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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설교본문 : 요한복음 1:1~18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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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증거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어 뜻 하나하나를 일일이 살펴 가며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헬라어에 담긴 뜻이 우리말과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본문 말씀을 대학입시 준비하는 학생처럼 그렇게 집중에서 듣고 읽고 묵상해 주십시오.
제 1 부 :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1. 요한복음 소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주후 85년~90년쯤 사이에 기록한 책으로,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한 책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당시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이미 있었으므로
세 복음서에서 다룬 것들을 다시 중복하여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요한은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증언하려 하였습니다.
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1~3절)
1. 태초(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로
헬라 철학에서는 로고스를
‘우주의 모든 것에 스며있는 이성(理性)적이고 정신적인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헬라 철학의 용어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으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과 하늘의 모든 원리와 원칙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역할을 맡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하나님 중에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말씀의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주의 모든 것의 원칙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의 구원의 법칙과 원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주께서 만드신 이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우리와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의 원리와 원칙을 만들고 운영하시는 분이시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1절)
예수님은 이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
이 땅과 우주와 시간이 있기 그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단지 그때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뿐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3절)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또한 성령님,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도 역시 함께 창조하셨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것이고,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서 그가 창조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4)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1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다른 위치에 계신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분명히 이 땅에 계셨고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계신 그 위치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삼위(三位)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동일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떨어져 계시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이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서로 떨어져 있는데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 됩니까?
가령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분명히 두 사람이지만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부가 마음과 생각과 뜻이 하나일 때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다른 위치에 계시면서도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마음과 생각과 뜻과 성품이 완전히 같으신 분이시니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신 것입니다.
삼위(三位)로 계시지만 일체(一體)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3.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4~5절)
1)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라).
5. 그 빛이 어두움에 비치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받아들이지, 이기지) 못하더라.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생명을 주셨습니다.
2)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생명을 주시는 빛(4절)
예수님은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이 유지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서 생명이 유지되고 이어집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육신의 생명이 이어지지만,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생명만 이어져갈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육신의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만 있는 자들은 육신의 생명이 끝이 날 때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지만,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은
육신은 죽더라도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은혜 속에 머물러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마치 식물에 빛을 비추니 그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십니다.
3)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5. 그 빛이 어두움에 비치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받아들이지, 이기지) 못하더라.
그 빛이 어두움에 비쳤으나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 어둠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치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빛 안에 있어야만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 어둠의 즐거움에만 빠져 빛을 거부하고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4. 참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1)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참 빛이신 예수님(9절)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빛으로 오셨다’에서 ‘참’은
‘불완전을 완전하게 하는 참’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빛을 받아야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미혹하지 않는 빛이십니다.
그래서 참된 빛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면
그래서 우리가 주께서 비추시는 그 빛으로 들어가면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한 자가 됩니다.
우리를 완전한 자가 되게 하시는 빛, 그래서 참 빛입니다.
사탄은 스스로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했습니다(고후 11:14).
사탄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가령 사람들은 돈을 광명의 천사로 여깁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된 사람 중 많은 사람이 가정이 깨지는 불행을 겪습니다.
돈 역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권세와 명예 등 사람들이 평생 얻으려 애쓰는 모든 것들이
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된 헛된 것들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만 우리를 즐겁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멸망으로 미혹하는 빛이 아니라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십니다.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능력의 빛이십니다.
2)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빛
이 세상에도 빛이 있으나 잠시 있다 사라지는 제한적인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생하시는 빛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만 우리를 즐겁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토록 우리가 죽은 후까지도
계속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영원한 은혜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영원토록 지키시고 돌보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3) 그 빛이 각 사람을 비추었다
주님의 생명의 빛이 각 사람을 비춥니다.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의 빛을 비추십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
지극히 작은 계명조차 지킬 힘이 없는 타락한 자들에게도 그 빛을 비추십니다.
4) 그 빛으로 우리도 어둠의 권세를 이길 힘을 갖게 됩니다.
본래 우리는 빛이 아니지만
예수께서 그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니
우리도 사망의 어두움의 권세를 이길 힘을 갖게 됩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밤에 우리를 비추는 밝은 달이 되는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빛으로 우리도 빛이 되었습니다.
●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11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참 빛이신 주께서 그가 만드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금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세상은 자기들을 구하러 오신 분을 거절했습니다.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습니다.
누구든 주께서 비춰주시는 그 빛을 받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들은 그의 말씀을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으며,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까지도 잡아들여서 죽이려 하였습니다.
제 2 부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먼저 요한복음 1:9~18의 큐티의 본문해설에서 단어설명을 읽고 난 후 아랫글을 읽어주십시오.)
1. 영접하는 자(12절)
1)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는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주님을 나와 왕으로,
나의 군주(君主)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내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군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그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죄를 자복하는 자가 됩니다.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왕으로 모시고 받아들였습니다.
내 가치관이 있는 곳, 나의 판단이 일어나게 하는 곳,
그래서 그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나를 즉각 움직이게 하는 곳으로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나의 주인의 명령, 나의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
여러분은 주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여러분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시간과 물질과 인생의 계획에서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시간 사용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직장이나 친구들의 모임에는 정확히 시간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늦기를 밥 먹듯이 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이 진짜로 나의 왕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
이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2) 영접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한다는 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약에서는 왕께서 세우신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영접한 것으로 인정을 받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로 그 벽을 깨뜨리셨으므로
이제는 주께 “내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3)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화분을 빛이 잘 드는 곳에 두기만 하면 그 햇빛이 그 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의 빛 안에 있기만 하면 주께서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 사랑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빛이 되어주십니다.
