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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8(주일) 욥기 12:1~25 ‘나의 대속자 되신 하나님’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누군가와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 같은 고독의 기분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지정한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입니다. 또 고독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단어로는 외로움, 은둔이 있는데, 이들은 외국어 번역 시 혼용되어 자주 사용됩니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은둔은 ‘세상일을 피하여 숨음’을 뜻합니다. 이 세 단어는 공통으로 ‘홀로 남아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온라인 세계의 발전으로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과 항상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SNS로 서로의 일상이 모두 공유되는 세상이고, 혼자 있을 때마저도 메신저, SNS, TV 등을 켜서 사람과 연락하고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엄밀한 혼자가 되는 것조차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더욱 연결되어 가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거나, 외로움을 줄여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세상이기에 혼자여도 무엇이든 가능하게 했고, 때로는 한 개인이 고립되어도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고립의 시대>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이기에 대면 접촉의 기회가 줄고, 오히려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디지털 개인화 시대의 등장입니다. 출처 : 카이스트신문(http://times.kaist.ac.kr)
욥은 극심한 고난의 결과로 모든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고 처절한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욥은 완전한 소외와 처절한 고독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인생을 낙심하지 않고 ‘대속자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부활의 신앙을 소유합니다. 오늘 우리 중에서도 욥과 같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성도가 계실 것입니다. 소외와 고독 속에 매몰되지 않고, 욥과 같이 나의 대속자 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고독이라는 광야로 내몰린 욥(13~20절)
하나님이 욥을 치신 결과, 극심한 욥의 고난을 보고 그를 사랑하던 형제와 친척들이 그의 곁을 버리고 떠납니다(13,14절). 자신의 집에 있던 자와 여종들조차도 그를 낯선 자로 여깁니다(15절). 더 나아가 아내는 자신의 숨결조차 싫어 합니다(17절). 심지어는 비교적 때가 덜 묻은 어린아이들마저 어른을 따라 욥을 멸시할 정도로 욥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18절). 그 결과 욥은 공동체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처절한 고독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빌닷을 포함한 친구들은 욥을 미워하며 원수처럼 그를 괴롭힙니다(19절). 욥은 주위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철저하게 망가져 회복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처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욥과 같이 우리도 고독의 광야로 내모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신학대학원 졸업식을 마치고 1주일간 대구에 있는 호렙산 기도원에 가 있었습니다. 이제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앞 길을 인도받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기도원은 나는 가본적이 없지만, 이미 대구에 있는 우리 처갓집 식구들에게는 익숙한 기도원이고, 그 기도원 원장님도 대구 동남교회와 아주 친밀한 분이셨습니다. 낯설고, 추운 그 곳에서 셀프로 하나님은 저를 고독의 현장으로 내모셨고, 시설도 좋지 않아서 스스로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야 했고, 금식을 하면서 보내었기에 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고, 그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집회라도 있었으면 같이 참석했으면 좀 덜 외로웠을 것인데, 배고품과 추위와 싸우면서도, 틈틈이 말씀보고, 산책하고,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당뇨가 있어서 그런 금식의 기간은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의 추억이 새록 새록 떠오릅니다. 철저한 혼자만의 시간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도 있지만, 함께 있는 데도 철저히 혼자라는 그런 외로움이 우리를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욥은 이런 외로움에 더해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철저히 따돌리는 왕따와 무시하고 차별하는 그런 것으로 인해 더 큰 외로움과 더해서 괴로움과 아픔까지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고독이라는 광야로 내모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이라는 광야로 내몰려 아무도 내 곁에 없는 그 때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독이라는 광야를 통과해야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게 되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고독의 광야로 내모십니다. 고독은 단순히 혼자 있는 상태를 넘어 자기 자신과의 만남, 세상과의 거리두기,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의미하는 영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광야가 인생의 방황과 고독을 상징하듯, 고독의 시간은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성장시키는 귀한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도 광야 사십일을 겪으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시면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히즈윌 [광야를 지나며]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루스 헤일리 바턴(작가, 영성 지도자, 수련회 인도자이며, 워싱턴 D.C에 있는 샬렘영성개발연구소와 내슈빌(Nashville)에 있는 영성지도안내센터에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녀가 공동 설립한 변화센터(The Transforming Center)는 리더들의 영혼을 기르고 돌보는 남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리더들이 교회와 공동체를 각자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영적 변화의 공동체로 이끌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이 말하는 고독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인간의 