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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4 주일
주제 :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것
세상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는 ‘백문(百聞),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낱말의 뜻은 ‘사람이 귀로 100번을 듣는 것의 효과보다 눈으로 한번 보는 것의 힘’을 더 크게 보고 강조하는 표현입입니다. 이 말대로 생각한다면, 사람이 귀로 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증언이 될 수 있는 방법인데, 그렇게 귀로 대하는 듣는 일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더 강조하는 이 일이 우리 삶에 남기는 영향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주는 본보기를 전합니다. 사무엘예언자의 이름을 빌린 이야기에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임금을 선택하는 일에 예언자조차도 ‘눈으로 보는 것을 하느님도 중요하게 여기실 거(!)’라고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이야기가 나왔고, 긴 말씀을 짧게 읽은 요한복음에는, 안식일에 눈먼 이를 보게 주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실현하는 분으로 대하지도 않은 고집이 센 사람들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보는 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많은 기관들 가운데 한 가지인 눈이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최고의 중요성이나 완벽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인 중요성이 있음을 전제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상대적인 중요성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강조한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을 100번 강조하는 것보다 한번 제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힘’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었던, 사울이 하느님의 뜻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보다는 인간인 자기의 뜻을 더 앞세운 결과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뜻을 더 앞세우고 살았던 사울임금의 모습을 보고, 사무엘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임금을 찾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갔으면서도 거기에서 다윗이라는 소년을 만나기 전, ‘다윗의 형, 엘리압의 겉모습,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방식대로 행동하신다는 섣부른 판단’을 합니다. 독서를 들은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압니다. 다만, 세상에 사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대하면서 어떻게 판단하는 기준으로 그 존재들을 대하는지 살펴야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 있는 기관들 중에 한가지인, 눈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크게 보았던, 사무엘예언자를 향하여 하느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본다’는 하느님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요? 이 말씀의 뜻을 알기는 어렵지만, 섣부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일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삶에 대해서 신중할 것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들은 태생소경을 고친 이야기에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그 내용을 살필 순서입니다. 안식일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볼 수 있도록 고쳐준 예수님의 행동은 졸지에 죄인의 행동이 되었고,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담지도 않은 인간의 생각으로만 움직인 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아주 좁은 공간에 가두는 사람들이 되었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뜻이 더 뛰어나고 인간의 행동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이 어느 날엔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 당신은 세상에 대해서 당신이 갖고 있는 뜻을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알려주신다면, 제가 당신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할 사람이 될 텐데요!”하고 주장하면, 하느님은 그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사순4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태생소경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의 선언에 따라 눈을 뜨게 된 사람의 얘기를 들었고, 지난3주일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인이 된 사마리아여인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순2주일에는 사순시기 다음에 다가올 하느님이 드러내실 영광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첫 번째 주일에는 우리 삶을 힘겹게 할 수도 있는 유혹을 올바로 대하는 자세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방법을 들었습니다. 이런 얘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가질 자세는 어느 것이든 한 가지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나더러 무엇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나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신 적도 없다고 말하고, 그 하느님은 세상에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의 삶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섣불리 결정하고 행동을 해도 좋은 일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빛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산다면, 선과 의로움과 진실을 담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실제는 내가 손을 뻗으면 닿고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사순4주일, 눈으로 보기는 하되,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대할 것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면 좋겠습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들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힘이 우리 안에 갖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새로운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어떤 청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겠습니까?
