을 이해할지라도 실천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더구나 이해는 실천을 통해 더 깊어지며 이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인격적인 교제로 이끈다. 그러므로 “실천은 인식의 전제”가 된다. 실천 없는 올바른 인식은 없다. 종교개혁은 성경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실천 운동이다. 루터의 설교를 보면 항상 실천적인 교훈을 준다. 내가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 어떠한 실천적인 가르침을 받았는가? 내가 당장에 내 삶에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루터는 항상 이것을 묻고 대답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마이어도 주석에 실천을 대단히 강조하며 모든 주석이 실천과 관련되므로 추상적인 내용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것 자체가 새로운 깨달음과 계시에 맞게 생각과 삶을 바꾸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것은 대단한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경 연구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게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깨달을 때는 천국에 온 것 같고, 자기 죄를 깨닫고 이것을 회개하려면 지옥에 내려가야 할 만큼 괴롭다. 이것을 스스로 잘 하는 신자가 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기에 하나님은 많은 고난을 보내어 우리를 치신다. 우리는 이것을 이겨 가면서 겸손해져서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Anfechtung)은 루터의 설교에 너무 많이 나와 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정도이다. 개혁주의에서도 청교도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마이어는 루터주의 전통에 있어 고난을 상당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성경 전체가 고난을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성자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마이어가 고난을 강조하는 이유는 말씀의 요구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실제로 자기도 이렇게 고난당하고 주위에 대부분의 성도가 당하는 것을 보아 온 분명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핍박 없는 기독교는 없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항상 마음의 평안을 누릴 것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14:27 해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유일하게 예수님 제자에게만 적용되는 평안이며, 원형경기장에서의 죽음과 또한 칼과 테러의 위협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공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평안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가 “너희”, “너희에게”라는 말을 살펴보면 대답이 나온다: 그의 제자가 되면 이 평안을 얻는다! 그것은 꿈이나 갈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것이 현실이 된다. 이 평안은 제자들이 박해당하고 고문을 당할지라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기쁨으로 채워진다. 평안 안에서 그들의 믿음도 성장한다. 그의 평안은 외적으로 두려운 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머물러 있다. 계속 존재하는 악의 세력을 눈에 보면서도 평안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십자가의 길에서도 예수님을 좇을 수 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평안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것을 주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세에는 세상의 미움에 더해서 교회 내부에서도 미움을 받는다”(15:18 주석에서). 그러므로 본 주석서는 하나님 말씀을 풀이했을 뿐만 아니라 각 말씀에 대한 진실한 개인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본 주석과 보수적 루터주의
본 주석은 마이어 교수가 본인의 저서 “성경해석학“의 원칙에 따라 해설한 것으로서 정밀한 학문적 분석을 바탕으로 항상 교회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그는 루터교회 목사이기에 각 교단 신학에 익숙해 있는 한국 독자에게는 생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장로교)와 알미니안주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에서는 루터주의에 입각한 주석서가 생소할 것이다. 더구나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성경연구 방식에 익숙지 못한 한국인 독자에게는 이러한 유럽인의 접근 방식이 색다를 수 있다. 역자도 번역하면서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역자는 이 주석의 독특한 부분이나 한국인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루터 신학의 중심 중 하나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본 주석뿐만 아니라 주석 시리즈 전체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독자는 예수님이 죄인에게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실현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영광 돌리는 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케노시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고, 인간으로 낮게 사셨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본연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러나 본 주석은 복음서에 제시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자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무조건 성자 하나님으로만 인식하여 그분의 실존적 삶에 관심이 적은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
3.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실제적인 삶은 무엇인가?
마이어 주석뿐만 아니라 독일의 경건한 주석은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거룩,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설명한다.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신앙생활만 알았던 필자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역자가 주석을 연구하면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50대 중반이었다. 이전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이었다. 독자들도 역자와 같이 이 주석을 읽으면서 복음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4. 예수님과 구약
마이어는 신약과 구약, 예수님과 구약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이것은 사실 당연하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전부 구약과 연관시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직통 계시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 말씀인 구약 연구를 통해 진리를 배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예언을 포함한 구약 말씀을 메시아의 전권으로 해석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이 주석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구약이 새롭게 빛이 난다.
5.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루터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으나, 루터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두 가지를 붙잡았다. 그러므로 본 주석서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결단도 중요시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를 조화하려고 하지 않고 본문에 주어진 대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주권 가르침에 익숙한 역자에게 이것도 도전이 되었다.
6. 주석에 필요한 마이어의 언어 이해력
마이어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에만 능통할 뿐 아니라, 아람어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어에도 뛰어나다. 마태복음은 원래 아람어로 기록된 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므로, 마이어가 주석하면서 이것까지 고려했다. 마이어는 원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본문의 심층 분석을 위해 2015년에 별도로 마태복음 주석서를 발행했다. 이것은 특별히 성경 연구가들을 위한 것이다.
7. 외경
본 주석서에는 외경도 인용된다: 토빗, 유디트, 마카베오기 상하, 지혜서 집회서(Jesus Sirach), 바룩서. 이것은 유대인이 정경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단지 70인 역에 있는 것이었다. 루터도 이것을 영감 받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유익한 책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교에서는 이를 주석서에서도 역사적인 문서로 자주 인용한다. 이것은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주석서에도 외경이 가끔 인용된다.
