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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월4일(월)맑음
The West’s big lie about Mother Teresa: Her “glorification of suffering instead of relieving it” has had little impact on her glowing reputation
Mother Teresa was a very successful evangelist-but a champion of medicine or humanitarianism? Not so much
George Gillett-Sunday, Jan 3, 2016 11:00 PM +0900
2016년1월3일 자 <Salon살론> 인터넷 잡지기자 조지 질렛트씨의 기사:
마더 테레사에 대한 서방세계의 큰 거짓말-그녀는 고통을 치료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찬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드높이는데 전혀 영향 받지 않았다.
마더 테레사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선교사였다-하지만 의약의 챔피언이며, 인도주의자였을까? 글쎄올시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 캘커타에서 병든 빈민을 치료해주고, 돌봐주는 사람 없이 죽어가는 행려병자를 임종할 때까지 보살펴주는 일에 일생을 바친 공덕으로 성녀로 추앙받으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알려진 것과는 다른 어두운 진실이 영국언론에 의해 밝혀졌다. 영국 언론인이 마더 테레사의 자선단체를 취재하러 갔을 때 주사바늘이 여러 번 사용되며 처방전도 없는 약이 임의로 사용되고, 더구나 약을 적시에 쓰지 않아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테레사 수녀가 벌이는 자선사업의 일차적 동기는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며 신을 기쁘게 함이며, 자기가 믿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그녀의 선행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 빈민들의 실질적인 치료와 자비심에서 나온 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속내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여, 인도 천민과 빈민들의 고통은 싫어하거나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되니 그들의 고통을 반가워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용하여 신께 잘 보이고, 신의 영광을 드높여라.’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신들이 구원받는데 아주 유리한 티켓을 따기 위해 빈민들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빈민들을 도와줌으로써 제 가슴이 뿌듯해져 마음이 행복해지며, 게다가 신의 축복까지 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톨릭의 세계 선교전략인데,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이다.
A significant victory for the Catholic church, which corresponded with the high profile to fast-tracked to her sainthood.
테레사 수녀가 한 일은 카톨릭 교회를 위한 의미심장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 이는 그녀를 성녀의 지위로 빨리 올라가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과 잘 맞아떨어진다.
She presented to the West a perfect role model: a do-gooder who didn’t threaten to challenge the status-quo. In the words of Kolkata-born journalist Mihir Bose, “She’s part of the western agenda, it makes the West feel better; ‘this is one of us, once again rescuing the third world.’
테레사는 자신의 업적을 인정하여 성녀로 품수해준데 대한 답례인지는 몰라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연설할 때 바티칸의 낙태반대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낙태반대는 여성인권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해 있는 민감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테레사 수녀는 일방적으로 바티칸의 편을 든 것이다. 그녀는 서방세계에 완벽한 본보기를 제시했다. 기존체제에 도전하거나 기득권체제를 전혀 위협하지 않으면서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역할 말이다. 캘커타 출신 언론인인 미히르 보우즈씨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녀는 서방세계의 숨겨진 의도의 한 부분입니다. 그건 서양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겠죠. 이 수녀는 우리(서방세계)와 한 편이니, 우리가 또다시 제 3세계를 구원하고 있는 걸 보라며 자기만족에 빠지겠죠.’
사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벌이는 자선사업, 사회사업은 자기네 신의 이름을 드날리기 위한 책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인심을 얻어서 자기 종교가 영원토록 번영하려는 종교집단 이기주의의 발로이다.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불자들이 사회사업이나 자선사업을 벌이는 경우에도 이러한 종교집단이기주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저들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불교에서 벌어지는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은 어떤가? 한국불자들이 좀 살만해지니까 여러 단체를 꾸려서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에 우물 파주기, 학교 지어주기, 학용품 갖다 주기를 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월주스님, 법등스님 등이 이름나 있다. 또 법륜스님은 정토회JTS를 중심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님들과 불자들은 타종교의 활발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에 열등감을 느끼며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불교도의 사회참여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 타 종교가 잘 하고 있는 일을 본받아야한다.
