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4,32).
Ⅴ.“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2838이 청원은 놀라운 것이다.만일 이 청원이 둘째 부분-“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으로만 되어 있다면,그리스도의 희생이‘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주님의 기도의 처음 세 가지 청원 속에 묵시적으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이 문장의 첫째 부분에 따라,먼저 우리가 이 요구 사항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의 청원은 미래를 향하나,우리의 응답이 그 청원에 앞서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이 두 부분은“하오니”라는 한마디로 연결되어 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2839우리는 대담한 신뢰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아버지께 간청하면서,우리를 언제나 더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청하였다.세례의 옷을 입었지만,우리는 죄를 짓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다.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청원으로써,탕자가 그러했던 것처럼,아버지께 돌아서고,세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다.우리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자비심을 동시에 고백하면서 우리는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로 말미암아“속량을,곧 죄의 용서를 받기”(콜로1,14) 때문에,우리의 희망은 굳건하다.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한 유효하고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을 그분의 교회가 집전하는 성사들 안에서 발견한다.
2840그런데,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한,하느님의 넘치는 자비가 우리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그리스도의 몸이 갈라질 수 없듯이,사랑도 갈라질 수 없다.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우리 마음은 다시 닫히고 굳어져서,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게된다.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게 된다.
2841이 청원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주님께서는 예외적으로 이 청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시고,산상 설교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하신다.계약의 신비에 내포된 극히 중요한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다.그러나“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19,26).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2842여기에 나타나는“하오니(하듯이:sicut)”라는 말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단 한 번 나오는 것은 아니다.“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마태5,48).“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서로 사랑하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만일 하느님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면,주님의 계명은 지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그러나 이것은“마음 깊은 곳에서”우러나온 참여,우리 하느님의 거룩함과 자비와 사랑이 담긴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한다.“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갈라5,25)성령께서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똑같은 마음을 갖게 해 주실 수 있다.그리하여 용서의 일치는 가능하게 된다.“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32).
2843그리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 곧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구체화된다.교회 공동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이런 말씀으로 끝맺는다.“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사실 모든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매고 푸는 것이다.당한 모욕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잊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그러나 성령께 자기 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모욕을 동정으로 바꾸며,상심 傷心을 전구 轉求로 변화시켜 기억을 정화한다.
2844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기에 이른다.기도하는 제자는 변화되어 스승의 모습을 닮게 된다.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이다.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만 기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또한 용서는 우리의 세상에서,사랑이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어제와 오늘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재현하고 있다.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그들의 아버지 사이의 화해를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2845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이 용서는 한도 없고 끝도 없다.‘잘못’(루카11,4에 따르면‘죄’,또는 마태6,12에 따르면‘빚’)에 관해서라면,사실 우리는 언제나 빚진 자들이다.“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13,8).거룩하신 삼위의 일치는 모든 관계의 진실성의 근원이며 기준이다.이 일치는 기도 안에서,특히 성찬례 안에서 실현된다.
하느님께서는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하느님께서 그들을 제단에서 돌려보내시면서,먼저 형제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하느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기도로써 평안해지기를 원하십니다.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제물은 우리들 사이의 평화와 화목이며,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백성의 일치입니다.-성 치프리아노,주님의 기도 해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하느님에게 찬양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편50,14-15).
하느님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신처럼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신들이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고 생각한 이교 백성들의 신관에 물들어 있었다.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교도들의 신처럼 배고픔을 느끼는 연약한 신이 아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올바른 제사에 대해 훈계한다.“찬양제물”은 ‘감사제사’로 옮길 수 있다. 구약 시대에 감사제사는 동물제사를 포함한다(2역대29,31참조).그러므로 하느님은 동물제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요청하신다.제사를 지내는 예배자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존해야 한다.겸손과 의존은 올바른 제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마음에 있다.마음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서원을 채우는 것’과 연관된다.하느님은 우리가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신다(크리소스토무스).하느님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감사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를 바라신다(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
시편 50편의 전체적 의미:시편50편은‘충실한 자들,곧 제사로 주님의 계약을 맺은 자들’(5절)에 대해 주님이‘계약 소송’을 제기하는 내용이다.스스로 계약에 충실하다고 하는 이들이 도둑질,간음,언어 남용,속임,중상과 같은 악행(16-20절)을 저지르기 때문이다.하느님은 참된 제사를 위해 찬양제물, 곧 감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시인은 우리가 계명을 잊어버린 채 살지 않도록 경고한다.그러나 올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다(23절).이 시편은 계약의 백성에게 그릇된 제사와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훈계한다.예수님의 말씀(마태22,35-40)에 따르면 이것은 율법과 예언서의 종합이다. 시인에 따르면,올바른 예배는 우리가 우주의 창조주에게 바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하느님은 우리의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제사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이 시편의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마음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지 않도록 교훈을 준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42-89편)
영화‘하이웨이맨’은 존 리 행콕 감독 이 연출한 2019년 개봉된 미국의 범죄 영화로 1930년대 미국의 연쇄 살인마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은 텍사스 레인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을 두고 있다. 주연으로는 케빈 코스트너,우디 해럴슨.
영화는 범죄자의 범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이러한 범죄를 영웅시하고 동조,옹호하는 당시의 군중심리와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무능한 태도를 비판하는 요소도 가미되어있어 시대적 상황을 보는 재미도 더하여 준다.
나무야,
그들이 널 어떻게 잘라놓은 거니?
너 어찌 그리 낯설고 이상한 모양이냐!
백번이나 얼마나 아픔을 겪었기에 네 안에
반항과 의지말고 다른게 없단 말이냐!
넌 너와 같아, 잘리면서 아픔을 겪은
목숨을 망가뜨리지 않고
시달리며 견딘 야비함에서 벗어나 매일
다시 빛을 향해 이마를 들려 올려
내게 있는 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세상은 죽도록 비웃었어
하지만 내 본질은 부서지는게 아니야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백번이나 잘린 가지들에서
참을성 있게 새 잎사귀를 내놓는 거야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는 거야
(가지 달린 떡갈나무/헤르만 헤세)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