8. 인용 구절이 약간씩 틀린 경우
루터번역과 한글번역이 서로 장절구분이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말라기서 후반부는 구분이 많이 다르다. 시편에는 한절씩 밀려나오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 필자는 이것을 눈에 띄는 대로 한글 성경에 맞게 수정했다.
일러두기
독일 사람의 한 특징은 글을 밀도 있게 쓴다는 점이다. 저자 마이어 박사도 매우 밀도 있게 표현했으므로,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한다. 이해를 돕고자 역자가 괄호로 보충 설명을 했다. 저자는 관련 성구를 괄호에 넣어 표기했는데, 그 외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거의 역자의 보충 설명이다. 혹시 통일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읽으면서 앞뒤 문장과의 연결점을 잘 찾아보기 바란다. 평신도에게 생소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중요한 성구, 긴 설명이 필요한 것은 역자가 각주에서 설명했다. 원래 주석서에는 각주가 없다. 또한 오해될법한 단어나 문장은 괄호로 독일어 원문을 실었다. 좀 어려운 부분은 단락 끝에 역자가 “번역자 정리”로 표시하고 중요한 부분을 요약했다.
역자는 개역개정을 본문으로 삼았다. 개역개정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다. 그러나 번역된 성경은 품위 있는 문체를 사용해야 하고 독자의 이해도를 고려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본문 의미에 약간 벗어나게 번역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주석은 엄밀한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해야 하므로, 역자가 필요에 따라 원문과 가깝게 직역한 경우도 있다. 의미에 큰 차이가 없으면 혼선을 피하기 위해 개역개정을 그대로 사용했다.
주석은 원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주석했으므로 본문의 순서가 개역개정의 순서와 맞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은 한글 번역 시 순서가 뒤바뀌기 때문이며, 주석가는 원문의 순서로 주석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 중에 문장의 어미가 맞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표현을 바꾼 경우도 있다.
주석서에서 사본학은 가장 기본이 된다. 사본학이란 본문비평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수없이 많은 사본을 서로 대조하여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본이 대부분 일치하고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므로 일반 신자가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므로, 한 단어 일지라도 여러 사본에서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학자는 원문에 가까운 단어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일치하는 본문들을 두고 저자가 올바른 본문 선택을 위해 고심하는 것이 자주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개역개정과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경우에는 역자가 해설을 하거나 각주를 달았다.
본서에는 토빗, 유디트, 마카베오기상하, 지혜서, 집회서(Jesus Sirach), 바룩서와 같은 외경도 인용된다. 이것은 유대인이 정경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단지 70인역에 있는 것이었다. 루터도 이것을 영감 받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것을 단지 유익한 책으로 간주했다. 이러 한 이유로 루터교에서는 이것을 주석서에서도 역사적인 문서로 자주 인용한다. 이것은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본서에도 외경이 가끔 인용된다.
인용 구절이 약간씩 틀린 경우는, 루터성경과 한글성경에서 장절 구분이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라기서 후반부는 구분이 많이 다르다. 시편에는 한 절씩 밀려 나오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 역자는 이것을 눈에 띄는 대로 개역개정에 맞게 수정했다.
EKG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독일 국가교회 찬송가집이다. 이 찬송가는 유감스럽게도 1993년에 대폭 개정되어 마이어가 인용한 깊은 영적인 가사는 대부분 사라졌다.
마이어 주석(Edition C)이 발행되면서 이것이 독일의 경건한 신자의 표준 주석으로 자리를 잡게 되자, 신학생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마이어가 순전한 학문적인 주석도 발행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에 좀 더 학문적인 배경 설명이 필요했고, 또한 성경비평 주석에 학문적으로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Edition C에서는 의도적으로 학문적인 논의를 최대한 억제했다. 이에 부응하여 그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HTA 시리즈를 발행하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이 발행되었다. 마이어는 올해 83세의 고령임에도 계속 이 주석서를 집필하고 있다.
독일 신학 서적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독일 신학책은 모두 자유주의적이다) 때문에 번역물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 자비로 출판하게 되었다. 책을 다량으로 구입해줌으로써 재정적 부담을 줄게 하신 성도님들과 목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행히 매우 성실하고 능력있는 토브북스의 박상민 목사님을 만나 이 책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역자는 이 주석서가 한국 교회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것을 믿는다. 일반적으로 열심이 많은 한국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서 말씀대로 산다면,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에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본다.
저자가 비록 첨단 해석학의 원리를 적용했음에도, 학문적인 책을 읽는다는 느낌은 거의 없고 마치 흥미 있는 문학서적을 읽는 것처럼 내용이 재미있고 이해에 부담이 없다. 역자도 번역 시에 되도록 학문적 용어를 일상용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성경해석에서 믿음의 선조들과의 대화, 그리고 독자들과의 대화를 매우 중요시하므로 마치 친한 친구가 깊은 사랑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 같다. 요한복음을 읽은 독자는 누구든지 마이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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