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달 / 이상원
"아이구, 얄구져라."
"무신 달이 날 셀라카이 뜨노."
음력 스무이렛 날 그믐달이 뜨는 날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에 뜨는 달이라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달은 모양이 매일매일 변한다. 그래서 조상들은 달은 신통하고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아르테미스' 와 '디아나'가 달의 신이다.
내 고향 영양 [일월산]은 모든 것을 팔 벌려 품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산으로 일(日)신이 사는 일자봉'과 '월(月)신'이 사는 월자봉이 주봉인 신의 산이다. 해와 달이 함께 뜨고 지는 영험한 신의 산이라 무속인들이 신내림을 받기 위해 비미알고는 많이 들 찾아든다. 조상들은 달의 변화 무상하고 신통한 변신력을 운명론과 내세론으로 승화시켜 신앙화하여 숭배하고 있다.
달은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초생달, 조각달, 눈썹달, 갈고리달, 선달, 손톱달, 반달, 접세기달, 쪽박달, 송편달, 동녘달, 온달, 쟁반달, 강남달, 큰달, 보름달, 초사흘달, 그믐달, 숨은달, 여우달 이즈러진달 등 모양과 날짜와 사연에 따라 이름을 다 다르게 부른다.
어매가 피감자 긁을 때 쓰는 삐태기 숟가락을 꼭 빼 닮은 '삐태기달'도 있다.
그믐달
해질녘 잔물결이 윤슬처럼 반짝이고 앞산 산그림자도 잠자러 마실로 내려오면 서산머리에
지억(저녁)달이 개밥바라기별과 함께 새뜩하게 나타났다가 빛만 뿌리고 고대지고 마는 초생달, 방낮에 덩그러니 뜬 히슴슴한 허기진 낮달, 동무들과 어불려서 술래잡기도 하고 놀던 십오야 둥근 보름달은 우리가 비미 알고 있는 달이지 아니하덩가 그러나 그믐달은 동틀무렵 동녘 하늘에 잠시 외돌며 나타났다가 돋음볕에 옷치랍에 묻은 눈곱째기 만큼있는 빛마저 태가질로 먼지 털듯이 '탈탈탈' 모두 털어내고는 고대 사라지는 동녘달이다.
갓 시집 온 새색시가 문설주에 귀대이어 골티집 고향 부모님을 그리워하다가 고대 꿈결처럼 스러지는 이즈러지는 달이 그믐달이다.
그믐달
첫 닭이 홰치면 잠깨듬절로 선바람에 찬물 한사발로 배 채우시고 들일 나가시는 내 아부지의 들길을 바래주는 초롱불 달이다. 그믐달 앞장 세워 들일 나가셨다가 진종일 들일하시다 어둑살이 내리면 굽은 허리 두드려 고추시고 머슴새 소리 앞 세워 집으로 돌아 오신다. 그믐달은 새벽 들일 나가시는 어부지의 들길을 밝혀주는 마중달이다. 내 아부지의 초롱불달이 그믐달이다.
그믐달
사십년도 채 살지 못하고 그렇게도 무섭다는 (서른)아홉수 직성에 옭걸려 서방님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날 밤에 사랑님 따라 같이 가고 싶은 맘을 꾹꾹 눌러눌러 참고 참아도 흐운한 맘 못내 풀지 못하고 밤세미로 울다 울적에 맺힌 한을 각혈하듯 토해 내도 시름 걱정만은 그냥 둔 채로 흐운한 섧은 사정만을 남겨두고 숨어지는 한서린 여인을 비미 닮은 애절한 슬픈 새벽달이여!
그믐달
지난 밤 홍재수 돼지꿈이 그렇게 좋다고 골티에서 땀 빼며 고추농사 담배농사 지은 생금같은 돈으로 밤새미 골방에서 노름하다가
콩땡이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삼팔따라지에 속주머니에 꼼쳐 놓은 딸래미 나이롱양말 사 줄 돈까지 모두 탈탈 다 털리고 나서야 히적히적 집으로 돌아가는 따라지 노름꾼의 집 길을 밝혀주는 쪽박달도 그믐달이다.
그믐달
마흔하고도 두살 더 먹은 분내나는 여염집 색시가 건내주는 술잔에 날 새는 줄도 모르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다가 오줌이 마려워 밖에 나와 담 모티 잡고서 시원하게 오줌 한 번 내 갈기고 난 후에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동녘을 하늘을 보면 실눈썹을 닮은 그믐달이 떴다.
술이 있고 색시가 좋아 밤새워 술마시는 주정뱅이들에게 집 갈 길을 밝혀주는 이즈러진 손톱달이 그믐달이다. 「나도향」은 그믐달을 노름꾼의 달, 주정뱅이 달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덩가.
그믐달
밤 손님은 캄캄한 그믐날 밤에 그림자마저 들킬까 봐 몰래 남의 집에 들어 가 새벽 첫 닭 울음소리에 쌀 한 됫박 도디켜서 담장위에 걸터 앉아 안도의 큰 한숨 '후유' 토하고 나서 무심코 동녘 하늘을 쳐다보면 갈고리달이 빙그레 웃으며
"댓끼이놈!"
하면서도 길 밝혀 주는 달이 그믐달이다. 그믐달은 도적놈의 좋아하는 도적달이다.
그믐달
하얀밤을 불 태우며 밤새미로 공부하다 자구랍은 눈 비벼 잠 깨우고 나서 잠시 밖에 나와 지지게 한번 크게하고 동녘 하늘을 보며는 내 누나 눈썹을 닮은 그믐달이 떴다.
"그래, 한번 해 보는거야."
"너는 할 수 있어."
용기와 희망을 주는 달이 그믐달이다.
그믐 달,
내 아부지 새벽 들 일 가는 길을 밝혀주는 호롱불달이요.
슬픈 여인의 애절한 눈물의 달도 그믐달이요.
주정뱅이 달이요. 도적놈의 달이요.
그리고 용기를 주는 달이다.
사연도 많은 그믐달이 떴다.
곧, 새벽이 오려는가 보다.
우 ㅓ 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