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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미국의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버드 출신의 뉴욕타임즈 기자였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 출신으로
그가 "The Coldest Winter"라는 책을 마지막으로 탈고한지 5일 후였다.
한국전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생존 참전용사를 찾아다니며 발로 쓴 대작이다.
그는 6.25에 대해 맥아더의 전쟁이었으며, 그가 망쳐놓은 전쟁이라고 정의했다..
국민학교때 선생님이 말하길, 맥아더에게 맡겨두면 북진을 하여 통일이 됐을텐데
트루먼이 해임시켜서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고..트루먼? 그놈 참 나쁜놈일세..했던 기억.
그런데 핼버스탬(Halberstam)은 왜 거꾸로 맥아더가 망쳐놨다고 했을까.
몇년전 100분 토론이란 프로그램에서 그의 동상철거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보다가 이내 잠들어 버려서, 그때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모르게 되어 섭섭하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압록강가까지 전선을 밀어 올린건
그의 공적이 분명하지만 4개월 사이에 단거리 육상경기하듯 뛰어 갔다가
거기에 권리금 속도까지 붙여서 다시 밀려 내려온것 또한 그의 공적이다.
대한민국을 수호했다지만, 그가 없다고 대신할 미군장성이 과연 없었을까..
미국이 그들의 젊은이들을 떼로 죽여나갈만큼 한국이 예뻐서 참전한게 아니듯,
맥아더가 한국민을 사랑한다지만 왜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의문스러운데다
사랑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듯, 진정한 구애가 맞다면 1945년에 들이댔어야 했다..
김구선생께서 그리도 공을 들여 한국인OSS 결사대 5백명을 투입하려한 이유는
일제가 망하기 전에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함이었으나 핵투하로 그 작전은 불발된다.
임정을 부정하고, 한국의 승전국 지위를 단칼에 제외하는 일반명령 1호의 발신지는 맥아더였다.
일본전범들에게 후한 면죄부를 준것도, 히로히토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않은 이도 맥아더다.
"천황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하는 대신 자신이 그 지위로 올라섰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 없어야 했다.
일시적으로 위는 있을지언정 옆으로는 비슷한 지위도 없어야 했다.
추종자만이 있어야 하는, 오만과 이기심에 가득찬 그의 인격은 성장배경과 무관치 않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온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의 명문가였고
그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도 유명한 고집탱 장군이었다.
아서 맥아더에 대해, 그의 부관에 의하면
그의 아들을 만나보기 전까지 자기가 아는 최고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맥아더의 콧대높은 자존심은 일견 그럴만도 했다.
태어나면서 부터 준비된 장군이었으니 웨스트포인트의 1등 졸업은 당연하고,
역대 98점이라는 성적은 전무후무했으며
그가 육사교장 재직시 만들어논 교범은 여적지 유효하다.
언제나 진급의 선두주자였으며, 그것은 최연소 육참총장으로 까지 이어졌다.
거기에 생긴것까지 멀쩡했으니 뉘라서 뭐라 하겠나..
그는 23벌의 군복을 가지고 하루3번 옷을 갈아입는 신사이길 원했다.
핑키맥아더는 남편 아서의 사망을 막내 아들에게서 찾고자 했다.
더글라스가 마마보이로 될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핑키는 잘생긴 청년 더글라스 주변에 있는 여자의 접근을 원천봉쇄 한다.
엄마의 감시의 눈을 피해 드디어 만 42살에 성공한 결혼이었지만 7년만에 파경을 맞는다.
아내 루이스 맥아더는 주변에게 늘 잠자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다녔고,
성격차이인지 성적차이인지 몰라도.. 신은 역시 공평하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진주만 공습후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지금도 사가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인
필리핀 클라크기지의 전투기들을 소진시키고 재혼한 가족과 호주로 탈출하며
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나는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다.
터미네이터처럼 "I'll be back" 이라는.. 오면 좋고 안와도 그만인 애매한 표현이 아니라
"I shell return" 이라는 확고한 표현을 했다. 스타기질이야 어디가랴..
