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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아침기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저녁기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끝기도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
수도 생활의 탁월한 사부인 안또니오는 250년경 에집트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회개 생활을 시작했고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거슬러 싸우던 성 아타나시오를 후원해 주면서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356년 세상을 떠났다.
성 안토니오의 소명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안또니오는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내지 스무살 정도였고 가사와 여동생의 양육을 책임 맡게 되었다.
다음 번 성당에 갔을 때, 복음서에 나오는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하고 성당에서 나와 남겨 둔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버렸다. 자기 여동생을 잘 알고 있던 믿을 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기고 그들의 집에 들여보내어 교육받도록 했다. 그리고는 자기 집 근처에서 고행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몸바쳐 반성하는 가운데 엄격한 생활을 인내로이 해나갔다.
교부들의 가르침: 안토니우스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성인
광주가톨릭대학교 노성기 신부
오늘은 ’은수자(隱修者)들의 아버지’인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이집트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자. 비록 안토니우스(251~356)가 최초의 은수자가 아니었고, 그가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수도규칙을 만든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수도생활은 초기 이집트 은수자들과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의 수도생활은 동서방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은수생활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5세의 나이로 356년에 선종한 안토니우스의 축일은 1월 17일이다.
그는 251년경에 이집트 중부 헤라클레오폴리스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20살에 부모를 여윈 안토니우스는 어느 날 부자청년에 관한 복음말씀(마태 19, 21)을 듣고 나서 모든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빈 무덤 동굴에서 15년 동안 엄격한 은수생활을 했다.
알렉산드리아에 박해가 들이닥치자,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간 안토니우스는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자신도 순교자들의 대열에 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끝내 순교의 월계관을 허락 받지 못한 그는 슬픈 마음을 간직한 채, 이집트 사막으로 되돌아가 ’파스피르’ 산악지방에 있는 허물어진 옛 성터에서 20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우스의 뛰어난 성덕과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을 듣고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된 은수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움막에서 살면서 주일과 축일에 함께 모여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안토니우스의 지도를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은수생활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더 멀리 홍해 근처의 콜짐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옹호해 달라는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간 일 외에는 죽을 때까지 사막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사람’, ’은총과 품위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하루는 철학자가 안토니우스를 찾아와서 물었다. ’은수자님, 독서의 위로 없이 어떻게 고통과 싸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안토니우스는 ’자연이 바로 책입니다. 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글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했다"(소크라테스, ’교회사’ 4, 23).
안토니우스는 수도자란 하느님의 종으로서 죽는 날까지 수덕생활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종이 감히 어떻게 일하기 싫다고 이미 일한 기간을 따지거나, ’어제 일했으니 오늘은 쉬겠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매일매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열심히 수도생활을 합시다"(아타나시우스, ’안토니우스의 생애’ 18).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저녁에 잘 때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은 단지 주님의 안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아타나시우스, ’안토니우스의 생애’ 19).
제자들이 안토니우스를 찾아와 "저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안토니우스는 "성서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부님, 저희는 사부님으로부터 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재차 간청하자, 안토니우스는 "복음서는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성서는 안토니우스와 수도자들에게 은수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은수자들은 시편 기도를 바치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들 안에 육화될 수 있도록 성서 말씀을 암송했다. 안토니우스에게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드는 것이며,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는 무기였다.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응답한 삶을 산 안토니우스는 은수자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먼저 실천한 후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을 강조했다 :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는 것,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의 은총, 마귀와 대결하신 그리스도의 투쟁,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심 등.
안토니우스에게 있어서 은수생활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단순히 세상을 떠나 사막에 사는 것이 은수생활의 전부는 아니었다.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안토니우스는 ’듣는 것의 유혹’, ’보는 것의 유혹’, ’말하는 것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수도자에게 필수적인 참된 독서는 ’마음의 독서’라고 강조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수도생활의 중심이며, 수행은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특전적인 도구이다.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목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이를 위해 수도자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수많은 마귀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안토니우스의 가르침이었다. 왜냐하면 수도자는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를 보면, 사막은 하느님의 은총과 마귀의 유혹이 동시에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던 장소가 바로 사막이며, 불모의 땅, 죽음의 땅으로 마귀의 유혹이 득실대는 장소도 또한 사막이다. 은수자들은 그리스도처럼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그리스도의 투사’였다. 철저한 은수생활을 통해 마귀와의 투쟁을 이긴 은수자들은 마침내 하느님을 만났다. 안토니우스는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라는 무기로 사막의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영적 사부가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21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아빠스(251-356년)는 모든 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의 아버지 또는 사막의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은 이집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은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우는 아타나시오 성인을 도와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한 수도자였습니다.