그런데 오늘 도향스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 티베트 노승이 히말라야를 넘는 천신만고 끝에 다람살라에 계신 달라이라마존자를 뵈러왔다. 그 노승은 젊은 시절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무거운 짐을 지는 노역을 너무 오랫동안 했기에 어깨가 한 쪽으로 기울어져 걸을 때 뒤뚱뒤뚱하였다. 달라이라마존자를 뵌 노승은 감개무량하여 눈물을 흘렸다. 존자가 묻기를 ‘스님, 그토록 오랫동안 박해를 받으셨는데 무엇이 제일 두려웠습니까?’ ‘존자님, 저는 제 마음 속에 중국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까봐 그것이 제일 두려웠습니다.’
자기 마음에 미움의 씨앗이 심어질까봐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니!
아, 얼마나 거룩한 마음이며, 금강과 같은 지혜에서 나온 용심인가!
비단처럼 부드럽고 하얗게 펼쳐진 보살의 마음에 행여 하나의 오점이라도 묻을까봐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여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완전한 성불의 지위에 오르도록 하리라는 보살의 서원을 어기게 될까봐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다쳐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날까봐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강제노역 하다가 세월 다보내고 수행은 언제 하느냐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고, 제 마음에 미움과 원망이 혹시라도 일어날까봐 그것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천하에 무엇이 제일 귀한가? 제 마음에 보리심의 씨앗, 깨달음의 씨앗, 알아차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이다. 천하에 무엇이 제일 두려운 일인가? 제 마음에 탐욕의 씨앗, 미움의 씨앗, 어리석음의 씨앗, 인색함의 씨앗, 질투의 씨앗, 사견의 씨앗, 의심의 씨앗들이 제 멋대로 뿌려져 무성해지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제 마음에 불선심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슬금슬금 자라나고 있는 데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그 결과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야말로 천하에 제일 두려운 일이다. 불자는 사회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제 마음에서 불선법의 씨앗을 뽑아 태워버리고 선법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능숙해야 한다. 나는 출가할 때부터 불교적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았지만 용기와 실력이 없어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늘 불편하였고, 또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타종교와 스님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사유하고 실천하고 있다. 불교의 진리를 무상으로 무한정 선물하는 것이다. 그건 법보시이다. Dhamma를 보시하는 것이다. 담마다나dhamma-dana, 내가 항상 할 수 있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고, 다시 태어나도 계속 할 것이다. 법보시는 언제나 즐겁고, 열의를 일으키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깨어나게 하고, 의식을 고양시키고, 낮은 차원의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 Sabba danam dhamma danam jinati. 모든 보시 가운데 법보시가 최고.
점심 때 진성도예가족이 도착했다. 공양간에서 점심을 먹고 선원객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다. 그들은 모처럼의 휴가를 내어 며칠 지인들을 찾아다닐 예정이다. 나를 찾아보는 것이 그들의 첫날 스케줄이다. 조카 진성이는 벌써 초등학교4학년 올라간다고 한다. 다음 목적지는 성삼재, 거기서 노고단 까지 왕복 산행할 것이라 한다.
정안보살님께 수요명상시간에 <법구경-담마파다/전재성 옮김>을 독송하라고 하다.
도향스님이 번역한 <보리도에 이르는 차제-넓게 선한 것이 여기에 있다>와 <손 안에 있는 해탈과 中觀중관의 열쇠>가 도착했다. 며칠 전 알라딘 도서에서 주문했던 것이다. 쫑가파 대사가 저술하신 불세출의 저술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출판사를 잘못 선정해서 허접한 디자인으로 출판되었기에 빛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 내용을 보충하여 새롭게 출판하자고 권청했다.
2016년1월6일(수) 맑음
찬바람 분다. 대구 관오사에서 주관하는 미얀마 성지순례에 어머니가 참여하여 아침에 출발한다고 문자가 왔다. 공항에서 대구 불자 옥담마 거사와 수마나 보살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도반이 되어 함께 가게 되었다고 수마나 보살이 소식 전한다. 쉐다곤 황금사원 앞에서 내생에 다시 태어나 비구스님이 될 것을 발원하라고 당부하다. 선재라, 보리심이여. 아직 일으키지 않은 사람은 일으킬 것이며, 이미 일으킨 사람을 날로 증장하여 지이다.