태평양전쟁에서의 주역은 그가 항상 불화를 일으킨 니미츠제독이었다.
그의 옆으로 서서 불화가 되지않는 사람은 없었고, 루즈벨트는 항상 중재때문에 고생했다.
유럽전선의 분기점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면, 태평양의 분기점은 미드웨이 해전이다.
따라서 맥아더의 역할이란 그의 대중적 인지도에 의함이지 위대한 승리는 사실 없었다.
우쨋건 그는 니미츠와 함께 항복문서를 받고 점령군으로서 도쿄에 있던중 남침보고를 받는데..
트루먼은 즉각 그의 휘하 8군을 투입하라 지시한다.
그 무렵 8군 사령관은 패튼밑에서 군단장질 하다가 유럽에서 도쿄로 날아온 워커였는데
그는 도쿄에서의 근무가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역전의 용사들은 대부분 전역하고, 새로 투입된 신병들은 게이샤집 출입에 열중이었으며
훈련은 고사하고 군기도 없고 장비마저 부실하여
8군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보급창이라며 투덜댔다.
극동군 사령부는 맥아더측근으로 인의 장막이 쳐져 있어서 잘 만날수도 없었다.
참모장 알몬드는 8군이 전투태세가 잘되어 있다고 공언했고, 맥아더는 그의 충견을 신뢰했다.
8군 중 선봉사단으로 결정된 24사단은 훈련부족에 장비부족이건만,
시건방만큼은 하늘을 찔렀고..그들은 동양인 사냥간다고 낄낄대며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미군의 바램대로 3류 군대가 아니었다.
무정장군이 이끄는 그들은, 마오와 함께 장개석과 싸우던 부대 중
한국인으로 구성된 파르티산 출신의 경험풍부한 정예부대였다.
워커는 한국과 가까운 규슈의 24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리지만
사단급 부대의 이동이란게 명령내린다고 즉각 현해탄을 건널수 있는게 아니다.
24사단장은 제일 정예인 21연대의 1대대를 항공편으로 부산에 먼저 도착시켰다.
1대대장은 북한군이 어떤군대인지,전술 작전능력은 있는지,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형이 어떠한지도 전무한 상태였다.
극동사령부가 파악한 북한군의 규모란 구식장비를 갖춘 7만명의 4개 사단 정도였으며,
미군이 참전만하면 지레 꼬랑지 내리고 철수할걸로 예상했다.
따라서 1대대가 미군의 존재감만 일깨우면 되고,
후속부대가 7월말에 뒷정리까지 끝낸다는 기막힌 계획의 도쿄사령부였다.
21연대장이 1대대장 스미스중령에게 내린 지시도 이랬다.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가라, 거기서 사단본부와 연락하고
잘 안되면 가능한 더 북쪽으로 가라.정보는 그게 다다..
지시받은 대대장이 다시 중대장들을 모아놓고 얘기하길,
한국에 북한군이라는 얘들이 연락도 없이 왔다는데 별거겠어?
이번 작전은 치안 유지의 목적이 클것 같으니 며칠있다가 귀환하면 될것 같다..
그들 스스로 미군은 대단한 존재였다.
불과 5년전 나치와 일제를 동시에 물리치고, 핵이라는 필살기까지 보유한 국가의 군대였다.
냉전의 상대인 소련도 미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했을 2류국가로 여겼다.
그러한 미군에게 웬 듣보잡인 북한군이라는 3류 군대는
지들의 참전소식과 함께 제풀에 사라질걸로 확신했다.
국군이 건네주는 정보도 참고하기는 고사하고 후퇴한다고 조롱하기에 바빴다.
드디어 7월 5일 한강을 넘은 북한군이 오산 죽미령 1번 국도에서 관측되었지만
선제공격으로 미군의 존재를 알리면 상황종료이니 1대대로선 별일 아니었다.
북한군 선두가 1.5km까지 접근하자 포대가 일제히 사격을 함으로서
한반도내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포탄의 정확한 타격에도 뭔 탱크들이 멀쩡했다.
