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고픈 섬 홍도 그리고 흑산도
지난 2월 24~26일 97손지원의 도움으로 휘모와 함께 멋진 섬여행을 다녀왔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하여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병날 것 같고,
3월 3일이면 휘모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좀처럼 놀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또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짝꿍이 이 기간동안 교육을 받기 때문에 집에 없다.
또, 지난 12월의 경험도 있고 휘모가 아직은 어려 여행사를 통해서 여행하기로 했다.
8시에 용산역에서 손지원과 접선.
지원에게서 일정표와 휘모의 먹거리를 잔뜩 받아들고
KTX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2박 3일 동안의 업무를 미리 해치우느라 입안이 헐고
피곤이 몰려와 창밖의 경치는 보는둥 마는둥
그저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정읍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무슨 고속철이 이런 시골에도 정차를 한단 말인가
그냥 지나칠 것이지...ㅋㅋ
목포역에 도착 점심을 먹고
다른 여행사를 통한 네명의 아줌마와 눈인사를 하고
드디어 홍도를 향해 출발.
쾌속선은 처음이라 ‘과연 얼마나 빨리 갈까.’싶어
밖에 있으려니 들어가란다.
에이 뭐이래. 투덜거리며 앞자리에 앉았다.
휘모는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어느새 아줌마들을 사귀어
누나 누나 하면서 재롱을 부린다.
‘저 놈은 굶어 죽지는 않겠어.'
마침내 쾌속선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파도가 제법 거칠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다. 재밌다. 제일 앞자리로 가야지.
또다시 잘난척 한 댓가를 톡톡히 치뤘다.
처음엔 배가 흔들리고 붕떴다 내려앉는 재미에
몰랐었는데 점점 손이 저려오더니
급기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배멀미’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파도가 장난이 아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렸다.
정신이 하나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일행인 아줌마들이
화장실 주위에 거의 쓰러질 듯 주저앉아 있다.
여기저기서 토하고 이런 난리도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승객이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견디고 있다.
휘모는 한번 토하고 나서
잠에 빠져들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휴~ 다시는 잘난척 말아야지.’ 다시금 다짐했다.
살았다.
마침내 홍도에 도착한 것이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배에서 내렸다.
마중나온 민박집 주인을 따라
정해진 우리 방에 들어갔지만
한동안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부여잡지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눕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방이 뜨끈뜨근해서
얼마있지 않아 한기도 가시고 몸도
점점 좋아졌다.
창문을 여니 경치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치 한폭의 그림속에 서있는 기분이다.
손지원의 특별부탁으로
방도 전망좋은 곳으로 해놓았다고 주인이 말한다.
“손지원씨 선배님 되시죠?”
“아~예!” 어쩐지 쑥스럽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의 일정에 대해 주인의 설명을 들었다.
휘모는 누나들 방에 놀러가고
혼자 방에 남아
휘모가 초등학교입학 이후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제법 긴시간을 이것 저것 생각하고
정리도 하면서 보냈다.
둘째날,
8시에 아침을 먹고 자유시간.
휘모와 함께
풍란전시실, 동백숲, 그리고 몽돌 해수욕장 등
볼거리들을 찾아 민박을 나섰다.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데도 그리 춥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풍란 전시실은 별로 크지 않다. 사람도 없다.
동백숲은 아직 조금밖에 꽃이 피지 않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휘모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절로 즐거워졌다.
동백숲에서 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여객터미널을 지나 몽돌해수욕장을 향했다.
바람이 너무 세다. 몇 번을 뒤로 걸었는지 모르겠다.
싸리눈이 내린다.
따닥따닥 따다닥 옷위로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나의 마음을 더욱 밝게 한다.
마침내 거친 파도가 부딪치는 몽돌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서 그렇게 세차던 바람이
막상 해변으로 내려가니 의외로 바람이 세지 않다.
조약돌을 집어 바다를 향해 던지는 휘모를 남겨놓고
그리 길지는 않지만 해변을 거닐었다.
눈이 사납게 내리기 시작한다.
눈내리는 눈보랏속의 바닷가를 홀로 거니니 마치 시인이 된 기분이다.
경기도의 산정호수가 떠오른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산정호수를
눈보라를 맞으면서 거니는 그 맛을 여기소 또 맛보는구나.