2016년1월7일(목)맑음
아침 정진에 몸이 뻣뻣하고 다리도 아파 좌선하기에 싫은 생각이 나다. 이럴 땐 차라리 經行경행을 하는 편이 나은데 선방규율 상 그럴 수 없다. 앉기로 정해진 시간은 누구나 이유 없이 앉아야 한다. 신병 훈련소 같은 규율이 적용되는 게 선방생활이다. 하루 24시간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행동을 하기로 되어있다. 이게 淸規청규이다. 천지사방에서 모여든 천방지축 운수객들의 행동지침이 되는 청규가 그나마 지켜지니까 그래도 선방은 잘 굴러간다.
2016년1월8일(금)맑음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의 말에 이런 게 있다. 페이스북에서 발견했다.
“마지막 나무를 베어버리고, 마지막 물고기를 먹어 치우고, 마지막 개울마저 더럽힌다면 그제 서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When you cut the last tree, eat the last fish, and make the last stream dirty, you `ll see you can`t live on the money. -Indian prophet
지금 인간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 지구는 운전사 없이 질주하는 기차처럼 달리고 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아무도 모른 채 그냥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다. 군비경쟁, 자원고갈, 과잉생산, 과잉소비, 빈부격차, 생존경쟁, 종교과잉, 폭력테러, 언론조작, 우민화....한 마디로 탐진치 삼독심이 증폭되는 세계추세이다. 五濁惡世오탁악세이다.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너는 더러움에 물들어 사는 더러움의 졸개이냐, 더러움에 더러움을 더하는 놈이냐, 더러움을 정화하여 맑음으로 나아가는 님이냐, 맑음을 가져와 五濁을 맑혀주는 님이냐?
오늘은 결제한지 반이 되는 날. 반 결제를 기하여 산행을 가기로 했다. 8시30분 대중이 등산 차림을 하고 점심을 챙겨서 뒷산을 오른다. 처음부터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숨이 가쁘고 종아리가 땡긴다. 도향스님과 짝이 되어 천천히 따라가다. 쉬엄 쉬엄 가다보니 선원장과 입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칼바람이 뺨을 때린다. 지리산의 남부군 게릴라들이 겪었을 고초를 떠올린다. 민족해방투쟁이 아니라 거의 생존을 위해서 하루 하루를 겨우 버텨내던 1953년 지리산의 겨울나기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등성이 길을 한참 달리다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 3시 방향으로 바꾸어 산 아랫길로 내려간다. 토끼가 꼬꾸라질 정도로 급한 경사를 뛰어 내려가다. 경사가 끝난 저쪽 개활지에 토굴 한 채가 다소곳이 앉아있다. 龍穴庵용혈암이다. 잘 빠진 소나무가 토굴을 둘러싸고, 바람이 잦아들며 햇볕이 따뜻하게 비쳐드는 곳이다. 암주는 외출중이라 토굴의 문이 다 잠겨있다.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아 숨을 고른다.
먼저 온 하판스님들이 물을 데워 라면을 끓이는 중이다. 수프를 뺀 대신에 콩나물과 말린 버섯을 넣고 끓인 라면은 국물이 시원하고 맛이 상쾌하다. 라면 냄비를 가운데 두고 선원장과 입승, 정만과 도향스님과 둘러 앉아 한 국자씩 떠먹는다. 입안이 데도록 국물을 들이키며 풍경을 둘러보니 멀리 섬진강이 구례를 안고 굽이돌아나간다. 안온하다. 하판스님들이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깨끗이 잘 한다. 다시 길을 나서 산을 내려오다. 큰 절에 돌아오니 정오를 알리는 범종소리 들려온다. 산행에 걸린 시간이 3시간 30분이구나. 그러니까 점심 먹으며 쉰 시간을 빼면 3시간 정도 걸은 것이다. 샤워하고 빨래하고 낮잠 한 시간 자다. 반 결제 날을 여유 있게 잘 보내다. 뜬 구름 한 조각이 바람에 실려 가벼이 잘 다닌다.
2016년1월9일(토)맑음
토요일이라 마당 쓰는 날이다. 빗자루 질하며 부도탑까지 내려갔다 오다. 어제 산행 후유증으로 종아리가 아프고 몸이 찌부둥하다. 오후에 자유 정진한다고 발표되다. 오후에 누워서 좀 쉬다.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2016년1월10일(일)맑음
일 없이 하루가 흘러가다.