미개해야 마땅한 북한군의 탱크는 지덜 M-4를 훨씬 능가하는 T-34였다.
유럽에서 미군전차는 독일전차에 항상 성능이 밀렸지만
독소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T-34는 누구나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명품이었다.
같은 연합군이었던 미군이 소련의 T-34와 맞닥트린건 이 죽미령 전투가 최초다.
집중사격으로 인한 뿌연 포연을 뚫고 북한전차가 들이대는데도
미군은 아직도 T-34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75mm 무반동총으로 공격했지만 가볍게 포탄을 튕겨버렸고,
주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죽미령을 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국군에 비해 대전차전 노하우가 있어
전차의 공포감이 덜하던 로켓포사수가 용감하게 후미의 취약부위를
가격했지만 끄떡없음에 미군도 T-34의 공포를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얘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기록된 전사의 한 대목..
전차가 미군진지를 파죽으로 돌파하자 미군중사가 일어나 손을 저으며 외쳤다.
야! 이놈들아, 우리는 한국군이 아냐, 우리는 미군이란 말야..
후미에 있던 포병들은 갑자기 전차가 나타나자 혼비백산했다.
끄떡 없음에도 놀랐지만 그리 빨리 올줄도 예상밖이었기 때문이다.
불행중 다행으로 적전차는 지들을 지나쳐 계속 전진해 갔고
간신히 수습한 부대원들은 공포로 떨기 시작했다.
수십km에 이르는 보병부대의 행렬을 보고 그 수에 압도당한 미군들은 겁에 질렸다.
그래도 우리는 미군이라는듯 1 대대장은 보병을 향해 화력을 집중시킨다.
기습당한 북한군 보병들이 즉각 산개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움직임은
미개한 후진국의 오합지졸의 모습이 아니라, 5년전 보았던 독일군보다 더 민첩했다.
540명으로 구성된 1대대는 거의 괴멸 당했지만
이것은 앞으로 계속될 참담한 미래의 암울한 전조였을 뿐이었다..
미 육군은 후일 이 죽미령 전투의 오만함에 대하여 교범에 채택했다.
국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후퇴했고,
미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조롱하며 비웃다가, 국군과 발맞추며 후퇴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대구까지 함락됐고 낙동강전선이 무너지면 부산이 떨어질 판이었다.
낙동강 뒤에는 예비대도 전무했다.워커의 증강요청에 대해 인천에 매달린 맥아더는 들은체도 안하니
절박한 워커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후퇴하면 바다에 빠진다고 독려했다.
이때 워커의 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기어이 지켜냈고,
그 사이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젊은 장교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9월15일 맥아더는 인천의 상륙에 성공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반대를 무시하고 밀어부친 결과다.
인천작전을 두고 하도 말들이 많이 돌아서 도쿄에서는 인천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맥아더는 유럽전선의 장군들과 사이가 별로였다.
그의 독선과 오만이 원인이었지만,
그가 볼때 자기의 육참총장시절 따까리 출신인 아이크나,
4성 장군일때 소령이던 브래들리 정도는 그저 Kid 일뿐이었으며,
그의 차차기 후임총장인 마샬도 마찬가지였다.(패튼과 붙여 놨으면 볼만했을듯..)
그는 인천의 지휘관으로 알몬드를 임명했다. 상륙의 주역인 해병과 해군은 경악했다.
맥아더가 충복 알몬드를 진급시키기 위해 인천지휘관으로 명했다는 말이 돌아
그들은 작전명을 인천이 아니라 앨몬드 진급작전이라고 빈정댔다.
그들 둘은 서울 탈환에만 신경썼고, 무조건 전진 명령만을 지시했으나,
미 해병 1사단 지휘관들은 그런 명령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전쟁중 임에도 도쿄호텔에만 머물고 있는 맥아더와,
후방에서 깨끗한 군복에 더운음식 챙기는 알몬드를 경멸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중 단 하루도 한국에서 잠을 잔적이 없다.