기분이 상쾌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몽돌(적갈색 자갈)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입구에서는 큰 몽돌들이었지만 바다에 가까울수록 점점 작은
조약돌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나를 맞이한다.
언뜻 어릴 적 자주갔던 부산 태종대 입구에 있는 자갈마당이 생각난다.
지금은 사람들에 의해 그 많던 조약돌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고 들었다.
여기선 그런일이 없겠지.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닐다 여기 저기에 쓰레기가 널려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낚시꾼이 버리고 간 듯 싶은 미끼통이다.
누가 이런 짓을 욕하면서 자세히 주위를 둘러보니
패트병, 우유팩, 밧줄, 비닐, 종이, 스티로폼 없는게 없다.
비수기인 지금 이정도면 성수기엔...
지금은 하루 두차례뿐이지만 성수기엔 350명 정원인 쾌속선이
10회 운항을 한다니 적어도 하루에 3500명 정도가
홍도를 찾는단다.
그들이 남길 이런 쓰레기들은 또 얼마나 될까.
얼마 있지 않아 여기도 곧 오염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자
괜시리 짜증이 난다.
홍도는 제주도에 있는 우도와 함께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섬이라 들었다.
홍도 사람들은 그 입장료를 받아서 어디에 쓰는걸까.
속으로 욕을 하면서 휘모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오던 길과는 다른 길을 잡아 언덕위로 올라갔다.
조금을 가니 지원이가 말한 아담한 우체국이 눈에 들어온다.
지원이 말처럼 홍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인 것 같다.
조금을 더 가니 '천주교 공소’라 적힌 팻말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으로 공소를 찾았다.
마침 공사중이었다.
나는 세속에 물든 호화찬란한 성당건물보다는
이런 자그마한 공소가 좋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건물이 눈에 띄었다.
홍도 주민들 대부분이 카톨릭 아니면 개신교 신자들이다.
이제 섬안에서 볼 것은 다 본 것 같다.
그만큼 섬이 작다.
점심을 먹고
유람선에 올랐다.
모두들 혹 멀미하지 않을까 걱정들이다.
유람선 가이드가 쾌속선이 아니니 걱정말란다.
2층 선실이 여행객들로 가득찼다.
나홀로 선실을 빠져나와 갑판위에서
구경하기로 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절경이란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해안가 바위를 보면
그의 말대로 물개가 되고
곰이 되고 주전자가 되었다. 촛대도 있고 거시기(남근)도 있고
없는게 없다.
경상남도의 섬인 매물도 등에서 본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굴도
여기저기에 있다.
적갈색의 절벽들 바위들...그래서 홍도라 했다던가.
서해의 끝이라 한쪽은 섬 다른 한쪽은 망망대해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내겐 별천지다.
다음엔 반드시 짝꿍을 데려와야겠다.
파도가 거칠어 다 보지 못하고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더 있고 싶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시간가는 줄 모르니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흑산도행 쾌속선에 몸을 싫었다.
전날 고생한 까닭에
귀미테인지를 휘모에게 붙여주고 나도 붙였다.
일행인 아줌마들도 모두 붙였다.
그런데도 나는 심하게 배멀미를 했다.
휴람선 안에서 잇몸이 부어 잇몸약을 먹은 것이
잘못되었나보다.
잇몸이 너무 아파 가져간 약을 먹고
나홀로 오랜시간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서있은 까닭에
체한 것 같다.
얼마있지 않아 흑산도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지원이 덕택에 편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택시가 마중나와 우리를 태우고 숙소로 향했다.
속이 뒤틀려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다시금 잇몸,이빨이 아파오고
겁이나서 약을 먹지 않고 버텼다.
셋째날, 흑산도.
아침 8시30분에 약속한 택시를 타고
흑산도 일주를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은
파도가 거칠어 유람선이 뜰지 안뜰지 모른채
터미널로 향했다.
지원에게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택시 기사는 32살. 그도 여관집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란다. 그의 말을 빌리면
흑산도 사람들중 나이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고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란다. 혼자 생각에 여기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났나.
흑산도!
총인구 약 4000명 정도.
그 중에서 인신매매 등 여러 사정으로 흘러들어온
젊은 여성들이 많았을 때는 약 800명 정도였단다.
지금도 항구에만 다방이 14개란다.