2016년1월11일(월)맑음
선과 악의 대립은 정치적 활동이다.
선한 쪽에 섰다고 주장하는 놈이 권력을 얻기 위해선 악인을 더 악하게 보이게 만들어야한다. 악인을 더 악한 놈으로 보이게 만들수록 대중은 선한 쪽에 서 있다고 믿는 놈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선과 악은 상대적이다. 선이 진짜로 선하지도 않고 악이 진짜로 악하지도 않다. 현실은 선과 악이 뒤섞인 잡탕이다. 다만 선과 악이 혼합된 미묘한 농도 차이로 그 외양이 드러난다. 45%악+55%선≑선, 45%선+55%악≑악으로 분류될 수 있다. 사실은 자기 쪽을 ‘악’이라 자처하는 악은 없다. 어느 쪽이건 선을 자처한다. 선을 자처하는 쪽이 자기들의 반대에 서있는 쪽을 ‘악’이라 지칭할 뿐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니고 정치적으로 판단된다. 현실정치에서는 선과 악이라기 보다는 彼我피아, 與野여야라는 용어가 쓰인다. 선이 선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악이 악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선과 악이 힘을 받는다. 그러기에 선과 악은 태생적으로 모두 권력지향적이다. 힘을 가지려면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선과 악 양단은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립되는 양쪽의 세력은 대중을 서로 자기 쪽으로 데려오려고 선전과 선동, 언론조작과 정보를 통제한다. 급기야 대중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려가 무리를 이룬다. 대중이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는 그들의 자유의지로 판단되는 게 아니라 조작되고 통제되어진다. 결국은 전체 판도를 장악할 만한 힘이 있는 쪽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다. 그리하여 자기네 쪽이 ‘선’이었기에 대중이 자기들을 선택했다고 당당히 선전한다. 이렇게 하여 힘 센 자들은 대중에게서 권력을 위임받는다. 위임이라기 보다는 우매한 대중으로부터 권력을 詐取사취했거나 탈취해간 것인데도, 대중은 무기력하게 추종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를 衆愚政治중우정치라 한다. 과반수 대중의 지지라는 명분으로 획득한 권력은 이렇게 해서 합법화, 정당화 된다. 현실정치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란 항상 힘센 쪽의 승리로 귀결된다. 현실정치가 이렇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대중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먼저 깨어난 자가 다른 사람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 대중이 깨어나서 전체판도를 읽을 만한 시야를 확보하고 비전을 가지지 못하는 한 힘 센 자들이 끌고 가는 기차에 실려 끝없이 달려갈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기차를 움직이는 데 드는 모든 비용과 노동까지도 무제한으로 제공하면서 까지도. 이 무슨 미친 짓인가?
오후 정진을 하고 마루에 서서 앞산을 바라본다. 잎을 떨군 나무들이 모여 군락을 이룬 모습이 보드라운 잔털이 보풀보풀 난 사슴의 등짝 같다.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보슬보슬 쓸리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 가운데 푸른 소나무가 양송이처럼 끼어있다. 너무나 평화스럽고 다정한 풍경이다. 따뜻한 물이 가득하고 바닥까지 투명한 열대지방의 바다 같다. 첨벙 뛰어들어도 한 점 물방울도 튀기지 않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깊은 고요다.
2016년1월12일(화)맑음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면서 ‘甚麽物심마물고?’ 이 무슨 물건인고?
주장자를 치켜들고 ‘보느냐?’ 탁자를 한 번 치면서 ‘듣느냐?’
집게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면서 ‘네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 움직인 것도 아니다. 누가 했느냐? 답을 가져 오너라.’
막대기로 탁자를 때리면서 ‘이것 밖에 없다.’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이것 밖에 없느니라.’
이런 짓들이 禪門선문에 횡행한다. 모두 깨달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자기의 깨달은 소식을 보인 것이다.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모두 欲의 부림일 뿐이다. 후라이판에 놓인 메뚜기 같이 파닥이며 손발을 놀리고, 고슴도치를 보고 놀란 개처럼 입을 벌려 짖어댄다. 깨달음을 남에게 보이려는 의도가 벌써 욕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혹하게 만들면 추종자가 생긴다. 사람이 모이면 힘이 실리고 돈이 모인다. 깨달음을 과시하면 인기와 권력과 돈이 따라온다. 그래서 깨달음 사람이 인기, 권력, 금력에 서서히 중독되면 깨달음 장사꾼이 된다. 오늘 한국의 선문에서 말하는 소위 ‘깨달음’은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보자.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狀不得也.