2. 그 이름을 믿는 자 ➠ 그 이름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12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그 이름을 믿는 자 : 예수님을 영접한 자가 계속 해야 할 일
‘영접하는(엘라본)’은 부정 과거형으로,
정해지지 않은 과거의 어느 때의 사건을 말합니다.
과거 어느 때 내가 내 마음 중심,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곳에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마음 중심의 자리에 모시고 받아들인 자가
그다음에 계속 해야 할 일이 그를 믿는 일입니다.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이름에 이르도록, 그 이름 안으로 들어가도록
계속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 성경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거나,
직분을 받고 교회에서 신앙 활동을 하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는 찬양이나 기도나 예배드릴 때
마음에 은혜받는 감동이 일어나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런 정도의 것을
‘구원받을 믿음’으로 말씀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1) 믿는 자(피스튜오) :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튜오’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목숨을 걸 정도의) 강한 확신과 신념’을 뜻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위해 나의 목숨을 걸 정도의 강한 확신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냥 지식 정보를 얻은 정도도 아니고,
그것으로 은혜받은 감동을 느끼는 정도도 아닙니다.
주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인 자가
그의 말씀이 참 진리의 말씀이라 믿고
그 말씀에 충성하고 순종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빌딩 저 아래층에서 불이 났는데 비상구가 두개 있고,
그중 하나는 중간이 막혀 있습니다.
그때 그 빌딩을 지은 사람이 이쪽 비상구로 나가야 한다고 말해준다면
그때 내가 그를 믿는다면
내 목숨을 걸고 그의 말을 따라 그 비상구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피스튜오의 믿음입니다.
2) 그를 신뢰하므로 ➠ 그가 하시는 말씀대로 내 몸을 움직여 나아갑니다.
주님의 능력과 성품과 인격을 신뢰하므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과거 어느 순간 내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내 마음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가 말씀하시는 방향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판단하고 계획합니다.
이렇게 믿음에는 ‘신뢰, 순종, 복종’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3) 믿는 자(피스튜우신, 현재분사)
그런데 12절 본문에서는 ‘피스튜오’의 현재분사 ‘피스튜우신’을 사용했습니다.
언제든지 그 현재의 시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주일에 한 번 예배와 와서 잠깐 보이는 이벤트성의 신앙이 아니라
언제나 그 현재의 시간이 주님을 믿고 주께 충성하는 시간으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 에이스(~안으로 들어가도록, ~에 이르도록)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서 ‘곧’에 해당하는 ‘에이스’는
‘~ 안으로 들어가도록, ~에 이르도록’입니다.
주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가도록, 주님의 이름에 이르도록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입니다.
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서 ‘권세’에 해당하는 ‘엑수시아’는
‘신분의 격상과 함께 주어지는 권세’를 뜻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름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모든 능력과 권세가
그 신분과 함께 주어집니다.
물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 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 신분과 함께 능력과 권세가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난 자’, ‘새로운 피조물’로 표현합니다.
1) 간절히 갈망하며 구하는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영접하고 믿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단어의 뜻만 보면
조금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의지력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본문 12절에서 말하는 영접과 믿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더 많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영접조차 잘하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예로 4장에서 수가성 우물가의 여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소개했고,
7장에서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소개했습니다.
이 두 여인은 구약의 율법으로는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으나
그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메시아 대망)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영접과 믿음’은 결국 ‘간절한 열망’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주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자, 주께서 인도하시는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는 자,
소위 ‘메시아 대망’을 품고 있는 자가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연약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연약한 자들,
이미 마음과 영혼과 육신이 모두 죄에 오염되어
자기 힘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힘이 없는 타락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일지라도 그를 영접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일지라도
그를 믿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열망은 품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을 향한 그 열망을 계속 품고 간구하기는 일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이런 연약한 자들도 구원받는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요한복음 큐티 과정에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제 3 부 :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
1)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13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세상의 권세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으로 뜻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지 아버지가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아들도 왕이 되고,
아버지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아들도 귀족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을 주고 귀족의 신분을 사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무엇인가를 얻기도 하고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이런 방법으로는 결단코 얻을 수 없습니다.
➠ 특히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뜻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수양, 수행, 훈련’을 뜻합니다.
그 어떤 고도의 정신적 훈련이나 수행의 방법을 통해서도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도의 훈련이나 수행이라도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이 뜻으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지킬 힘이 없으니,
그 은혜가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누구든 그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를 그에게 주셔서,
예수님처럼 죄 없는 자로 여김 받아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3) 은혜와 진리(17절)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뜻하고,
진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은혜와 진리를 예수께서 우리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은혜요,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인도하시니 진리인 것입니다.
4) 은혜 위에 은혜(16절)
16. 우리는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은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를 받으니 그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 주셨던 그 은혜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율법을 지킨 자들에게만 그 은혜가 나타나는데,
주께서 주신 은혜는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 그 은혜가 나타나니
훨씬 더 좋고 탁월한 은혜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멸망을 받게 되었는데
구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살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결 론 : 나를 즉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놀이, 돈, 권세, 친구, 인기,
이렇게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을 만큼 좋아하는 그것을 향하여 움직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나를 즉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내 가치관이나 인생이 그것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이렇게 즉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믿는 이런 신실한 신앙의 삶이
항상 지속해서 계속되는 것이 구원받을 믿음입니다.
● 묵상 :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나를 움직이게 할 만큼 내 안에 담긴 간절한 열망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 내 안에 항상 계속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님
우리 가운데로 오셔서
우리에게 참 생명이 빛을 비춰주셨음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주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음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주님을 영접하고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