사순 4 주간 월요일
주제 : 믿고 따른다는 것
세상을 바꾸는 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는 ‘정치(政治)의 힘’이 가장 세고 강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말이 사실일 때도 있고, 사실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쪽에 방점(傍點)을 찍겠습니까? 물론 내가 방점을 찍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무나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정치의 힘이 가장 강하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의 일에는 대단히 충실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내가 불만을 얘기할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은 참으로 묘한 곳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도 나름대로 생각은 합니다만, 제가 하는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론은 이렇습니다만,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말하는 내용들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지만 그거야 말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의식주를 말하는 세상에 드러나는 정치의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그 힘을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질 일은 조금도 아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온 말씀을 그에 비추어 생각하면, 세상정치의 힘은 사람의 삶을 예상외로 좋게 만드는 데에는 영 젬병(속어=형편없는 것)입니다. 그게 드러나는 힘과 진실이 갖는 힘의 차이일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대하면서, 사람이 신앙의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은총입니다. 직접 만나서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말씀으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참으로 큰 행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저 막연한 바람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고, 믿음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믿음을 세상의 논리나 세상의 말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은 세상에 속하는 차원이나 그에 속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그러한 믿음의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해도 될까요?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지만, 앞날이 영 캄캄하고 어두울 때, 이사야예언자는 희망이 담긴 선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서 우리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사야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셨던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물론 이것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나 일어날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순 4 주간 수요일
주제 : 하느님의 하소연
신앙인들이 제대로 된(?) 삶을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말하면, 신앙인으로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남들에게 욕이나 탓을 듣지 않으며, 그가 하는 일에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삶의 결실을 얻는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구별한다면, 신앙의 기준에서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으로 들은 것과 같은 소리에 내 마음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돌아보는 것도 방법을 찾는 일이나 대답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오늘 이사야예언서독서말씀은 ‘하느님의 선언’을 담습니다. 양으로 비유하는 히브리민족의 앞날에, 하느님은 목자로서 그 양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하게 베풀어주셨다고 선언합니다. 헌데, 실제로 그렇게 하느님이 하셨다는 예언자의 선언을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멀지 않을 때, 우리는 충실히 산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들은 선언에 우리의 삶이 합치되지 않는다면 상황은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시간을 건너뛰어서, 현실의 내 앞에 펼쳐진 것들은 내 맘에 들지 않으니,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 될까요? 하느님은 사람의 삶에 필요한 바를 베풀어주셨다고 합니다만, 사람은 거기에서 만족한 것을 보기 전에 부족하고 불편한 것을 먼저 확대해서 봅니다. 영원한 평행선입니다. 그렇게 아쉽게 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아무 것도 베풀어주신 분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들은 기적얘기(=38년 베짜타못가의 앉은뱅이 치유) 후편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내용을 살피면,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답답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능력있는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어서 그 답답한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바꾸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하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태도입니다.
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내 삶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나에게 큰 효과가 없는 법입니다. 하느님이 뭔가를 베풀어주신다면 사람은 그 일을 행복하게 누리고 살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그걸 바라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삶에서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하소연하십니다. 도대체 왜 마음을 닫고, 하느님의 뜻은 왜 읽지 않고 사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어떤 응답을 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습니까?
사순 4 주간 목요일
주제 : 사람이 일관성 있게 사는 것
사람이 하느님과 맞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그 이후에 하느님과 겨루어 이겨낼 수 있을까요? 얼핏 혹은 쉽게 생각하면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질문이지만, 오늘 독서말씀을 대하면서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에게 도전해서 사람이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 도전이라든지 이긴다는 낱말의 뜻이 좀 더 정확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오늘 독서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뭔가를 실행하겠다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줏대가 약한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과 맞선 인간의 의지가 강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호렙산 아래, 금송아지 숭배, 우상숭배사건으로 하느님의 분노는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의 원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십계명이라는 표현으로 알려주고, 그들을 특별히 대우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하느님을 만들고, 하느님을 함부로 대하고 있었으니,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들을 없애려던 것이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새로운 후손을 약속한 하느님이었지만, 그 하느님은 모세의 설득에 지고 맙니다. 그 백성을 외형상, 그대로 두기로 물러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이렇게 대했던 모세는 더 많은 히브리백성들과 가졌던 삶의 자세가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을 말리려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일관성 있는 자세는 아무나 갖는 것도 아니지만, 한번 가진 자세를 버리는 것도 권장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제와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앉은뱅이 치유에 관한 후속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적을 한 가지 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그 일의 의미를 강조합니다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현실적인 동물이라서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그들 삶의 한계를 알고 배우게 된 우리가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삶의 자세를 잘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보이는데도, 내가 그 모습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남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보다 더 험악한 꼴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칭찬하는 소리는 신경을 덜 써도 좋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남이 나에 대해서 아쉬운 소리를 할 때, 내 모습은 돌아봐야 합니다. 그게 내가 더 나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은 여러분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사순 4 주간 금요일
주제 : 악인들의 생각
세상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서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흔히 그런 표현을 씁니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십니까?
흔히 하는 말로 드러난 사람의 행동과 그 결과를 보고 나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판단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립니다. 또한 내가 이렇게나 저렇게나 판단할 내용이 정말로 옳은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도 궁금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삶을 보고서 그 결과를 얻는 것은 힘들다고 했으니, 다른 방법은 우리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어떻게 움직이셔야 하는 분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사람은, ‘하느님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다음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정말로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야 할까요? 대답은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하느님의 들먹이는 사람들을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싫어한다고 지혜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악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대우는 모욕을 당하고 고통에 헤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지도 않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흑백논리를 적용해서 모든 것과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일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라고 보는 일에 앞서서, 우리가 세상에서 움직일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면, 달리 실천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위대하겠습니까? 하느님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어느 곳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지 정말로 몰라야 할까요? 예수님을 편협한 시각으로 봤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이방인의 하나로 보았고,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 인간이 허락하고 인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분일까요? 만일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 잠시 돌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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