알몬드는 캠핑카 같은 트레일러차를 갖고 다니면서 더운물 샤워에 따로 음식을 만들게 했다.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들, 특히 지휘관이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는것이 전통인
해병대 장교와 병사들은 그런 맥아더와 알몬드를 비웃었다..
인천이 성공하고 본토로 부터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면서 워커도 낙동강을 돌파했다.
이번엔 북한군이 일사천리 후퇴를 하여 북진이 시작됐는데, 맥아더는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해병 1사단과 미 7사단, 국군 1군단을 조합한 10군단을 만들어 알몬드가 지휘토록 했다.
8군 사령관 워커는 황당했다. 한국전 같은 국지전에서
야전군의 지휘체계를 양분한다는 것은 군사학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맥아더는 알몬드에게 병력을 주어 워커의 지휘권을 약화시킬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10군단으로 하여금 원산에 상륙해서 장진호 계곡을 거쳐
서쪽에서 북진하는 8군과 만나도록 지시했다.(허당이 된 원산상륙작전도 진행은 됐습니다)
그들은 이해할수 없었고, ROTC 훈련병도 이런 엉터리 작전은 안할거라고 분개했다.
혹한이 닥쳐 오는데 험준한 산간에 군을 투입하는 발상이란게 이해할수 없었다.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쾌속진군하라는 알몬드의 지시를 무시했다.
진군을 늦추더라도 병참선을 확보하면서, 장진호 부근에 비행기 착륙공간도 마련했다.
10군단 소속의 미육군과 한국군이 궤멸될 위기에 10만 5천명이 살아 돌아올수 있었던건
스미스 소장의 이러한 헤딩에 의한 항명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전에 한국은 통일될것이고, 미군은 고향에 돌아간다고 낙관했다.
이승만은 입을 헤벌리고 고저 니가 최고라고 했다.(그눔의 크리스마스가 항상 웬수다)
그러나 북진중이던 그들에게 중공군 포로들이 간간이 잡혔고,
그들로부터 중공군이 이미 한반도 내에 포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현지 지휘관들은 도쿄사령부에 보고했지만, 맥아더사령부의 정보참모 월로비는 묵살했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중공군은 기껏해야 3만명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곱하기 10을 해야 했으며, 그들은 심상찮은"팽덕화"란 인물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8군쪽의 미 기병1사단과 국군1사단은 사단 전체가 위험하여 워커는 후퇴 결정을 내린다.
스미스 소장의 해병 1사단도 주변에 포진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병참선이라는 생명줄을 바탕으로 전설로 회자되는 전투를 벌이며 흥남으로 철수하니
이것이 미 사관학교 전술교리에도 들어가 있는 저 유명한 장진호 전투다.
이 후퇴는 20세기 들어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게 된다..
12월23일 한국전 내내 고생바가지만 긁던 워커의 사망으로, 트루먼은 후임에 리지웨이를 임명했다.
그는 떠오르는 차세대주자였고 노르망디때 82공수 사단장을 역임한 촉망받는 군인이었으며,
대원들과 함께 적지로 점프한 용감한 사단장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트루먼은 웨이크섬에서 맥아더를 만난다.
군 통수권자와 휘하 장군의 만남이 아니라 정상회담 분위기였다.
트루먼은 그를 당장 해임시키고 싶었지만 맥아더란 인물이 그리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트루먼이 8군 사령관으로 리지웨이를 임명한것은 맥아더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고,
리지웨이는 부임하여 무능한 지휘관을 교체했는데 그들은 거의 맥아더 인맥이었다.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리지웨이를 처음 만나, 또 다시 알몬드의 지휘를 받으라면
옷을 벗겠다고 했고, 리지웨이는 그 의견을 기꺼이 수렴했다.
맥아더는 참 군인들에 의해 불신임 당한 것이다.
현지 미군들은 맥아더의 야전군 지휘권 양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실패의 인정이란 단어는 없었고, 오히려 워싱톤으로 책임을 돌렸다.