항구이기에 그러하겠지만
여기선 고향과 왜 왔는지를 묻지 않는게 불문율이란다.
또한 전라도 답지 않게
객지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거의 반을 차지한단다.
그래서 지역감정이 형성되지 않는단다.
택시 기사도 부산 사람이다. 또한 경상도를 본으로 하는
집성촌들이 많다.
또 흑산도에는 여자가 없단다.
그래서 4~50대 노총각들이 숱하단다.
흑산도에는 초등학교분교가 11개 있고
주위의 유인도에 또 11개 정도의 분교가 있다.
중학교는 흑산도에 유일하게 하나 있어
다른 유인도에서 유학을 온다.
그래서 기숙사가 있다.
고등학교는 목포로 가야한다.
다른 유인도의 학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곳 흑산도로 유학오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또 목포로 유학간다.
택시가 성황당에 도착했다.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성황당이다.
심청이를 물에 던져 해신의 노여움을 달래듯
여기서도 예전엔 해마다 처녀를 산채로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한을 품은 아홉 번째 처녀의 원혼이 떠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할 수 없이 종래에 성황당에 모시던 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처녀귀신을 이 성황당에 모셨다.
성황당에는 특이하게도 부엌이 딸려있다.
즉 건물이 두채다. 처녀귀신을 모신 건물 앞에
제사상을 차리던 부엌이 있는 건물에는
많은 옹기들이 있었단다.
옹기장이 들이 구운 옹기를 상인들이
사서 싣고 장사하다 흑산도에 들리면
여기에다 보관하다 일을 마치면 다시 싣고 간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다시 잔잔해질 때까지
흑산도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반드시 피리부는 사람을 동승시켰다.
어느날 한 잘 생긴 피리부는 청년이
옹기 상인들과 함께 여기에 왔는데
그만 처녀귀신이 그 청년에게 반했단다.
처녀 귀신이 청년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위해
밤낮으로 바다를 거칠게 하였고
까닭을 모르는 상인들은 굿을 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처녀귀신의 장난이었다.
할 수 없이 상인들은 청년을 심부름 보내고
그 사이 배를 몰고 떠나버렸다.
돌아온 청년은 영문을 모른채 소나무 위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그만 나무 위에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나무 옆에
무덤을 만들어 띠를 입혔는데 이상하게도
띠가 자라지 못하고 말라죽었다.
아무리 새띠를 갈아줘도 마찬가지라 어쩔수 없이
솔잎으로 띠를 대신했단다. 그래서 지금도 그 무덤엔
띠가 아닌 솔잎이 덮혀있다.
솔잎이 덮여져 있는 옆의 소나무를 보니
가지가 한사람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나있다.
담배 한대 피워물고 처녀귀신과 청년이 잘 맺어졌을까 생각해본다.
길을 재촉하여 흑산도 성당을 지나쳤다.
그 성당엔 수녀가 없다.
여자가 귀한 섬이라 수녀라고 봐주지 않았단다.
그래서 수녀들은 철수하고 신부 혼자 남았단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다르다는데...
씁쓸함을 뒤로하고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굽이굽이 12굽이 고갯길이다.
12고개라고도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창자처럼
생겼다하여 창시고개라고도 한단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흑산도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치 또한 일품이다. 저멀리 여러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을 바라보니 장보고가 쌓았다는 성의 잔해가 눈에 띈다.
일종의 산성인 듯 싶다. 저 곳에서는 충분히 바다를 감시할 수 있고
또 올라오는 적을 쉽게 차단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전망대 아래 한켠에 흑산도 아가씨의 노래비가 서있다.
택시 기사가 흑산도아가씨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준다.
실인즉, 우리가 알고 있는 님을 그리는 내용이 아니라
뭍에서 팔려온 어느 술집아가씨가 망망대해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는 내용이란다. 들으니 그럴싸하다.
택시 한대가 나타났다.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 일행인 아줌마들이다.
유람선이 뜨지 않아 대신 택시를 대절해줬단다.
길을 재촉했다.
돌아보니 그 택시는 오던길을 되짚어간다.
여행사에서 나처럼 흑산도 일주 택시를 부른게 아니라
시간 때우기용으로 택시를 마련해 준 것이다.
아직 두시간 남짓 남았는데
그녀들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맞은 편에 보이는 섬이 장도란다.