신비로운 것은, 안토니오 성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음에도 교회의 호교론을 증언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아타나시오 성인은 자신의 저서 『안토니오의 생애』에서, 안토니오 성인이 교회에서 유명해진 것은 학문의 지혜나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타고난 영적 신심 때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에 대하여 한 교회 역사가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철학자 한 사람이 안토니오를 찾아와 은둔 생활을 할 때에 독서에서 오는 즐거움과 위로 없이 무슨 낙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안토니오 성인은 “지혜의 학자님, 자연이 바로 그 책입니다. 저는 자연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글들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인은 비록 인간이 만든 글을 통하여 세상의 지식을 가까이하지는 못했어도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자연을 통하여 그 누구보다도 영적인 지식을 충만히 갖춘 분이었습니다.
[매일미사, 2007년 1월호에서]
수도승 또는 은수자의 수호성인 안토니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어느 날 성당에서 이 복음 말씀을 들은 청년 안토니오는 집으로 돌아와 물려받은 재산을 나이 어린 여동생을 위하여 조금 남기고는 모두 나누어 주었다.
다음에 성당에서 또 다른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여동생을 믿을 만한 동정녀들한테 의탁하고는 남은 재산마저 모두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었다. 그때 성인이 들은 복음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7,34)였다. 251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성인은, 재물을 모두 나누어준 뒤 사막으로 들어가 완덕의 길을 걷는다. 안토니오가 더욱 깊은 사막의 무덤과 같은 굴에서 오로지 노동과 기도로써 하느님의 길을 따를 때, 악마는 세상의 쾌락과 은수생활의 무모함을 속삭이며 그의 거룩한 이상을 방해하였다. 마귀가 여러 가지 추악한 모양을 그의 눈앞에 그려내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그를 때려 몸과 마음을 괴롭혔으나, 그의 열망을 꺾지 못하였으니 드디어 그에게 성스러운 평화가 찾아왔다. 안토니오의 수덕생활이 사방에 퍼지면서 수도생활을 원하는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다. 안토니오는 찾아오는 은수자를 한데 모아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수도생활을 창시자로 공경받는 한편 수도승 또는 은수자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내일을 걱정하면서 오늘 재물을 쌓는 우리네 삶은 어디쯤에서 구원열차를 탈 수 있을까? 안토니오 성인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단면을 본다.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한 성인은 356년 사막에서 105세로 거룩한 일생을 마친다. 축일은 1월 17일. [경향잡지, 2007년 1월호]
[이달의 성인] 성 안토니오(251-356)
윤 클레멘트 신부
이집트 사막의 수도승이요 첫 번째 수도원장으로 불리어지는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한 은수자요 수도승인 그가 수도원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지금의 수도원장처럼 선출되어서는 아니며, 오랜 세월동안 많은 유혹들을 이겨내면서 사막에서 은수자 수도승으로 살았고, 마침내는 많은 동료 제자들과 함께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함께 한 연유에서이다. 그의 부모는 많은 땅을 가진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가 열여덟 혹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에 세상을 떠난다. 그 무렵 그는 마태오 복음의 다음 말씀에 큰 감동을 받는다.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는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될 것이다. 그리고나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윽고 그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재산을 팔아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극히 적은 소유만을 남긴 채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다음의 성서말씀에 다시 감동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하고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1-32).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자신의 누이는 수도원에 맡긴 채, 그 지방의 한 수도승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곧 더 엄격한 은수자 생활을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후 이집트의 사막에서 약 20년 동안, 사막의 은수자요 수도승으로서 산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막에서 한 수도원을 이루게 되는데, 많은 은수자들이 그에게로 모여든 때문이다. 그는 자주 자신의 수도원과 제자들을 피하여 산꼭대기로 숨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도원장을 다시 찾아내곤 했다고 전하여진다.