한 물건’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둥근 원(一圓相)입니다. 옛사람이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습니다(頌云). “옛 부처께서 나시기도 전에, [이미] 뚜렷한(凝然) 둥근 하나의 모습(一相圓). 석가모니(釋迦)가 오히려 이해하지(會) 못한 것을 가섭(迦葉)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 물건’이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고 한 이유입니다. (退耕 권상로의 번역)
1.한 물건一物을 깨달은 것을 ‘깨달았다’고 하며, 그래서 그 한 물건에 대한 소견이 생기면 깨달음의 소식이 왔다고 해서 ‘한 소식했다’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부정부패와 사회적 악영향이 중대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해 검사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형사상 고발을 했다고 치자. 그러면 깨달은 사람은 피고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출두하여 깨달았다는 증언을 진술해야한다. 그 증언 자료로 쓸 만한 것이 선가귀감에 나오는 위의 구절이다. 그런데 피고의 진술가운데 자체 모순이 있다면 증거자료로 채택되지 못 할 것이다. 위 문장을 살펴보자. 한 물건은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다(名不得 狀不得)고 전제했는데, ‘한 물건’이라 벌써 이름을 붙였고,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昭昭靈靈)’이라는 모양을 이미 그렸다. 한 문장 안에서 자체적으로 모순을 내포한 진술을 한 것이다. 이런 진술은 증거자료로 채택될 수 없다. 그 이하의 문장에서 아무리 심오하게 주절댄다 해도 설상가상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을 가지고 법정에 서면 검사의 기소에 대해 자신을 변론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2.불교의 사유방법은 연기설이다. 연기설에 입각하여 사유한다면 깨달았다는 사람에게 ‘한 물건’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한 물건이 생겨나온 조건과 바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고, 연기적으로 사유해보지 않았기에 어리벙벙할 것이다. 한 물건이란 원인도 없고 조건 바탕도 없이 자체적으로 완전무결한 진리이기에 어디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 소멸될 수도 없는 영원불변의 그 무엇이라는 꽉 막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질문을 이해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한 물건이란 인과를 초월한 것이고, 연기를 초월한 것이다. 연기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연기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떠벌이며 말로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벌써 입을 벌려 말했다면 연기한 것인데, 어이하여 연기를 초월했다 하는가? 요컨대 ‘한 물건’이 연기를 초월한 것이라면 한 물건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고, 연기한 것이라 한다면 생멸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다.’라고 할 수 있으랴. 결론적으로 한 물건이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꾸 한 물건을 들먹이며 무슨 최상승 도리를 설한다고 설쳐대는 짓은 불교의 기초도 모르는 소행이다.
3.선가귀감의 첫 문장에 나오는 한 물건 운운...은 인도의 브라흐만에 매우 가깝다.
अहं ब्रह्म अस्मि
aham brahmāsmi Brihadaranyaka Upanishad 1.4.10 "I am Brahman"
अयम् आत्मा ब्रह्म나는 브라흐만이다.
ayam ātmā brahma Brihadaranyaka Upanishad 4.4.5 "The Self is Brahman"
सर्वं खल्विदं ब्रह्म자아는 브라흐만이다.
sarvam khalvidam brahma Chandogya Upanishad 3.14.1 "All this is Brahman"
एकमेवाद्वितीयम्모든 것은 브라흐만이다.
ekam evadvitiyam Chandogya Upanishad 6.2.1 "That [Brahman] is one, without a second" 브라흐만이 유일하다, 제2는 없다.
तत्त्वमसि
tat tvam asi Chandogya Upanishad 6.8.7 et seq. "Thou art that" ("You are Brahman") 네가 곧 그것이다. 네가 브라흐만이다.
प्रज्ञानं ब्रह्म
prajnānam brahma Aitareya Upanishad 3.3.7 "Knowledge is Brahman"
아는 것(昭昭靈靈)이 브라흐만이다.