그즈음 맥아더를 인터뷰한 기자는, 그가 나이보다 훨 늙어 보였으며
불면과 조울증에 시달렸는데도 측근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에 바빴다고 밝혔다.
도쿄사령부는 전장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미군의 패배는 트루먼 행정부가 비판에서 자유로울수 없게 하였다.
다만 리지웨이의 부임으로 8군과 워싱톤의 핫라인이 만들어졌다.
그는 전투에 직접 참여함으로서 전쟁의 참혹함을 아는 군인이었고
사병의 생명도 장군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군인이었다.
매튜 리지웨이는 3성 장군임에도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최전선을 누비며 독려했다.
그는 현실을 직시했고, 워싱턴처럼 전쟁이전 상태로의 복귀를 목표로 삼았다.
우리에겐 섭섭하게 들리나, 일본에게 핵을 사용할수 있었던건
그들에게 핵이 없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등 뒤에 있는 소련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직접 부딪혀 본 중공군과 북한군의 전력이란게 절대 녹녹치가 않았다..
서울을 내준 미군은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북진했고,
51년 2월 양평의 지평리와 원주에서 양측이 격렬하게 주고 받았다.
원주에서는 국군 6사단이 무모하게 전진하다가 궤멸 당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무리한 명령이나 내리던 알몬드의 지시로 진군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현지에 도착한 리지웨이는 면전에서 알몬드를 호되게 질책했다.
서울 수복하는데는 지평리의 2개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이 전투를 큰 승리로 이끈데는 프리먼과 트레시 두 대령의 공이 컸다.
프리먼은 후일 4성장군이 되었지만, 트레시는 포로로 잡혀 사망한다.
이들은 뛰어난 공적에 비해 훈장이나 포상을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리지웨이에 의해 소외된 맥아더 인맥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리지웨이가 중공군과 혈전을 치르고 있을때
맥아더는 도쿄호텔에서 리지웨이의 작전에 문제가 있다는 성명이나 발표하고 있었고,
워싱턴은 그런 그를 한심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중 전세계를 도청하는, 국가안보국(NSA)에서 우연히 정보를 입수했다.
맥아더가 한국전을 중공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할것이란 내용이었다.
보고를 접한 트루먼은 뚜껑이 열렸지만, 국민스타 맥아더의 파면이란 정치생명을 거는 모험이었다.
51년 4월 9일 트루먼은 참모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애치슨은 진작에 파면됐어야 한다했고, 마샬은 신중해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였다.
브래들리는 따로 3군 총장들과 협의했다. 그들 4인이 동의하자 마샬도 동의했고,
4월11일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한다.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8군은 밴플릿트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자신의 해임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공화당 보수의원들이 즉각 반응했다.
닉슨은 원상복귀를 요구했고, 제너의원은 트루먼 탄핵을 요구했다.
맥아더의 귀국길에 일본인 25만명이 배웅했고,뉴욕에서는 700만명이 환영했으며
맥아더는 의회에서 노병은 사라질뿐이라는 옛군가의 노래말을 얘기했다.
트루먼은 지랄한다고 했고, 애치슨은 이제 끝났다며 안도했지만
그러나 노병은 사라져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공화당 대선후보로 당연히 추대될꺼라 믿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여러 불리한 정황중 웨이크섬의 기록도 문제가 됐다.
그때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노라 주장하자, 백악관에서 그 기록을 공개한다.
하여 청문회를 열어 그의 해임에 대한 정당성을 다루게 됐는데,
공화당의 요청에 의한 이 사안은 제 발등을 찍게 된다.그의 거짓이 드러난 것이다.
맥아더는 합참이 자기를 지지했다고 했지만, 합참은 그가 군을 멋대로 운용했다고 반대로 진술한다.
그에게 가장 불리한 진술은 국방부와 합참의 중견 장교들로 부터 나왔다.
맥아더로 인해 육사 동기생들과 후배들이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무수한 죽음을 당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은 맥아더를 증오했다.
이들은 의회 보좌관들에게 그의 실체와 문제점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다.
