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봉천시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유조호. 시골틱한 촌가 몇 채가 있을 뿐인 이곳에는 여순과 장춘, 봉천을 연결하는 만철이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특급열차가 통과하고 있을때 정체불명의 폭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열차는 파괴되거나 탈선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제 갈길을 갑니다.
철도의 주변에는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 폭발 직후 이들은 무전기로 봉천의 일본군 특무기관과 제2대대 본부에 "북대영의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라고 보고합니다. 그 시간 특무기관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혼조 사령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사령관 대리를 사칭하고는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북대영을, 봉천에 주둔중인 제2사단 제29연대에게는 봉천성내에 주둔한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이 소위 "유조호사건"이며 관동군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의 신호탄이었습니다.
※ 흔히 "유조구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기입니다. 당시 일본측 종군기자가 "호"를 "구"로 착각하고(일본어로는 발음이 동일함) 확인도 하지 않고 급하게 본국에 전문을 발송하면서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우리나라 신문에는 무려 75km 함포를 단 우주전함 윤영하함이란 것도 있죠...
유조호를 통과하는 만철. 오른쪽의 파편 쪼가리가 바로 일본이 주장하는 중국측 테러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폭탄에 의해 파괴된 선로는 고작 79cm에 불과했습니다. 어차피 짜고치는 고스톱에 괜히 밑천 많이 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관동군에 의해 제시된 소위 "물증들"이랍니다... 어디서 재활용품을 수거해 온 듯한....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jhpark2256/150130197412
당초 관동군 사령부의 결행일자는 9월 28일로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국의 육군 중앙부와 외무성에서 이를 감지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하면서 자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들이 원칙적으로 만주침략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참모본부의 일부 강경파와 혼조사령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시하라는 하루라도 빨리 뭔가 일을 내고 싶어서 입 안에 가시가 돋히는 상황인지라 이 명령을 멋대로 묵살한채 자기와 쿵짝이 맞는 이타다키와 몇몇 관동군 참모, 대대장, 중대장급의 간부들과 몰래 짝짜꿍을 하고 날짜를 되려 10일 당기기로 합니다.
이 인간들의 영웅심리와 조급증이 오죽했나하면 혼조사령관과 참모장 등 관동군의 고위장교들과도 미리 의논하지 않고 멋대로 저질러 사건 당일 날 혼조 역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는 고사하고 되려 공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으니 밑의 혈기왕성한 후배들이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실제로 그 본인이 몇년후에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는데, 육본 전쟁지도과장으로 있던 이시하라는(당시 소장) 36년 관동군의 수원성 침공을 노리는 후배장교들의 폭주를 설득하러 갔다가 "저희는 선배님한테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뿐입니다."라며 비웃음만 당하고 돌아옵니다.
당일날 이시하라의 명령에 따라 실제 폭파를 지휘한 것은 공병장교인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였으며 그는 6명의 부하를 이끌고 철로 순찰대의 복장을 한채 철로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이곳은 동북군 북대영의 병영이 위치한 곳에서 동남쪽으로 겨우 800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뻔한 술책이었죠. 같은 시각, 제2대대 제3중대 105명의 병사가 완전무장한 채 중대장 가와시마 다다시(川島正) 대위의 인솔하에 북대영 북측에 대기합니다. 그리고 폭탄이 터지고 공격명령이 내려지자 즉각 동북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는 완전한 기습이었고 잠에 빠져 있던 동북군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건 발발 40분후인 밤 11시. 여순의 관동군사령부에 "북대영의 중국군이 철도를 폭파했고 아군이 반격하여 중국군 3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라는 보고가 올라갑니다. 한참 잘 자다가 급히 깨어난 혼조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이시하라의 보고를 받고 즉시 "모든 부대는 전선으로 출동하여 만철을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사령부와 여순에 주둔한 보병 제30연대와 함께 열차에 탑승하여 봉천으로 향합니다. 또한 19일 오전 8시 30분에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대장에게 병력 증파를 요청합니다. 이미 자기들끼리 사전 협약이 맺어 있던 조선군은 이 요청을 받자말자 육군 중앙부의 승인도 없이 멋대로 제39혼성여단(약 4천명)과 2개 비행중대를 급파하고 추가 증원준비까지 합니다.