그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사막의 말씀’을 하곤 하였는데, 그의 말씀들이나 그러한 사막의 은수자들의 말씀들이 모아지고 엮어져서, 마침내 ‘사막 교부들의 말씀’이라는 책으로 되어, 후세에 대대로 엮어지고 출판되기를 오늘날까지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이나 자신의 제자들이 살았던 사막에서의 수도승 생활이 결코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나 제자들도 똑같은 인간본성을 지녔던 까닭에, 육신의 본성과 나쁜 영들과 수없이 싸워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일련의 편지들이 전하여지는데, 그는 자신이 사막의 은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과의 사랑을 수도승 영성생활의 중심 열쇠로 본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형제를 얻으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고, 만일 우리가 형제들과 문제가 된다면 그리스도께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2009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안또니오 성인의 첫 번째 서간
성 안또니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역자 서문
흔히 수도승들의 사부, 독수도승생활의 창시자 등으로 일컬어지는 사막의 안또니오 성인에 대한 정보는 주로 다음 세 가지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아타나시오가 쓴「안또니오의 생애」와「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안에 나타나는 38개의 금언들, 끝으로 안또니오 성인의 것으로 간주되는 7통의 서간들이다. 앞의 두 문헌은 타인에 의해서 기록된 안또니오 성인에 대한 증언들인 반면, 서간들은 성인이 남긴 유일한 글들이다. 비록 이 서간들의 진저성을 두고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모든 필사본들이 이 서간들을 안또니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안또니오의 생애」와 이 서간들 간에 어떤 유사성이 있고, 또「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있는 어떤 개념들, 예를 들면 참회의 개념,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 악령들을 거스른 싸움 등과도 유사성이 보인다. 안또니오가 이 서간들을 썼다는 또 다른 언급들이 있다. 예컨대,「빠코미오의 생애」에서는 안또니오가 아타나시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쪼메노(Sozomeno)와 소크라테(Socrate)와 같은 역사가들에 따르면, 안또니오는 황제에게도 편지를 썼고 그로부터 답장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서간들이 쓰여진 연대는 340년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또니오는 356년에 사망하였는데, 전승에 의하면 사망 당시 그는 100세가 넘었다고 한다. 서간들은 다른 수도원들에 보내진 것들이며, 이것들은 바울로 서간들과 지혜 문학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서간들 안에는 우리가 이미「안또니오의 생애」안에서 접했던 많은 개념들과 용어들이 나타난다. 만일 안또니오의 서간들 전체 안에 하나의 핵심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prosoché)일 것이다.
이 서간들은 초기 이집트 수도승생활의 어떤 본질적인 측면들을 밝혀준다. 무엇보다도 이집트 수도승생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내적 생활에 대한 추구’, ‘내적 생활의 발전’이었다는 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첫 번째 서간은 수도승생활, 특별히 수행생활(vita pratica)에 관한, 즉 감각들의 정화에 관한 짧은 작품이다. 서간 처음에 안또니오는 부르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부르심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형태는 자연법을 알고 있었던 아브라함에 의해서 상징화된다. 아브라함을 영적, 내적 여정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전통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us)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리게네스에게서도 나타난다.
