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화와의 이야기, 노아 홍수와 바벨탑 이야기,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사사들의 이야기, 열왕들의 이야기, 엘리야와 엘리사, 요나 등과 같은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라고 해서 잊지도 아니한 것을 가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립니다.
성경 이야기를 축약하면, 사랑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또한 인간이 타인 곧 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요나단이 다윗에게 간절히 원하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세 가지이기도 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큰 주제인 사랑 이야기를 우리 삶에서 이어갈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기쁨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2-13절)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기쁨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다윗이 가드 사람 거인족 골리앗을 죽였을 때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했을 때 온 이스라엘도, 요나단도, 사울 왕까지 함께 기뻐했을 때(삼상 19:5) 다윗은 자신이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편치 못합니다. 아니 근심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선 목숨으로 기쁨을 잃었습니다.
다윗에게 기쁨을 빼앗아간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요나단의 아버지 때문입니다. 자기 장인 사울 왕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윗은 사울 왕의 호위대장입니다. 그런데도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라마 나욧까지 자기를 잡으러 올 정도로 자기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은 자기가 찾아가서 다윗을 죽이려는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아버지이기 때문에 다윗에게 미안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아버지가 다윗에게 기쁨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반드시 다윗이 부탁한 일을 자기가 시행하겠다는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나단의 마음이 잘 표현된 말씀이 본문 12, 13절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에는 다윗에 대한 의향이 선하면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본문 13절에는 다윗을 해치려는 의향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서 알려 주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신하 다윗은 사울에게 죽임당할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의심은 왕을 모신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도 알고 있습니다. 왕이 다윗을 죽이려한다는 소문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이 사람을 보내어 길한 소식을 알려 주겠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일 의향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려서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을, 그의 결백을 증명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흉한 소식을 알려 주는데도 사람을 보내어 알린다면 그것은 곧 다윗을 잡으러 온 것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다윗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다윗에게 기쁨을 되찾아 주려는 데 한 가지 더 걸림돌이 있습니다. 요나단 자기에 대한 의심도 풀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해치려 한다면, 왜 그런 결심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들 요나단이 자기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다윗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기는 왕이 될 생각도, 그런 마음도 품지 않고 있음을 다윗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마음이 본문 12절에 여호와 하나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의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축복기도문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다는 것을 요나단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아버지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 사울을 왕 삼아주신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요나단은 자기에 대한 의심도 풀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로만 위로하고 말로만 기쁨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기쁨을 빼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기 아버지 때문이며, 자기 아버지의 그런 의향은 곧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선 다윗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의심도, 자기에 대한 의심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들에게 기쁨을 빼앗아가 가는 자가 아니라 기쁨을 주는 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기쁨을 빼앗아간 것이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면, 나에 대한 의심을 풀어 주려고 해야겠습니다. 나 때문에 교회 오는 것이 꺼려지고 싫어졌다면, 말도 건네는 것도, 얼굴도 쳐다보기 싫어해서 그래서 내가 문제라면, 내가 풀어주어야 기쁨을 되찾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어야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이 나 때문에 기쁨을 잃고 있다면, 내가 주님께 기쁨이 아니라 근심이 되고, 슬픔이 되고 기쁨을 잃게 하고 있다면, 그것이 주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고 내가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다시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인자를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4-16절)
본문 14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가 사는 날 동안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줄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이상한 것은 벼랑 끝에 서 있어 죽은 목숨인 다윗에게 요나단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목숨을 지켜 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 구절인 13절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향한 축복기도문에서 자기 속내를 내보인 것처럼,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원수의 아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왕이 된 후 자기가 사는 날 동안 인자를 베풀어야 죽지 아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왕이라는 자리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일을 처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그를 해치려 한 자 사울의 자식을 대신들과 백성들이 가만두겠습니까?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의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베풀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크고 관계를 초월하여 베푸시며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17편 2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입니다.
인자를 베풀어 달라는 통합적인 언어는 “헤세드”입니다. 그 뜻은 자비, 인애, 은혜, 사랑 등의 뜻이 있습니다. 헤세드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습니다. “네가 또는 너희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헤세드를 베풀면, 그 헤세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헤세드를 베풀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 헤세드를 받은 사람이 내 이웃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이 원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말씀이 룻기서 1장 8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20: 14, 15절 말씀입니다.