19일 봉천 외곽을 경비하는 북대영의 동북군을 공격중인 관동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봉천 함락후 성문을 통과중인 관동군.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jhpark2256/150130197412
19일 오전, 관동군 제2사단이 요양에서 봉천으로 증원되었고 제29연대와 함께 봉천시 외곽을 포위하여 봉천성을 방어하는 동북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만 하루 동안의 전투 끝에 동북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봉천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 봉천 전역이 점령되었고 관동군 사령부도 여순에서 봉천으로 옮깁니다. 또한 장춘에 대해서도 독립수비대 산하 2개 보병대대가 1개 포병연대의 지원하에 장춘을 공격해 20일 오전 7시 점령합니다. 21일에는 혼성여단이 길림성으로 진격합니다. 길림성 대리주석이었던 희흡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선언하고 길림군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이렇듯 유조호사건 직후 2~3일 만에 광대한 남만주 전역을 일방적으로 장악한 것만 봐도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관동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오히려 이런 기습적인 관동군의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린 것은 본국 내각과 육본이었습니다. 사건 다음날인 19일 와카스키수상은 내각을 긴급 소집하여 "일단 사태 확대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라고 결의하였고 관동군의 북만주 진격과 조선군의 월경에 대해서도 복귀할 것을 명령하지만 조선군은 이를 묵살하고 제39혼성여단과 2개 비행단을 파견합니다. 본국은 격론을 거친 뒤에야 결국 9월 23일 관동군의 모든 행동에 대해 사후 승인을 재가합니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결코 만주침략의 의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과정에서 국제연맹과 영, 미의 개입,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이죠. 또한 중국 남경정부와의 관계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군내에서 관동군의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는데다, 내각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다보니 내각으로서는 관동군의 독주를 저지할 수단이 없었기에 사후 승인은 하되 행동범위를 제한함으로서 소극적이나 견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외무성은 "이것은 중국측의 도발에 의해 만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일뿐 영토적 욕심은 없다"고 주장하여 국제연맹은 물론 중국과 장학량을 기만하죠.
어차피 만주 자체는 장작림 시대 이래 일본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수출입의 40%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는 본토와의 무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 금융, 철도, 산업 대부분도 일본의 것이었죠. 군사적으로도 만철을 중심으로 주요 지역은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은 아이 손 비트는 것보다 손쉬울 수 밖에 없었으며 39년 무솔리니의 알바니아 침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 일부 서적에서 장학량이 자립을 꾀하기 위해 만철에 대항하는 "배일철도" 건설을 추진했다는 주장도, 사실은 장학량이 심각한 자금 부족에다 차관 획득에도 실패하여 어디까지나 구상단계였을뿐 실제로 사업이 착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관동군과 일본측 만주 언론들이 장학량의 반일정책을 과장함으로서 본국에 대해 자신들의 만주 침략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허위 날조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동북군을 총지휘하는 장학량은 뭘 하고 있었던가.
당시 동북군은 정규군만 30만명에 달했으며 봉천성에 4만 5천, 길림성에 5만5천, 흑룡강성에 2만5천, 열하성에 1만 5천이 요소요소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장학량이 직접 지휘하는 직계군 중심의 최정예부대가 북경-천진 등 하북성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15만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18만명의 비정규군도 있었습니다. 숫적으로는 관동군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죠. 여기다 해군력은 중국내 최강이었으며 대부분 구식의 복엽기이기는 했으나 약 300여 기의 공군기도 보유하고 있었고 봉천의 병기공장은 동아시아 최대규모였습니다.
관동군에게 기습당했다고는 해도 쌍방의 병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만약 장학량이 마음먹고 전군을 돌려서 적극적으로 반격했다면 관동군을 격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중원대전 이래 어렵게 차지한 북평-천진일대의 관내의 신지반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승냥이처럼 기회만 노리는 화북군벌들(염석산, 송철원, 한복구, 석우삼 등)에게 후방을 위협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관내출병 자체가 구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자신의 독단으로 강행된 것이라 자신의 위신 문제이기도 했죠. 여기다 관동군과의 무력충돌이 확대되어 일본이 병력을 증원한다면 자칫 자신의 모든 기반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합니다.
무엇보다 장학량은 관동군의 목적을 오판하였습니다. 일본은 제남사건을 비롯해 이전에도 여러차례 중국에 대한 출병이나 무력 도발이 있었지만 세계 열강들의 간섭으로 인해 결국 외교협상을 통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고 영토를 점령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도 마찬가지로 관동군의 상투적인 도발사건정도로 여겼을뿐 전면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무력 충돌은 피하면서 관동군의 요구사항을 적당히 떡고물 몇개 던져주면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최대 오판이었죠.