부르심의 두 번째 형태는 성서를 통하여 오며, 세 번째 형태는 고통을 통하여 온다. 그런 다음 악습들과 악령들을 거스른 싸움이 온다. 그 뒤를 이어 육체의 정화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안또니오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는 무엇보다도 단식과 숱한 철야, 그 다음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온갖 욕구를 끊는 다른 모든 금욕적 수행들을 통하여 순수하게 됩니다.” 여기서 ‘금욕적 수행들이 육체를 약하게 한다’는 개념은「안또니오의 생애」7에서도 나타난다. ‘철야’(vigilanza)의 개념은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prosoché) 개념에 부응한다. ‘육체에 대한 정화’는 ‘감각들에 대한 정화’를 의미한다. 안또니오는 눈, 귀, 입, 마음, 손, 배, 발 순으로 이것들에 대한 정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본 문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에 인사합니다! 형제들이여, 내 생각에는 하느님 사랑에 가까운 세 부류의 사람들, 곧 남녀들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본성 안에 부여된 사랑의 법에 의해서, 그리고 본성이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그 일부를 이루는 본래의 선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도달했을 때,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즉시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최초의 성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인간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애초 그를 빚어 만드셨을 때 그 안에 부여하신 자연법으로 인해 당신을 사랑하였음을 보십니다. 그러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시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자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자기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즉, 만일 그들이 노력하고 인내와 고요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찾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찬양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첫 번째 종류의 부르심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이 불신자들에게 마련된 형벌과 고통이 있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안에서 열매를 낳는 사람들에게 마련된 약속이 있다고 선언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기록된 율법의 이러한 증언은 그들 안에 이 부르심에 순종하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다윗이 “주님의 법은 순수하여 영혼들을 회개시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당신 말씀의 계시가 나를 비추며 작은이들에게 지혜를 주나이다.” 라고 말할 때 증명됩니다. 많은 다른 예문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인용할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마음이 무뎠고 계속 죄를 지어왔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교정하시려고 그들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이는 환난 중에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여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그들은 온 마음으로 회개하여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칭찬을 받습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하느님 자녀들로 부르심과 은총을 받기까지 회개의 여정을 시작하는 세 가지 방식들입니다. 2. 하지만 나는 그 싸움을 수월케 하고 회개의 모든 노고를 감미롭게 하려고 온갖 환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모든 투쟁에서 격렬히 저항할 준비를 하면서 온 마음으로 이 여정에 착수한 사람들을 성령께서 이미 먼저 부르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육체와 영혼의 고행을 해야 하는지를 밝혀주신다고 믿습니다. 또 성령께서 영혼과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어 그것들이 순수하게 되어 상속을 받도록 노력하라고 그들에게 권고하신다고 믿습니다. 육체는 무엇보다도 단식과 숱한 철야, 그 다음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온갖 욕구를 끊는 다른 모든 금욕적 수행들을 통하여 순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의 성령께서는 악마가 회개하는 사람을 되돌아가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도우러 오시고,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 다음 영혼들을 이끄시는 성령께서 그 영혼의 눈을 열기 시작하여 영혼 역시 회개하여 순수하게 하십니다. 그 때 마음은 육체의 필요들로부터 영혼의 필요들을 분별하기 시작하며, 성령께서는 그에게 고행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을 정화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성령께서는 금욕적인 수행의 노고에로 육체를 이끄시어 육체와 영혼이 정화되게 하십니다. 육체의 각 지체에 연결된 모든 육의 열매들, 즉 태초에 범죄의 원인이었던 열매들을 분별하고, 육체의 각 지체를 사탄의 영이 전혀 없던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내 육체를 지배하여 그것을 예속시킵니다.”(1고린 9,27) 라고 한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르면, 육체는 마음에 종속되고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음식과 음료와 잠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셨고, 영혼의 순결 덕택에 그분은 한 번에 온갖 욕정과 성적 결합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부터 마음을 영원히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3. 나는 육체 안에 세 종류의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종류는 육체에 고유한 움직임으로서 육체는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로지 육체 안에 있다는 것 외에 그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 있는데, 곧 인간이 많은 음식과 음료로 육체를 살찌울 때, 이 영양분들로 달구어진 피는 탐식으로 자극된 육체 안에 하나의 싸움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여러분은 방탕의 근원인 포도주로 취하지 마시오.”(에페 5,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여러분의 마음이 음식과 음료로, 무엇보다도 정욕으로 무거워지지 않도록 주의하시오.”(루가 21,34) 라고 명령하십니다. 순결함을 추구하는 우리는 “나는 내 육체를 지배하여 그것을 예속시킵니다.”(1고린 9,27) 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 번째 움직임은 우리를 유혹하는 사악한 영들, 질투심에서 자극된 이러한 영들로부터 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단념시키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만일 누가 성령께서 자기 마음에 밝혀주시는 바를 증언하는데 있어 이 세 가지 움직임을 주시하고 늘 깨어 경계한다면, 그는 자기 영혼과 육신을 삼중의 질병에서 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반대로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이 움직임들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악한 영들이 그를 사로잡아 그의 육체 안에 온갖 종류의 욕정들을 심고, 지치고 병든 영혼이 어디서 도움이 그에게 오는지 묻지 못하게 되고 회개하여 성령의 계명들을 받아들여 치유될 때까지 그를 방해하고 그를 거슬러 격렬한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때, 영혼은 자신의 안식이 하느님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자신의 평화이심을 믿게 됩니다.