브래들리마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적과 싸우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6일에 걸친 브래들리에 이어 3군 총장들의 증언도 별반 다르지 않자,
노병은 그제서야 사라질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1964년 4월5일 84세에 빗줄기 강하게 퍼붓던 어느날,
그는 옛노랫말처럼 죽지않고 영원히 사라져 갔다..
이것은 정치가 개입된 미 군부내의 파벌싸움으로 비춰질수도 있습니다.
6.25가 끝난 후의 영양가 없는 결과론일 뿐일수도 있으며, 얼핏 편향적으로도 보입니다.
또한 맥아더가 한국전 초기 공적을 쌓은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허나 우리가 여태 굳게 믿어왔던 사실들에 대하여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통렬한 이견을 제시합니다.
핼버스탐은 미국 주류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워싱턴이나 도쿄에 앉아 전투를 명했던 엘리트의 입장이 아니라
묵묵히 민초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재해석한 유작을 남겼다고 생각됩니다.
eastno의 시각에 비춰진 그가 지휘한 작전의 문제점에 대해
장진호 전투의 디테일을 통하여 한번 더 들여다 보고, 지겹다는 원성을 들어온 전쟁얘기를 마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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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평양 전쟁후 미국은 패전국 일본의 천황제도를 폐지할 수도 있었다. 일본전범들에게 후한 면죄부를 준것도, 히로히토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않은 이도 맥아더다.
필리핀의 경우는 이 냥반의 아버지때 부터 인연이 많고, 일본도 좋아할 이유가 있지만.. 대한민국은 사실 좋아할 이유는 없어 보이고 정치적인 발판으로서 필요 했던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일인들은 강자에 약한 그들 특성대로 그를 신으로 추앙한것 같더군요..
지겹다는 원성을 뒤로하고 계속 하시면 안되까이 아주 잼 있구만요......숨은 실체를 찾아내는 고수님. 홧팅
제가 찾아낸건 쥐뿔두 없구요, 핼버스탐이 찾아낸 거지요.. 장진호 전투 얘기나 마저 함 보세요..재미 있으실거라는 ^^ 그건 제 생각 위주라는.. 오늘밤 써서 올릴께유
오늘따라 왜 일케 재미있게 쓰셨는지..미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조롱하며 비웃다가, 국군과 발맞추며 후퇴하고..맥아더에 대해 그간 알고있던 사실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미로웠네요..다음에는 우떤 내용이 올라올까 기대가 됩니다
재미있다는 거짓말 믿어두 되는 정말이여 핼버스탬의 얘기가 100% 맞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맥아더의 인격이 좀 문제가 있었던게 청문회에서 검증 됐다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입장에 서 준사람이 그리 없다는게 증거 아닐까.. 한다는
고수님! 글 보면 그냥 반해버린다는.... 우찌이리 잘 적사옵니까?...
에구 후리지아님, 계속 쭈욱 하염없이 밑도끝도읍씨 반하시라는.. 잘 적사옵니까 근디 여자분이 전쟁 얘기인데 정말 재미 있으세유 ^^
녜~ 여러가지로 제가 몰랐던것을 갈켜주시니 울메나 좋은지 몰러유~ 지는 고수님 꼭 보고싶었는디 지난번 나나님 때도 리챠드님이 고수님인줄 알고서리...가까이 계신데 오시지 그랬남유?~
군사학에 대해 정통한 고수님. 북한을 무찌르고 통일할 비책은 없습니까
어느 쪽이던 지대루 정통한건 항개도 읍따는.. 그저 이것 저것 맛만 보구 댕기는거지요..통일이라는 매우 간단한 이슈를 시방 저한테 물으시는 중 이슈 ^^
마지막 전쟁이야기는 끝까정 다 읽었음 나지겹다고 한 장본인 아님혹 들을 원성에 대비하여...꼬리 샤샥 내리심... 다음 이야기는 세계를 주름잡던..희대 카사노바님들 스토리는 어때요 ㅇ으음전공분야 일 것 같아서리....아님..저런 것도 잼있게 엮어 가실것 같은데..그리이스 신화 주연공들
거봐유, 시방 끝난것두 아니구 장진호 야그 더 한다는디.. 카사노바 얘기나 하라구 허시니.. 6.25두 됐구 하니 한번 더 보시라는.. 아님말구..... 목정 아짐이 젤루 지겹다구 하더라는
그렇지요...맥아더가 유독 우리에게 미화(美化)된 거이 상당부분 있다는 야그는 그 전부터 들은 바.
