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5)
잠15;4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말의 힘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언어와 삶의 내용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 예배의 시간에 그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임하길 축복합니다.
첫째 ; 혀의 문제는 뿌리인 마음의 문제이다.
말씀 가운데 나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혀의 문제는 그저 언어생활의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언어는 바꿀 수 있는 것이고,
그 언어를 바꿀 때 창조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은 “문제는 마음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혀는 그저 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지 진정한 문제의 뿌리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문제는 혀의 말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둘째; 두 개의 혀
1) 패려한 혀
이 두 단어는 다 마음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먼저 패려한 혀에서 ‘패려하다’는 단어는 ‘마음이 비뚫어짐’을 의미합니다.
비뚫어진 마음의 결과로 그 입에서
왜곡된 말,
부정직한 말,
다른 사람들을 뒤집어 엎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패려한 혀는 패려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영을 일컫습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이 상하면 영을 감싸고 있는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분노가 생기기도 하고, 슬픔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정을 감싸고 있는 생각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나아가 그 생각을 감싸고 있는 의지가 비뚫어지고 또 다른 왜곡된 의지를 갖게됩니다.
이런 일들이 내면에서 진행되는 중에 몸은 예민해지고 힘들어집니다.
탈무드
동유럽의 어느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을사람들에게 유대인 랍비를 욕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복받치는 후회감에 그 청년은 랍비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랍비는 그 청년에게 새의 깃털로 속을 넣은 베개를 가지고 와서 “안을 자르고
그 깃털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다시 그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시킨대로 한 다음 랍비에게 달려와 "이제 제 죄가 씻어졌습니까?"하고 물었지요.
그때 랍비가 "거의 다 되었네"라고 대답한 후에 말하기를 "자네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네,
가서 깃털을 모두 주워오게"라고 했습니다.
그때 청년이 난색을 표하며 "허지만 그건 불가능한데요. 이미 바람에 다 날려 보냈는데요"라고 합니다.
그때 "바로 그렇지"라고 랍비가 말하며 말을 이어갑니다. "
그대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끼쳐진 피해를 회복시킨다는 건
이미 날아가 버린 새 깃털들을 다시 주워 모으는 일만큼 불가능한거네" 라고 말입니다.
말은 마치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내 뱉으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말의 활은 늘 상대방의 영혼에 정확히 꽃힙니다.
그래서 그 말에 독이 묻어 있으면 영혼을 상하게 하고... 마음과 육체까지도 해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성경은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온량한 혀
반면에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라고 합니다.
마치 온량한 혀에서 나오는 말은 가뭄 뒤의 단비처럼 목마른 영혼에 떨어지는 생명수요,
허기진 영혼에 공급하는 생명의 열매요, 지치고 상한 영혼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생명나무라는 것입니다.
안데르센 동화중에
어느 날 한 농부가 시장에 가면서 말합니다. “
여보, 오늘 말을 갖고 장에 가서 좋은 것으로 바꿔 올게...”
그러자 아내가 다정하게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
잘 생각했어요. 좋은 것으로 바꿔 오세요.”
이 농부는 말을 몰고 가다가 소를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소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말을 들은 농부는 자신의 말과 소를 바꿨습니다.
이제 소를 끌고 가는 중에 이번에는 양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양 자랑을 합니다.
이에 또 농부는 소를 양과 바꾸었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다시 거위를 가진 사람을 만납니다.
역시 그 사람도 자신의 거위에 대한 자랑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양을 거위와 바꾸었습니다.
거위를 끌고 가다가 다시 암탉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 데
그 사람도 역시 알을 잘 낳는 자신의 닭에 대한 자랑을 합니다.
그래서 또 바꿉니다.
그리고 더 가다가 썩은 사과 한 봉지를 들고 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도 그 사과가 참 맛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또 그 사과 한 봉지랑 암탉이랑 바꾸었습니다.
농부는 흐뭇한 마음으로 썩은 사과를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주막에 들렀는 데 거기에 마침 한 귀족이 쉬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그에게 썩은 사과를 보여주며 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자 귀족이 말합니다. “
아마 당신의 아내는 틀림없이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자 농부가 대답합니다. “
아니에요. 제 아내는 틀림없이 ‘잘 했어요. 훌륭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자 귀족이 어이없어 하며 말합니다. “
당신의 아내가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금화를 다 주겠오.”
그리하여 이렇게 내기를 한 귀족과 농부는 집으로 돌아왔고
아내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다 이야기 했습니다.
그 남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농부의 아내가 말합니다. “
참 잘 했어요. 당신은 정말 훌륭해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귀족이 말합니다. “
이런 가정이라면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줘도 아깝지 않다.”
그러면서 자기 돈 주머니를 그 집에 내려놓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소유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칭찬하는 혀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소유한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한 농부의 아내의 칭찬은 가장 좋은 것을 얻게합니다.
이와같이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입니다.
때론 모든 삶의 희망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려던 사람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섭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로 많은 이들을 살해했던 이들에게 다가가
부드럽고 따스한 말은 이들의 분노를 녹이고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돈과 쾌락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에 올인하는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온량한 혀는 생명을 낳고, 생명을 회복하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생명나무입니다.
셋째;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길
문제는 오늘부터 내 언어를 바꾸겠다고 다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언어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패려하다’는 단어 속에 ‘
마음이 비뚫어짐’이란 의미를 담고 있듯이 ‘온량하다’는 단어 속에는‘치유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온량한 말이란 치유하는 부드러운 말이요, 치유하는 격려와 칭찬의 말인 것입니다.
누가 치유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치유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왜곡되고 비뚫어진 마음 즉, 패려한 마음이 치유되어야만 온량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마음으로 온량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당장 은혜받고 기도했다고 갑자기 우리의 언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갑자기 온전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의 보혈이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 안에 늘 거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마음은 패려함에서 온량함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혀도 역시 온량한 말을 쏟아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입은 생수를 쏟아내는 생명나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