그는 이전의 이미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음에도 당장 북평을 장악하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묵살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하북성을 포기하고서라도 동북으로 돌아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면 만주사변의 향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채 관동군의 야심을 과소평가한 것이 그가 애국자가 아닌 한낱 군벌이라는 한계였습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상대의 속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점에서 장학량은 바바롯사작전 초기 스탈린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건 당일날 북경시내 병원에서 입원중이던 장학량은 보고를 받자 긴급회의를 소집한후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되며,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남경정부에 대해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요구해달라.
3. 여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측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당초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동북군 일부 부대들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하였음에도 정작 수장이 이런 소극적인 지시를 내리자 곧 전의를 상실하였고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거나 일본군에게 투항합니다. 또한 길림성 주석 대리 희흡을 비롯해 장경혜, 원금개, 장해붕 등 장학량과 갈등을 빚고 있던 구파의 고위장성들(동북군의 주축을 구성하고 있던)이 죄다 배신때리고 친일로 돌아서서 독립을 선언하고 친일괴뢰정권 수립에 앞장섭니다. 장작상과 만복린은 열하를 거쳐 북평으로 도주하죠. 그만큼 장학량 정권이 취약했다는 것이죠. 이 사실만 봐도 장학량이 본인은 싸울 의지가 있었는데 장개석의 부저항지시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는 주장은 어이없는 왜곡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장학량의 부저항정책에 대해 영국 공사 램프슨과 그의 외국인 고문들은 현명한 선택이라며 칭찬했지만(지들이야 내 일이 아니니...), 남경정부의 외교대표였던 고유균은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학량의 국제연맹 제소 건의에 대해 "별로 실효성이 없을 것"라고 대답합니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그들대로 발등에 불떨어진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국민당내 주도권을 놓고 광동군벌이자 국민당 원로인 호한민과 대립하게 된 장개석은 그를 연금시키자 이종인, 백숭희의 주도로 임삼, 왕정위, 손과, 당생지등 서로 손을 잡고 31년 5월 27일 또 한번 광서, 광동성을 기반으로 반장선언을 합니다. 이것이 "제1차 양광사변"이죠. 이들은 5만명의 병력으로 장개석의 세력권인 호남성을 침공합니다. 중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중원대전이 끝난지 반년만에 다시 내전에 휩쌓인 것이죠. 당시 강서성에서 모택동의 공산군을 한창 유리하게 토벌하고 있던 장개석은 이때문에 병력을 돌려야 했고 이 과정에서 공산군의 추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습니다.(대신 제19로군이 반격해 공산군에게 한방 먹이기는 했지만) 바로 이 직후에 만주사변이 발발합니다.
관동군이 만주를 전면 침공하여 3일 만에 남만주 전체를 장악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광주의 왕정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나라를 생각하여 내전을 중지하고 단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주일대사 강화본은 일본정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관동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장학량의 건의대로 국제연맹에 일본의 만주침략을 제소합니다. 군사적으로는 중앙군을 하북으로 북상시켜 일본의 남하에 대비하고 광동정부와 공산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킵니다.
그러나 왕정위는 장개석이 하야해야만 화해도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제의를 거부합니다. 왕정위는 부저항으로 만주를 내준 장학량에게 "30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싸우지 않고 물러난 무능함을 책임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자살하라"고 격한 논조의 선언문을 발표하지만 정작 본인은 외교부장 진우인을 몰래 보내서 "광동정부를 원조해주면 만주점령을 묵인하겠다"라고 일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치사하고 비열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해 남경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거부합니다.
유조호사건 5일 뒤인 9월 23일 북평에서 열하성 금주로 돌아온 장학량은 일단 관동군과 협상을 추진했으나 그의 부저항 선언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남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관동군은 그의 예상과 달리 협상을 거부하고 북만주까지 세력을 뻗힙니다. 10월 15일 장해붕의 괴뢰군이 흑룡강성으로 진격하고 뒤이어 하타모토의 제16연대가 1개 포병대대와 1개 공병중대의 지원을 받아 치치하얼로 진군합니다. 당시 흑룡강성장인 만복린이 싸우지도 않고 튀어버린지라 장학량은 흑하 경비사령관인 마점산을 성장 대리로 임명하고 치치하얼의 수비를 명령합니다. 양측은 눈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흑룡강군은 하타모토군을 격퇴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마점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1만 3천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증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10월 18일 관동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다음날 치치하얼이 함락되고 마점산의 잔존부대는 중소국경의 산악지대로 쫓겨가 계속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만주국이 건국되자 투항합니다.