불행과 죄의 근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공략하기에 가장 근본적인 영적 훈련입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독과 침묵은 번잡한 영혼에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쓰라고 있는 사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는 인간의 관념과 노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마음을 여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자신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고독과 침묵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권한이 없는 영역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특히 침묵의 연습은 영적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분별력은 억지로 쥐어짜는 인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순전한 선물입니다. 고독은 비우는 과정이 수반되지만,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비움은 채움의 선결 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존재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영혼에 채워지게 되는 것이 고독의 목적이자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인간 존재의 기반입니다.” 루스 헤일리 바턴의 “고독과 침묵”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독을 통하여 자신과 대면하여 성찰도 할 수 있으나, 그 성찰은 곧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져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며, 인생에서 구별된 존재로, 남을 섬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22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22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대속자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고독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적용) 나는 지금 어떤 고독의 광야에 있습니까? 나를 이 고독의 광야로 보내신 이유를 알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있습니까?(13절)
2. 긍휼을 구하는 욥(21~22절)
욥은 극심한 고독 속에서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요청합니다. 자신의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자신을 향한 비난과 공격을 멈춰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요청은 인간적인 동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봐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양 착각하고 오히려 긍휼을 구하는 욥을 박해합니다. 욥은 2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며 절규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시선으로 고난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나 타인의 고난 가운데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을 통해 우리의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긍휼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저는 지금 당뇨병을 가지고 있고 당뇨약을 먹으면서 운동과 식사조절을 통해서 당수치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뇨을 얻게 된 것은 바로 내 욕심으로 행했던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였습니다. 큰 교회 담임으로 지원하려고 박사학위를 시작했고, 무리하게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몸이 망가지고, 당뇨라는 병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더 심각하고 큰 병을 주실 수도 있었지만, 조절할 수 있는 당뇨라는 병을 주셔서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이로 인해 운동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식사도 건강한 음식만 먹으려고 노력을 하니 감사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긍휼을 나 뿐 아니라, 다른 지체들에게도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긍휼이라는 것은 자유의 핵심입니다. 최고의 법의 진수입니다. 긍휼은 실제 삶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정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져도 사랑할 때 그게 긍휼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리라는 말은 오직 긍휼을 나타내는 자만이 심판 날 긍휼을 얻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자들이 긍휼을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데 근거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짓을 보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지만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이기 떄문에 사랑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잘 알려진 긍휼의 예화 중 하나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1.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궁핍해진 후에야 비로소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품에 안고 용서하며 맞이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용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누가복음 10장) 강도 만나 상처 입고 길에 버려진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종교와 민족을 초월하여 이웃을 돕는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3. 나오미와 룻 (룻기)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와서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베푼 깊은 사랑과 룻의 충성심은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4. 다윗과 밧세바 (사무엘하 12장)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짓지만, 선지자 나단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긍휼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5. 십자가의 사랑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대속자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긍휼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할 뿐 아니라, 나의 고난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해야 합니다.