맥아더가 은퇴해서 후일 말하길.. 트루먼 걔가 그래도 감히 내 목아지를 칠만한 근성은 있는 애였어..라고 했다는. ^^ 맥아더가 트루먼보다 4살이 더 많아유..
이제 막 재미 붙이려 하는데 끝내려 하다니 적극적인 반대를 해야하나, 구애작전을 펼쳐야 하나요? -고넘의 구리스마스...ㅎㅎ 폭넓은 식견으로 정보와 재미를 함께 주심을 감사드리며 쭈우욱 이어지기를...
두공님은 평소에 잘 안뵈다가 느닷읍씨 등장하신다는.. 근디 누구더라........으음,....퐁듀님은 잘 계시죠 ^^ (간신히 기억해 냈다는..)
고수님도 참... 여쭌 말에 암말 없이 뜬금없는 말씀만...ㅋ 아마 여그 회원들 중 눈팅 발달 정도는 제가 최고일거라는...ㅎㅎ(예전 그깨 여력이 남았다면 아직 전 투덜이로 칭하고 싶은데 어떠하올지...)
두공님이 정말 재미있어 하시는듯..^^ 6.25 때 대표적인 한국군 얘기나 마저 해볼까요 칭하시는거야, 편하신 걸루다가.. 암거나 하시라는..
팔로군 출신의 무정장군.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그 냥반두 인천작전 이후 바로 숙청 당했다지요 어찌됐건 한민족의 걸출한 인물이었는데..
뭐야울애덜 맥아더 동상앞에서 사진찍어주며 한국을 사랑한 아주 휼륭한 장군이였다고 야그 했는데...마마보이에 이기심과 오만이 가득한 파벌주의였다고 다쉬 말해줘야 하나난 한입갖고 두말 몬하는디...쩝...
그것두 분명 맞는 사실이지만, 그가 위대한 장군이었다는것 또한 틀린 얘기는 아니니 몇가지만 추가 주문해서 한입갖고 다 먹어도 된다는..짬짜면 이라구 아실랑가 ..
공인된 역사 평가 속에서 맥아더는 매우 독선적이며,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요. 한술 더 떠서 나르시시즘적인 이기주의자로.그런 맥아더의 인격형성에는 어머니의 공?이 큰 거 같아요. 웨스트포인트 재학시 그의 어머니가 학교 근처 호텔에 방을 구해놓고 맥아더를 감시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대략 난감@@@ . 맥아더는 한국 전쟁의 초기 열세와,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예상을 실패하는 등, 큰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는데.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를 미화한다는데 맥아더는 가장 적격인 인물이었네요.
들님의 요약이 외려 제가 길게 쓴거보다 더 실하게 와 닿는다는.. 나도 학교 근처에 호텔방 얘기에서..... 했었다우 ^^
아무리봐도 eastno님 입담은 감히 따를 수가 엄따는.. 글 내용과는 상관이 없는 질문 하나.. 이거 워드 작업하시려면 시간이 얼매나 걸리신대요
도쿄호텔방의 맥아더와 수류탄을고 전장을 뛰는 참 군인 리지웨이와의 대비구조가 미롭네요 ^^ 근데 e님 이런 글을 쓰시다 보면 금연이 어렵지 않으셨나 ...그게 걱정도 되구 궁금도 해지는데용
아니 근디, 호흡님은 그간 어디가서 맹탕호흡하구 왔길래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요 하긴 뭐 시간날때 들르는게 맞는거긴 하지유.. 때매 요즘 죽겄다는 하루 4-5가치로 다시 늘고 있는 중이라는...으음, 어캐해야 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