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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9) 전구
성모님과 성인들을 통해 전구하는 중보 기도
개신교는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 기도하는 것을 왜 반대하나요?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한 분께만 기도를 바칩니다. 천주교 신자가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익숙하게 바치는 것은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 청해달라는 전구(轉求)에 속합니다.
‘전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바치는 것은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전달해 달라고 청하는 전구기도로, 하느님께 직접 청하는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바치는 성모송에서와 같이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하며 하느님 곁에 있는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우리의 청을 하느님께 전해주고 중개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고 강조하며 성모님과 성인들을 통하여 전구하는 중보 기도를 반대합니다. 성모님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전통이 없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중보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규정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직접 청할 수 있는 기도를 굳이 성모님이나 성인들을 통하여 바쳐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천주교에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전통은 초대 교회부터 전승되어 온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하느님을 낳은 여인)라는 공경 신심이 커지면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구원 사업의 협력자라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나 그리스도를 닮아 완덕을 실천하며 목숨 바쳐 신앙을 증언한 성인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고 있다는 신심이 커졌습니다. 그 결과 지상에서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청해 달라고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교리가 확립된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지례’, 성모님께만 드리는 ‘상경지례’, 모든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지례’를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전통은 ‘성인들의 통공’을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의 통교는 물론 지상에 사는 신자와 하늘나라에 있는 성인들과의 통교로까지 해석해 온 데 근거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전통이 예수님의 유일한 중개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믿는 이들과 예수님과의 직접 결합을 돕는다고 가르칩니다.(교회 헌장 60항 참조)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최근 개신교에서 예배 중에 합심과 청원의 의미로 중보 기도가 확산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강조하며 이를 ‘성도간의 서로를 위한 기도’, ‘남을 대신한 기도’, ‘성도가 함께 올리는 간절한 청원’의 형태로 바치기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일찍이 ‘신자들의 기도’ 또는 ‘보편 지향 기도’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위한 기도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0) 십자 성호
신자로서의 정체성 드러내는 표지
일부 개신교는 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나요?
한국 개신교 가운데 적지 않은 교단이 천주교를 이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기성 종교의 정통 교의에서 많이 벗어난 교리, 주의, 주장 등의 조작을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하느님의 계시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것들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에서 나온 우상적 요소로서 배척합니다. 따라서 개신교는 천주교가 오랜 역사 속에 교회의 유산이자 전승으로 간직해 온 성모님 공경과 신심, 성인 공경, 성상에 대한 공경은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며, 천주교의 전례와 신심 활동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정통 교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여 잘못 가르치는 이들이 교회 역사 안에서 나타날 때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교도권에 따라 이들을 식별하고 감독하며 제재하는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정통 신앙을 위협하고 신앙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를 방해하는 이단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응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인류 공동체는 배타적 편협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공동선을 지향하는 대화와 화해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도 시대의 맥락에 맞게 교리를 해석하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신학과 교회 생활 전반에 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하여 ‘이단’이란 용어보다는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갈라진 형제들’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일치는 배타적 논쟁이 아닌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서로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신념과 오직 성경에서만 올바른 신앙의 전통을 얻는다는 기준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서도 이단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성상을 공경하는 천주교의 전통을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성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완덕의 삶을 보여 준 성인의 신앙적 증거를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은 옳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를 이단으로 비난할 때, 지엽적인 교리에 대한 논쟁은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상대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다면 섣불리 대응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대신에 가톨릭 신앙이 지닌 보편성을 강조하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류에 봉사하고 하느님 나라를 공동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성호는 천주교 신자만 긋나요?
십자가 모양을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짧은 기도를 바치는 성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리고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도 십자 성호를 활용합니다. 성호경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동시에, 십자 성호를 긋는 행위로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념하는 축복의 행위이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본래 십자 성호는 2세기부터 개인이 기도를 드릴 때 엄지나 검지로 이마에만 작게 십자가를 그리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4세기부터 성경과 교회 전통에 따라 이마와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는 전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십자 성호는 13세기부터 보편화되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경과 교리 해석은 물론 교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까지 상당 부분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오랜 신심과 전례 행위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하느님 계시의 원천을 ‘오직 성경으로만’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의 관습적 요소들을 개혁 신앙에서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십자 성호가 개신교 전통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전승을 공유하고 있는 동방정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반발로 갈라진 성공회는 여전히 십자 성호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제였던 루터는 가톨릭의 예식을 존중하였기에 루터교도 십자 성호의 전통이 있습니다. 다만 장로교를 비롯하여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혁 신앙을 주창한 노선의 개신교 교단들은 십자 성호를 가톨릭의 관습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방정교회의 경우에는 가톨릭교회와는 반대로 이마와 배(자궁)에 이어 오른쪽 어깨(선한 양의 무리)에서 왼쪽 어깨(악한 염소 무리)로 십자가를 긋습니다. 이때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모으고, 나머지 두 손가락은 손바닥에 밀착시킵니다. 앞의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나머지 두 손가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1) 실체 변화
축성된 빵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
개신교는 천주교의 성체 교리인 ‘실체 변화’를 믿지 않나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기억하는 성찬례 또는 성만찬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사(聖事)로서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종교 개혁 당시부터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하신 말씀(요한 6,22-71 참조)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찬례가 빵 나눔이라는 하나의 예식에 불과하며 그 안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하지 않고 다만 상징적이거나 영적으로만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루터의 경우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빵과 포도주와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공재설’(共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성찬례가 ‘상징’이자 ‘기념’일 뿐이며,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은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신자들의 믿음에 성령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계에서 거행하고 있는 성만찬은 천주교에서 거행하는 성찬례와는 다릅니다. 천주교는 “성체성사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신성과 더불어 그분의 몸과 피가, 곧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계신다.”(트리엔트 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법규 제1조: 덴칭거 1651항)는 것과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의 온 실체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위 법규 제2조)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를 천주교에서는 ‘실체 변화’라고 하고, 개신교에서는 ‘화체설’이라고 부릅니다.