이 아저씨가 바로 마점산(1885~1950)이랍니다. 장작림처럼 만주땅을 휘젓던 마적출신에서 오준승(장작림 죽을 때 함께 저승 간 사람)의 부하가 된후 출세가도를 달려 연대장과 여단장을 거쳐 만주사변 당시에는 만복린을 대신해 흑룡강성장이 됩니다. 한때 만주국에 투항하지만 다시 소련으로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항일투쟁을 계속 합니다. 그나마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에게 맞서 제대로 저항이라도 한 유일한 인물이죠... 관동군에게는 "동양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었다네요. 키 작은게 닮았나...--a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고유균의 예상대로 국제연맹은 일본의 행동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대신 단지 리튼을 단장으로 현지를 조사하는 조사단 파견과 양국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상투적인 권고만 늘어놓았습니다. 중국은 영, 미의 개입에 크게 기대했음에도 이들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것은 거부하였죠. 따라서 일본정부나 관동군으로서는 더이상 남 눈치볼 필요도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리튼 조사단... 중국 관광이나 잘 하고 돌아갔죠...
※ 사진출처 :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766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제서야 장학량은 관내에 주둔중인 병력 일부를 금주로 북상시키고 만주에서 후퇴해온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남경정부 역시 12월 25일 장학량에게 금주침공에 적극 저항할 것을 명령하죠. 금주에 집결한 병력은 5만에 달하였고 장학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라고 지시합니다. 따라서 관동군도 여지껏처럼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2사단 외에 본국에서 증원된 제20사단을 동원해 금주공격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양측이 충돌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장학량의 동북군이 금주에서 북평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는 관동군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바로 염석산을 비롯한 화북군벌들이 이 기회를 악용해 북평으로 쳐들어와 장학량의 뒷치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중국인으로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돕기보다 도리어 자기 세력을 확대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던 것이 당시 중국 군벌들의 실체였습니다. 따라서 32년 1월 3일 금주는 제20사단 휘하 제40여단에 의해 거의 무혈점령되다시피합니다.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항일투쟁의 거점이었던 하얼빈 역시 관동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2월 5일 함락됨으로서 만주 전체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2월 28일 동북 3성과 열하성 일부를 포함하는 만주국의 건국이 선포됩니다.
마땅한 지도가 없어서 그냥 손으로 직접 그려 보았습니다. 주요 도시와 관동군의 진격로를 대충 그려보았습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날짜가 관동군에게 함락된 일자입니다. 워낙 솜씨가 없어서리....--;;;
12월 15일, 왕정위로부터 하야를 강요받은 장개석은 모든 직책에서 사임합니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하야였죠. 그 날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서 "나라가 위험에 빠졌는데 이 사람들은 그 책임을 떠맡을 용기도, 나라를 구할 계획도 없이 단지 분란을 일으키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라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어쨌든 그의 하야로 광주정부는 남경정부에 다시 복속되어 양광사변은 흐지부지 해결됩니다.(애초에 뭐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그러나 그를 대신해 행정원장이 된 손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능함만 보인후 왕정위로 교체되었고 곧 장개석도 군사위원장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합니다.
그 직후 관동군의 폭주에 이어 이번에는 연초부터 일본 해군이 폭주를 합니다. 제1차 상해사변의 발발이었죠.
첫댓글 역시 군벌들이란......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에서 중국본토로 쳐들어간 일본군이 결국 녹아내렸던 걸 보면 대륙의 기상은 남다른가 봅니다.
훌륭한 자료 잘봤씁니다
조선군이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단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당시에 조선에는 조선 총독부 산하에 조선군 사령부가 있었고 휘하에 19사단(함경도 나남)과 20사단(서울 용산) 및 여러 보조 부대가 있었습니다.
폭풍 점령~ 마지막 지도 보니 이해가 확 되네요.
머 이건.... 병크에 병크네......
그런데 일본 본영이 통제를 못하는것을 보면 힘이없었던가요? 이런거 하나 제어를 못하는게....
힘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냥 자기들도 사실은 내심 관동군이 그러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불감청고소원이라고나 할까요...
조선독립 2등공신들이군요 ㅎㅎ
저때 장학량이 관내지역에 있었군요. 전 지금껏 만주에있으면서 싸우다 퇴각한줄 착각하고 있었는데;;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