적용) 나는 힘들어하는 지체를 불쌍히 여기기보다 오히려 그동안 들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적용하여 그를 괴롭게 하지는 않았습니까?(22절)
3.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심을 고백하는 욥(23~29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욥은 두가지 소망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무죄함을 영원히 기록하는 것이고(23,24절), 둘째는 이 땅에서 고난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더라고 마침내 자신의 대속자가 땅 위에 서리라는 것입니다(25절). 욥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 분이 땅 위에 서실 것을 선포합니다. ‘대속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이는 ‘기업무를 자’, ‘값을 치르고 회복시켜줄 법적인 책임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룻 2:20). 구약에서 ‘대속’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친족의 기업을 무르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 또는 친족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행위 등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그 ‘고엘’의 대표적인 사람이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입니다.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모압 땅에서 돌아왔지만, 남자가 없는 집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밭을 팔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팔 수 없었습니다. 살림이 너무 힘들어 밭이나 논을 팔려 할 때에는 반드시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가문에 주신 기업의 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친족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것도 고엘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성실하고 믿음이 좋은 룻이 비록 이방인이요 미망인이지만,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어, 그 가까운 친척이 나오미 집안의 고엘 1순위였습니다. 만일 그 1순위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때에는 그 다음 순번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고엘 1순위인 그 사람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오미 집안의 고엘 역할을 하겠느냐 물었고, 1순위인 가까운 친척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자 2순위인 보아스가 나오미의 땅과 함께 룻을 데려갑니다. 그렇게 해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게 되고, 그의 후손 중에 다윗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고엘(구속자)라는 말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모두 대신 담당하는 이를 말합니다. 지금 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대속자(고엘)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친구들 때문입니다. 욥을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을 정죄했습니다. 욥이 아무리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을 해도, 친구들은 끝까지 욥의 마음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그 억울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욥의 억울함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고엘(대속자)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진싱성을 증언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또 하나 욥에게 고엘(대속자)가 필요한 이유는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함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이미 가진 것을 다 잃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잃은 것은 아닐지라도, 욥은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고 자녀들도 다 잃었습니다. 이 땅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 잃은 것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되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욥은 이 땅에서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죽음 이후에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나의 대속자’(25절)로 고백하며 비록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무죄함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대속자 메시아가 자신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고백하자 욥에게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6절)는 부활신앙이 생기게 됩니다.
[큐티인 묵상간증] [고난으로 보게 된 하나님, 문치영]
알코올 중독에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저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큰형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을 나갔고, 누나는 생면부지의 집에 수양딸로 보내졌으며, 작은 형과 저는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시절 저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힘들었고 모든 사람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13~14절).
그렇게 부모님께 버림 받은 상처와 보육원에서 자란 영향으로 저는 제게 주어진 일은 잘하지만 타인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가진 것이 겨우 한 몸뚱이 뿐이라는 생각에 몸을 사리지 않고 돈을 벌었습니다(20절). 그리고 결혼 한 뒤에 사업을 시작하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습니다.
사업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으나 직원과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는 대표로서 직원들의 마음을 살피기보다 ‘알아서 잘하라’고 하며 결과만 따졌습니다. 또 어려움을 토로하는 직원에게는 도리어 “왜 그것 밖에 못 하냐”고 핀잔만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소통도 안되고 공감과 체휼도 못하니 저와 직원들과의 관계를 점점 더 틀어졌습니다(19절). 갈등이 깊어질수록 저 역시 한 직원의 말에 상처를 받았고, 급기야 분이 올라와 그를 쫓아낼 궁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혼자서도 충분히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직원이 스스로 나갈 때까지 잘 데리고 있으세요”라는 교회 소그룹 지체들의 권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내 욕심대로 지분을 정리해 직원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직원이 경쟁업체의 대표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후 매출마저 줄어들어 결국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21절). 그제야 저는 하나님을 찾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며 정죄한 삶이 결론으로 이 고난이 온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관계 고난과 사업이 축소되는 사건으로 그동안 머리로만 알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제 눈으로 보게 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26~27절). 적용하기) 1. 함께 근무하는 동료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물어보겠습니다. 2. 아내가 부르면 무시하지 않고 즉시 대답하겠습니다.
나의 대속자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사람이 아니라, 나의 고엘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의 대속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적용) 나의 모든 억울함과 무죄함을 나의 고엘(구속자)되시는 주님이 신원하시고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까?
결론
말씀을 마칩니다. 욥이 철저한 소외와 고독 중에서 고백한 하나님은 ‘대속자 하나님’입니다. 그 대속자(고엘)의 하나님은 나의 억울함을 풀어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나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진싱성을 증언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속자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고독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대속자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긍휼을 나의 삶 속에 실천할 뿐 아니라, 나의 고난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의 대속자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사람이 아니라, 나의 고엘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철저와 소외와 외로움과 같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이 살아계신 나의 대속자(고엘)이심을 믿고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