두개의 섬인데
물이 빠지면 하나가 된다.
왼쪽의 섬은 유인도고 오른쪽은 무인도다.
무인도엔 흑염소를 방목하는데 이 흑염소들은
뱀을 잡아먹는단다.
흑산도도 널린게 뱀이란다. 천적이 없어 더욱 번성했단다.
땅꾼을 풀었지만 소용없었다나.
어째든 이 흑염소를 먹으면 뱀도 같이 먹는게 되어
정력이 넘쳐난다나.
어느 70이 넘은 할아버지의 늦둥이가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니
가히 그 넘치는 힘을 미루어 짐작하리라.
해안길을 달리면서 여러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주워들었다.
한참을 달리다 바닷가에 구멍이 뚫린 바위를 보았다. 地圖岩이라 부른단다.
지도암을 바라보니 정말 우리나라 지도처럼 생겼다.
이 지도암은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윽고 비포장 도로가 나왔다.
이 해안 도로는 12년동안 공사중이란다.
지나쳐온 절벽밑의 길은 지지대가 없어 H빔을 절벽에 박아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길을 만들었다.
하여간 이 해안도로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
유일하게 해 준 것이란다.
생색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해줬으니 다행이지 않은가라고
하니 그건 그렇다고 한다.
흑산도는 홍도보다 훨씬 큰 섬이지만
홍도와는 달리 덜 알려져 있고, 입장료를 받지 않아 가난하단다.
곧이어 최익현을 기리는 비가 나왔다.
흑산도에 유배와서 2년여를 살았고
대마도에서 한많은 생을 마친 그의 삶을 잠시 생각해본다.
그분의 자손들이 이 섬에 제법 살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그분이 남긴 여덟자의 글귀
箕封江山
洪武日月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밤낮으로 무에 힘썼다)
짧은 실력으로 해석하자니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하지만 대충 그분의 뜻을 알듯하다.
오늘날 그분이 살아계시다면
과연 어떤 글을 남길까.
한참을 다시 달려
정약전이 15년간 유배되었던 마을 沙里에 도착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천주교신자란다.
흑산도는 물론이고 홍도, 주변 섬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신자인 까닭을 여기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약현,정약전,정약종,정약용 이 네분은 형제다.
큰형 정약현을 제외하곤 모두 천주교신자로 낙인찍혀
정약현과 정약용은 유배되고 정약종은 죽임을 당했다.
정약종은 정확한 사료가 남아있어 천주교인임을
알 수 있으나 정약전과 정약용은 사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원성을 지을 때 기중기를 발명했던 정약전은
천주교신자임이 틀림없으리라 여겨진다.
그분이 유배된 이 마을 사람들 거의가 천주교신자이지 않은가.
정약용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을 것이고
정약종은 많은 신자들이 참수당하고
흩어진 교세를 다시 일으킨 분이다.
아들 정하상은 황사영과 더불어
황사영백서로 유명하다.
신기한 것은 이 마을은 멸치로 유명한데
먼 바다에 나가서 멸치를 잡는 것이 아니다.
바로 코앞 해안에서 멸치가 난단다.
그래서 멸치를 배안에서 삶는게 아니라
잡은 멸치를 바로 육지에 내려 육지에서
솥을 걸어놓고 삶고 말린다.
웃기는 것은 공장이 없어
진도에 가져가 상표를 붙이는데
흑산도 멸치가 아니라 진도멸치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흑산도는 모든게 영세하다.
조금 더 가니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나왔다.
가족끼리 와서 수영하기엔 그만이다.
자그마한 백사장이지만 입자가 부드럽고 길게 이어져
상당한 거리를 나아가도 전혀 깊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오기엔 안성맞춤인 듯 싶다.
다시금 저 앞에 포장된 길이 보인다.
비포장 도로의 끝부분에서 한 처녀의 집을 보았다.
그녀 집까지 길이 나 있는데
그녀가 자기집 앞까지 포장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막고 있어 아직 포장을 못하고 있단다.
여자로서 그것도 처녀가 어떻게 위험하다는
흑산도에서 혼자 사느냐고 물으니
실인즉, 그녀는 아가씨가 아니라 할머니란다.
하지만 처녀인 것은 사실이다.