천주교가 가르치는 실체 변화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성사적 신비입니다. 사제를 통하여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그 물리적 형태는 그대로 남지만, 그 빵과 포도주를 구성하는 본질이 먹고 마시는 음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곧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라는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가르치는 실체 변화는 신앙의 감각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신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체의 신비를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은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성체를 모실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갈라 2,20 참조)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며 바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3) 세례
세례 성사, 천주교와 개신교 일치의 표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같은 믿음을 가졌나요?
우리나라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성경에서 알려준 대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내어 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가톨릭 교회 교리서」, 26항)을 하는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둘 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이천 년 전 역사 속의 한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2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으로서 구약의 선조들,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성조들로부터 시작하여. 모세를 통하여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들의 우상 숭배와 죄악에 대한 심판과 용서를 통하여 인류의 창조 역사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의 선조들이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요한 14,9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시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구약의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인류의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원조의 죄로 닫힌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에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품고 부활과 영생의 희망 속에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세례는 같은 세례인가요?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하는 신앙의 표지입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세례성사는 집전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 지원자를 물로 씻는 동일한 예절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세례야말로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일치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세례의 표지로 얻습니다. 또한 세례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 자신도 우리 죄인과 연대하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기에(마태 3,13-17 참조), 세례는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인정하는 성사입니다.
천주교는 누구든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면 예비 신자로 받아들이고 신앙생활로 안내합니다. 예비 신자가 일정 기간 교리 교육 기간을 거쳐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얻으면 정식으로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게 되고,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섬김의 직무에 동참하는 ‘왕직’(봉사직)과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따라 사는 ‘예언자직’, 그리고 십자가 희생 제사에 자신을 봉헌하는 거룩한 삶과 성사 생활을 통하여 ‘사제직’을 실천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누구든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면 예배와 교회 생활로 안내하고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며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 세례를 준 교단의 신자로 등록됩니다. 이때 성공회와 정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세례명을 쓰지 않습니다. 일부 개신교 교단은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세례를 표징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세군의 경우에는 물로 씻는 세례 대신에 병사 서약식을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5) 구원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얻는 구원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구원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이해하나요?
개신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치면서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일부 개신교 교단은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선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천주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선행을 쌓은 뒤에, 내세에 하느님께 받는 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에게서 “당신은 구원을 받았나요?”라고 질문을 받으면 천주교 신자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고백은 천주교나 개신교 신자에게 중요한 구원의 열쇠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합당한 선행과 죄에 대한 보속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지적 협력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나약함과 죄가 너무 깊어 인간의 선행과 보속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의화)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맺고 푸는 권한(교도권)과 가톨릭교회의 오랜 신심 전통들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의 신앙 전통을 세운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도 구원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강조하지만, 이에 따른 인간의 협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나 네가 구원되는 것이 완전히 너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협력하여라”라고 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전적인 믿음을 강조하면서 선행은 믿음에 따라온다고 가르칩니다. 한편 천주교는 실천 없는 믿음이 자칫 맹신으로 흐를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간의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합니다. 이런 견해 차이가 구원의 조건에 대한 강조점을 달리하는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 뒤로도 개신교 교단마다 교리 해석에 따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방식을 다르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99년 10월 31일 교황청이 루터교 세계 연맹과 맺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따르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무상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의화 논쟁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7) 마리아교라는 오해
성모님께 공경을 드리는 교회의 전통
한국의 개신교는 천주교를 왜 ‘마리아교’라고 부르나요?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를 마리아교로 오해하고는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숭배하고 있다고 여기고 이를 우상 숭배로 비난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신처럼 숭배하거나 흠숭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에 가장 훌륭하게 협력하신 분이시기에 공경하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개신교 신자는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리아 공경에 대한 신심은, 초대 교회 박해 시대의 지하 묘지(카타콤바)에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벽화가 있다는 사실로도, 성모님 공경의 전통이 초대 교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개신교 신자가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마리아를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가장 중요한 협력자이자 ‘하느님의 어머니’(431년 에페소 공의회)로 공경하였음에도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17세기 이후 가톨릭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의 원칙 아래 마리아 공경의 전통을 이도교의 신심과 결합된 왜곡된 신앙으로 오해하였습니다.
둘째, 19세기에 선포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1854년)와 ‘마리아의 승천’(1950년) 교리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오랜 전통이자 깊은 신학적 통찰의 결과임에도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계시된 진리로 이해하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이 두 교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셋째, 천주교 신자가 성모 신심을 예수님의 구원 섭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면도 없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지켜 온 마리아 공경에 대한 다양한 형태가 ‘모성’과 더 긴밀히 결합되면서 성모 신심이 가톨릭 신앙을 대변하는 것처럼 비친 것도 사실입니다. 성당 앞에 있는 마리아 상에 절을 하거나 묵주를 가지고 다니며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 또 예수님보다 성모님을 신앙의 한가운데에 두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개신교가 천주교를 ‘마리아교’ 또는 ‘우상 숭배’라고 오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동등한 구원자가 아니라 교회의 지체이자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우리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공경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루카 1,28 참조) 분으로서 당신을 ‘주님의 종’으로 바치시며 평생을 하느님의 뜻에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인류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구원 역사에 가장 깊이 관여하신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모님께 공경을 드리는 교회의 전통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