룻기 1:8절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헤세드)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모압 여인 룻은 본래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신 23:3).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는 사람 관계를 초월해서 베풀어 주심을 뜻합니다.
요나단은 지금까지 다윗에게 여러 번 헤세드를 베풀어 왔습니다. 이제 그 헤세드를 다윗에게 베풀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윗을 선대한 것처럼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자기에게 베풀어 자신이 사는 날 동안 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그는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도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초월한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를 다윗에게 베풀어 왔습니다. 그러니 너도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어서, 너가 비록 나와 원수집안이 되더라도 사람관계를 초월하여 원수에게도 대적에게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어 자기를 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본문 15절에 보시면, 다윗이 왕이 되어 치세 기간 사방의 대적을 다 물리친 후에라도 요나단의 집에 베푼 그 인자함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해 줄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 왕과는 철천지 원수관계에 놓이게 될지라도 자기는 다윗의 집과는 원수 맺지 아니하겠노라 맹세합니다.
그 말씀이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다윗의 대적은 곧 여호와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을 대적한 것이기에 여호와의 대적입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이라도 다윗의 대적이 된다면 여호와께서 치시라고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요나단의 이러한 말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을 피해 이스라엘 땅이 더는 안전하지 않아서 블레셋 땅에까지 도피합니다. 때문에 자기가 왕이 된 후에 사울과 그 자손들에게 보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나와 내 자손에게 베풀어달라는 것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진짜 다윗을 헤치려 했다면, 자기 아버지가 한 행위를 자기와 자손에게까지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한 일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헤세드의 최고의 절정은 원수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그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헤세드를 주님을 높이고 영광 돌려드림으로 주님께 헤세드를 베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주님께 받은 헤세드로 내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여 헤세드를 베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자기 생명 다해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7절)
이상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했다는 성경구절을 동성애 신학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준 사랑은 지금 우리 시대와 비교하면, 절친의 우정보다, 남녀의 애정보다, 어쩌면 부모 자식간의 사랑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통해 드러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과 다시 맹세를 합니다. 한글 개역개정역을 보시면, 이 구절이 본문 12절부터 16절까지 끊고, 새롭게 시작하는 단락으로 되어 있지만, 이 단락은 12절부터 17절로 연결되어야 문맥에 더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앞의 12절에 보시면, 요나단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증언자로 세운 것은 그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 다윗과 맹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맹세한 내용이 본문 12절부터 16절 말씀이라면, 17절은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에게 맹세하게 된 그 힘이 무엇이냐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이전에도 다윗과 맹약했습니다. 앞에 한 맹세는 이제 그 효력이 다했고 새로 맹세한 것이 아닙니다. 앞에 맹세한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맹세를 더 구체적으로, 더 견고히 더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을 이처럼 다시 맹세로 이끈 것은 그가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맹세를 해 놓고 쉽게 어기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거짓으로 맹세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맹세를 자기 생명, 자기 부모, 그래도 안 되면, 땅, 하늘, 더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보증할 분이 없으면, 하나님까지 올라갔습니다.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했지만,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을 저야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나단이 자기가 한 말을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그가 그것을 어겼을 때는 죽음으로 갚을 지언정 맹세를 어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자기 생명이 꺼지면, 다윗의 심장도 꺼지고 자기 생명이 살아있으면, 다윗의 심장도 살아있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여 없애려 한다면, 마치 자신이 자기 아버지 손에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안위가 곧 자기 안위요, 다윗의 대적이 곧 자기의 대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 한다면, 요나단은 자기 생명 다해 다윗의 목숨을 지켜내려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음을 신약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이런 사랑을 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2, 13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는 사람이 바로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동성애자의 사랑도, 우정도, 애정도, 형제우애도, 부부간 사랑도 초월하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이어 15절 말씀에서 ”너희는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인즉슨, 예수께서 친구인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주님의 이 말은 내가 너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자기 생명 다해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서로 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뒷바라지해 준 만큼, 부모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한 만큼, 부부도 주고받는 것의 크기와 양에 따라 사랑합니다. 이혼하면 남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푼 이런 사랑을 쏟아붓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함이, 주님을 사랑함이 조건적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복의 크기와 양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생명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내 지체와 내 이웃을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