어느날 그 아비가 바다에 나갔다 죽고
여러 오라비도 또한 죽어 혼자가 되었는데
남은 것이라고 집한채 뿐이다.
집을 버리고 뭍으로 나가려 하니
오라비 핏줄인 조카 4명이 오갈데 없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힘들게 물질을 하면서 그 조카들을
대학보내고 결혼시키고 하다보니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다.
처녀 혼자 조카들을 키우다보니
성깔이 꽤나 드세단다. 이제 나이가 들어
물질은 못하고 기초생활보조금과 장성한 조카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슴 한구석이 아파온다.
여행사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급히 길을 재촉하여 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11시 10분전.
고마운 택시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배에 올랐다.
택시를 타고 흑산도를 일주하면서
20여곳에서 차를 세우고 구경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선 정말 멋진 흑산도 일주였다.
경치 또한 그만이고 가고픈 부산을 생각나게 했고
어릴 적 시골에 살던 시절을 회상하게도 했다.
그가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들
말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가 고인돌을 보여주면서
고인돌이 어쩌고 하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척
새로운 것을 안 듯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보니 가두리 양식이니 모래니 그가 알고 있는
흑산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도 해주었다.
여기도 다시와야겠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드디어 목포에 도착.
마중나온 여행사 직원이
못나올 뻔 했단다.
아침에 흑산도로 향했던 여객선이
파도가 거칠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왔단다.
홍도에서 발이 묶여 육지로 나오지 못한 날중 가장 긴 것이
10박 11일이었다는 홍도 유람선 가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택시 기사의 말도 생각난다.
예전에 핸드폰도 없던 시절 흑산도엔 은행도 없었단다.
그래서 여행객들이 한번 발이 묶이면
가진 현금 다쓰고 먹고살려니 할 수 없이 귀금속을
전당포에 팔았는데 전당포에서 반값도 아닌 삼분의 일 가격으로
그것들을 샀단다. 그래서 부자가 되어 육지에 집사고 땅사고...
점심을 먹고 일행과 헤어져
자연사박물관, 해양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나에겐 별 감흥이 일지 않은 곳이었지만
휘모는 마냥 신기해 한다.
지친 몸을 휘모가 끄는대로 이리저리
질질 끌려갔다.
마침내 7시 50분 용산역에 도착했다.
그리운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짝꿍은 교육이 아직 끝나지 않아 집에 없다.
2박 3일간의 홍도 여행
너무나 짧다는 생각이 든다.
유람선을 타고 주위를 일주 한 내용은
나의 짧은 표현으론 다 설명할 수 없어
대충 적고 말았다. 너무나 아쉬워 DVD를 사왔다.
더하여 차거운 바닷바람, 눈보라 속을 거닐던 몽돌해수욕장.
긴 수평선...하나 하나 마음에 깊이 담아왔지만
쉽게 설명을 못하겠다.
그리고 흑산도에서의 택시 일주.
아마도 택시로 흑산도 일주를 하지 않았으면
흑산도에서의 하루는 무미건조한 것이었으리라.
때문에 손지원에게 더없는 나의 고마움을 전한다.
여러 가지 신경써줘서 정말 고맙다.
덕분에 이번 여행은 환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택시기사의 말로써 이 글을 마치고 싶다.
흑산도는 결코 풍요롭지 못하고 모든게 적지만
유일하게 지역감정이 없는 곳이 흑산도다.
또 빈집이 많으니
시골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환영이다.
흑산도는 시골이라 마을 이장이라면
아직도 파워가 있다.
그 힘은 곧 마을사람들의 수에서 나온다.
그래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도시가 싫어지면 여기로 오라....
첫댓글 무지무지 부럽습니다.
가보고 싶네요. 언제나 그런 날이 올런지
우리애들도 여행의 묘미를 가르쳐줘야 할텐데 휘모가 부럽다
아~ 여행 한번 잘했네....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있는데....왜 여자가 없다는 거지??? 아무튼 부럽소!!!! 휘모야! 학교 잘 다녀라. 축하한다........ 난 잘 살고 있응께 걱정들 말고 모임때 봅시다.......
많이들 부러워해랑~ 모임은 확실히 정해진거야? 남자들만 모이는거야?
아직 몰라유 남자들만 만날 생각인데 여러분덜의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