이상의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내용으로 봐서 한 물건이 곧 브라흐만가 매우 유사해보이지 않은가?
또 太極說태극설과 비교해보자. 태초에 無極무극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발동할 기미가 있자 太極태극이 되어 음양이 나눠지고 四相사상과 八卦팔괘가 벌어졌다. 여기에 나오는 무극이나 태극이 곧 한 물건이 이면서 동시에 性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한 물건은 범아일여의 梵범, 태극설의 태극내지 무극, 성리학에서 말하는 性에 해당된다. 그래서 ‘한 물건’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브라만 사상과 중국의 도교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물건은 진짜 불교가 아니고 하이브리드 불교(hybrid잡종, 튀기)이다.
4.소위 ‘이 뭣고?’라는 화두는 一物, 한 물건이 무엇인고? 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부모가 나를 나아주기 이전의 참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동일한 종류이다. 그에 대한 답이 가슴에서 터져 나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 답하거나,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절을 하거나, 아니면 뒤로 세 걸음 물렀다가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간다든가, 왔다갔다 걷는다든가 해도 모두 욕의 부림이지 별 수가 있는 건 아니다.
5.조선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선가귀감은 한국의 선가에서 인기 있는 참고서 역할을 해온다. 그런데 그 내용은 잡종, 튀기불교이다. 한국 선종이 진품 불교가 아니기에 선사들의 언행은 비불교적이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반도에 갇혔던 한국 선종은 세계불교로 문을 열고 나가 널리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 선종은 황혼에 물든 우상이다. 황혼이 짙어지면 어둠속으로 잠겨들고 말 것이다. 이제 더 기다릴 시간도 없다. 지금 각성의 망치를 들고 우상을 깨 부셔야한다. 망치로 철학하라고 했던 니체처럼 진실한 수행자라면 우상을 파괴해야한다. 지금 파괴해야할 우상은 한국 선종이다. 선종 패밀리의 보스로 자처하는 종정과 방장, 조실 및 선사들을 사정없이 밟고 지나가야 한다. 잃을 것은 사견이요, 얻는 것은 정견이다.
2016년1월13일(수) 가랑 눈
아침부터 가랑눈이 날린다. 오늘 삭박목욕일. 목욕을 마치고 운성스님이 운전하여 도향, 대현스님과 성삼재를 향해 달리다. 가늘게 내린 눈이 도로에 쌓여 차바퀴가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시암재에서 멈추어 발효차 한잔씩 하고 도로 내려오다. 지리산은 깊고 웅장하다. 겨울 지리산은 慘潛참잠하고, 深遠심원하다. 천은사 옆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수도암, 상선암이 보인다.
첫댓글 "그러나 나는 나대로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사유하고 실천하고 있다. 불교의 진리를 무상으로 무한정 선물하는 것이다. 그건 법보시이다. Dhamma를 보시하는 것이다.
담마다나dhamma-dana, 내가 항상 할 수 있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고, 다시 태어나도 계속 할 것이다.
법보시는 언제나 즐겁고, 열의를 일으키며,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깨어나게 하고, 의식을 고양시키고, 낮은 차원의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
깊이 공감합니다.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생산하고 있다고 표현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온통 글쓰는 일에 매진 해야 합니다. 하나의 글을 짧으면 두 시간 길면 하루 종일 작성합니다. 글로 하루가 다 갑니다. 물론 돈이 안되는 일 입니다. 틈틈이 일 합니다. 주객이 전도 된 것이죠.
늘 글의 소재를 찾습니다. 그리고 소재를 사유 합니다. 그리고 경전과 결합 합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시나리오가 작성되면 그 다음 부터는 자판만 치면 됩니다. 이게 제일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 입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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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
어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토론회에 참석하였습니다. 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담론이 이슈가 됨에 따라 최근 수불스님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여서 점입가경입니다. 마치 대리전을 치루는 듯한 토론회를 보고 들은 소감을 글로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원담스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6828&maxNo=16156828&minNo=16156818&maxDt=20160116000454&minDt=20160108121634&maxListNo=0&minListNo=0&maxListDt=&minListDt=¤tPage=1&beforePage=1&categoryId=
다움 블로그<진흙속의연꽃>2016.1.16일자 연꽃님의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모두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