4.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한 것은 여러분이 다음의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정화를 위하여 영혼과 육체로 고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그 때 그는 성령께 도움을 청하고 자기 뜻에서 오는 영혼의 욕정들을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증언했던 그 계명들을 지킨 마음의 친구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마음에게 영혼의 온갖 상처를 치유하는 법과 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육체의 지체들에 결합된 욕정들과 외부에서 와서 자기 뜻으로 인해서 육체와 뒤섞인 다른 것들을 식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눈의 경계를 정하시어 눈을 고결하고 순수한 한 시선으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눈은 더 이상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평화로이 경청하도록 귀를 안내하십니다. 그리고 귀는 더 이상 악담과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듣기를 원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호의와 자비의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사실 한때 시선이건 청각이건 병들었었습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는 혀에게 깨끗해지도록 가르치실 것입니다. 사실 영혼이 중병에 걸리는 것은 혀로 인해서 입니다. 영혼은 혀를 통해서 자기 병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탓을 혀에 돌립니다. 혀는 영혼의 한 기관이며, 혀로 인해서 영혼은 더 심하게 병에 걸립니다. 야고보 사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억제하지 않으면, 그는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그의 경배는 헛됩니다.”(야고 1,26) 다른 곳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혀는 하나의 작은 지체이며 온 몸을 오염시킵니다.”(야고 3,5-6) 그리고 또 다른 구절들에서는 다른 것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만일 마음이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 자체가 정화되어 거룩해집니다. 그때 어떤 악함도 또 어떤 자기 뜻도 담지 않는 말들을 찾아 혀에 위임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내 말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발설된다. 거기에는 사악함도 부패함도 없다”(잠언 8,8 참조)고 말하는 바가 마음 안에서 채워집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치유하는 능력(잠언 12,18 참조)과 또한 다른 많은 것들을 소유합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는 한때 영혼의 뜻을 따르면서 합당치 않은 행위들에 사용되었던 손 역시 치유하십니다. 이제는 반대로 성령께서는 손에 필요한 힘을 주시고 기도와 자비의 실천을 통하여 손을 순수하게 하시며, 손에게 이러한 일들을 완수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렇듯 손으로 “내 손의 봉헌물이 저녁 제물이 되게 하소서.”(시편 140,2) 라는 말씀과 “강한 자들의 손이 부를 분배한다.”(잠언 10,4 참조)고 말하는 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음식과 음료로부터 배를 정화하십니다. 배는 탐식으로 게걸스럽게 먹었고, 음식과 음료를 열망하였으며, 결코 만족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뜻은 음식 앞에서 이러한 욕정을 자극하였고, 또 악령들이 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께서는 다윗의 입을 빌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교만한 시선과 만족을 모르는 마음을 가진 자와 함께 먹지 않았다.”(시편 100,5) 음식에 있어서도 또한 순수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더 이상 정욕으로 괴로워하지 않도록 육체의 능력에 알맞은 충분한 분량을 부과하십니다. 그러면 배 안에서 바울로의 다음 말씀이 채워집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른 어떤 것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고린 10,31) 만일 배의 포만함으로 부추겨진 생각들이 음욕을 통해서 움직여진다면, 성령에 의해서 잘 훈련된 마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 다양한 움직임들을 분별하여 성령의 도움과 능력에 힘입어 그것들을 다스려 진정시킵니다. 성령의 능력은 육체 전체에 평화를 주며 그 움직임들을 억제합니다. 바울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땅에 속한 여러분의 지체들, 곧 음욕, 부정, 악한 욕망들에 대한 욕정들을 죽이십시오.”(골로 3,5)
그런 다음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올바로 완전하게 걷지 않았던 발 또한 정화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한때 당신을 따랐던 발을 정화하시어 발이 당신 뜻 안에서 나아가고 선한 일들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온 몸이 변형되고 쇄신되어 성령의 능력에 종속되도록 하십니다. 나는 내적으로 정화된 그 육체가 의인들이 부활할 때 우리가 받게 될 영적인 육체를 이미 부분적으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육체의 지체들 안에 스며들어 육체를 움직여 불안하게 하는 영혼의 질병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의 지체들 안에서 악한 영들을 행동하게 하면서 그것들을 안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영혼이 자기 안에 밖에서 오는 또 다른 욕정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이 어떠한 것들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들은 육체에 기원을 두지 않는 하나의 악입니다. 그렇듯 오만함,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소홀함, 나태함, 그리고 다른 작은 욕정들 역시 악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회개의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의 죄들을 명확히 밝혀주시어 그가 다시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그 앞에 나타나는 적들을 그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적들은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와 싸워서 그가 회개에 항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회개를 권고하시는 성령께 항구히 순종한다면, 창조주께서 그의 노고에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자기 육체에 부과하는 고행들 - 많은 기도, 단식, 탄원,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부, 온갖 악의 포기, 겸손, 정신의 가난, 눈물, 통회 - 과 그의 노고와 인내를 보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구원하십니다.
[금주의 성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St. Anthony the Great, 1월 17일)
악마의 유혹에도 꿋꿋한 믿음, 기도와 노동 성경읽기 등 은수생활 체계 정립
251~356. 이집트 출생 및 사망.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는 평생 이집트 사막을 떠돌며 은수생활을 한 사막의 성자입니다. 3세기께 인물인 성인에 대해 지금까지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아타나시오(295~373) 성인이 쓴 전기 「성 안토니오의 생애」 덕분입니다.
성 안토니오는 부유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은 20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이후 여러 사상가들과 설교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강연을 듣고 마음의 위로를 얻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는 복음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받은 전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준 뒤 집 근처 산과 사막을 떠돌며 은수생활을 시작합니다. 기도와 묵상, 신학연구에 전념하며 단식은 물론이고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악마는 이런 그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단식하는 성인에게 먹을 것을 놓아둬 유혹했고 성인이 기도를 시작하면 뱀과 맹수들의 환영이 보이게 해 괴롭혔습니다. 성인은 때론 두려움에 떨었지만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이같은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성인은 기도와 노동, 성경읽기 등 은수생활의 체계를 정립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성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성인처럼 살겠다는 젊은이들은 무리를 지어 성인이 사는 곳 주위에 터를 잡고 이같은 생활을 따라했습니다. 성인이 수도생활의 설립자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성인은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피해 나일강을 건너 빈 성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0년 간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은수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16일, 박수정기자]
[성인들의 발자취] 성 안또니오 아빠스
수도생활의 아버지 - 축일은 1월 17일 로마제국의 박해시대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홀로 은수생활을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을 함께 모아 공동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는 성 안또니오 아빠스가 처음이었다. 안또니오는 251년 이집트 「고만」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세속생활의 허무함을 깨달은 안또니오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당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간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오』라는 복음말씀에 따라 그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노수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또한 많은 은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모범을 본받아 이를 실천했던 안또니오는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은사의 슬하를 떠나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오직 노동과 기도로써 경건한 생활을 계속했다. 은둔생활 중 계속되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기도하면 할수록 악마는 안또니오의 마음을 산란시켰으나 안또니오는 밤낮으로 악마와 싸워 유혹을 물리쳤다. 한편 안또니오가 만든 도구를 시장에 팔아 양식을 구해주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그를 도와준 친구에 의해 안또니오의 완덕생활이 도처에 전해지자 수도생활에 뜻을 품은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혼자서 은수생활을 하는 것보다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이 더 많은 공로를 세울 수 있고 하느님의 뜻에도 더 적합하리라고 생각한 안또니오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최초의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을 지도했다. 이리하여 안또니오는 수도생활의 아버지 또는 수도자의 아버지 또는 수조자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한편 안또니오는 1백 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를 위시한 민중들의 청원을 듣고 그곳에 가 아리오파의 이단에 물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356년 1백5세의 나이로 선종한,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안또니오 아빠스의 축일은 1월 17일이다. [가톨릭신문, 1982년 1월 1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