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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치유자 (벧전 2:21-25)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며칠 전에 우리 지역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자기교회 성도 하나가 아무개 교회로 갔다고 했습니다. 조그만 개척교회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 교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비난하고 욕을 한다는 거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석가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촌동생이 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공자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여러나라를 떠돌아 다녔지만 취직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아내가 악처였습니다. 어느날 집에 들어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 아내가 구정물을 부었습니다.
육체의 상처도 있습니다. 단순히 피 몇방울나는 상처가 아니라 끔찍한 사고도 있습니다. 1973년 8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이승복입니다. 승복이는 집 근처의 YMCA에서 체조를 했는데 재능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 소년의 꿈은 거의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금메달을 배출시킨 미국 최고의 체육학교에 진학했고, 전 미국 체조 선수권 대회에서 마루와 안마에서 1등을 했습니다. 올림픽을 한달 앞둔 1984년 7월 6일 고난이도의 공중회전 중 턱으로 마루를 받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척추를 다쳐 사지마비의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몇 달간 기브스를 했고, 기브스를 푸는 순간 그의 몸은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만 2cm 움직였습니다. 꿈은 사라지고 그는 눈물의 골짜기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승복은 부러진 날개를 가지고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처절한 재활훈련에도 불구하고 팔과 다리는 거의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컬럼비아 대학의 공중보건학 석사, 하바드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마치고, 세계최고의 병원 존스 홉킨스에서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 자신이 전신마비 장애를 재활로 극복한 인간 승리의 산 증인이기 때문에 병원의 환자는 이승복을 보며 희망을 가진다고 합니다. 책 서두에 이런 노래 가사가 나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 우리인생 때로는 꽃이 피는 벌판으로 여행하지만 때때로 눈물의 골짜기에 들어 설 때가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절망, 분노 속에 암담한 날들이 있습니다.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승복은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을 썼고 우리나라의 TV에 인간극장이라는 프로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별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로 많은 장애인에게 치유자(healer)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상처를 잘 처리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을 조절하고 관리해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 근래 아파트 경비하시던 분이 입주자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아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경비하는 분이 입주자 대표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둘 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시간 상처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상처가 치유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낫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와는 남편 아담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살게한 이 여자가 선악과를 주어 먹어라 해서 먹었습니다. 남편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형들에게 음식을 가지고 왔더니 그를 때리고 깊은 웅덩이에 던져두었다가 사막의 대상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왕자 같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노예가 되었습니다. 종노릇 하는 것도 서러운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왕인 사울로부터 받았습니다.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또 아내인 미갈 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성전에 가서 울고 또 울며 자식하나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공부를 잘 못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상처 받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성적표를 받아왔습니다. 전 과목이 '가'인데 딱 한 과목만 '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어이 특공대, 골고루 공부해야지, 너무 한 과목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 특공대는 ‘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라고 합니다. 상처는 주로 감정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욕설보다 더한 것입니다.
고슴도치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외롭게 사는 동물입니다. 혼자 다니죠. 그러다가 너무 외로우면 친구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도 찔리고 친구도 고슴도치 침에 찔리게 됩니다. 가까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고슴도치에게는 침이 3만개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 80년을 산다면 날수로 계산하면 3만 날이 됩니다. 일생에 매일 한번 상처를 받는다면 3만 번의 상처를 받습니다. 고슴도치의 침처럼 사람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아는 목사님이 나는 세례를 두 번 받았다 그래요. 무슨 말씀인가? 어릴 때 이천석 목사한테 세례를 받았고요, 한번은 교회 권사님이 자기 장로 안 시켜 준다고 양동이에 물을 한통 가져와서는 목사님에게 부어버렸습니다. 이때 목사님이 웃으시며 이제 시원해요? 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목사님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웃으니까 목사님은 다르시군요.. 그 후로 착실한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상처는 잘 조절하면 보석이 되지만 잘못 관리하면 위험해 집니다. 진주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연한 조갯살이 찢어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상처 낸 모래는 나가지 않습니다. 조개가 아비큘리데라는 진주 성분으로 상처를 감싸고 또 감싸면 조개 속에는 진주라는 보석이 만들어 집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주조개는 상처가 썩어 죽고 만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진주보다 더 영롱한 보석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 예수님도 상처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23절)
오늘 말씀 23절에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고향 예배당에서 처음 설교를 하셨을 때, 설교가 끝나자 청중들이 분노했습니다. 죽이려고 마을의 낭떠러지로 밀고 갔습니다. 고향 나사렛 예배당에서, 고향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거부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거기서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그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깔끔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물 마신 컵을 곧바로 씻었습니다. 언젠가는 씻을거니까 곧 씻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 사모님은 씽크대에 그릇을 쌓아놓고 이제 쓸 그릇이 없으면 치우는 스타일입니다. 우리 집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머 좀 비슷합니다만, 그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여보, 생각 좀 해봐.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그 부활하시면서 바쁜 중에 무엇 때문에 세마포 옷을 개켜놓고 나올 생각을 했겠어. 당신같이 정리 정돈 안 되는 사람, 정리 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여, 알어? 당신 부활 믿냐고, 부활 믿어?” 여러분 부부싸움 할 때 이 목사님처럼 성경 디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그 목사님 유머 같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그 수의, 그 세마포, 토리노의 수의라는 것인데, 지금 이태리의 토리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수의를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머리와, 손목과 발목 다리와 팔, 가슴과 등에 많은 상처자국, 핏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에는 채찍으로 난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이 상처가 날 정도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독한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비웃음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3년간 정성으로 양육한 한 제자는 예수님의 몸을 넘겨주는 댓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제 살겠다고 도망쳤고 도망치지 않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독한 말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 보셨습니다.
성경 스가랴 13:6에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했습니다. 이땅에 오신 주님은 많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셋째, 주님은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24절)
오늘 말씀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아픔, 우리가 당하는 상처, 우리가 당하는 무시와 저주를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아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상처와 질병을 그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로마 군병에게 체포당하실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말고 라는 종의 귀가 잘렸습니다. 그 사람 많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검을 거두어라 하시고 잘려진 귓조각을 그 사람의 귀에 다시 붙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이십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다가 교수를 사직하고 중증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L’rche)에 들어가 헌신했던 헨리 나우엔이 쓴 것입니다. 그 책의 주제가 예수님이 상처입은 치유자입니다. 나우엔은 그 공동체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고 그 자신이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니얼 고틀리브는 카운슬러입니다. 그는 교통사고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서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병상에 누운 그는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 한 분이 그에게 ‘카운슬러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니 ‘누구나 살면서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으니까요. 간호사는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다리를 못 쓰게 됐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나도 살아갈 의미가 있겠구나.’ 그건 확신에 찬 생각이었습니다. 고틀리브는 “그분은 제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실은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제 안에 고요함이 새롭게 찾아들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면 온 마음으로 내담자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상처와 두려움, 갈망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담자의 마음은 바로 그때 열립니다.” 이것을 공감(empathy)이라고 합니다. 공감이란 ‘속으로 들어가서 느끼다’는 그리스어 ‘empatheia’에서 유래했습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가난해 보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실직도 하고, 학력열등감도 가져보고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는 경험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상처입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많은 상처를 받고 고난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와 공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험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사귀는 여자 친구가 부잣집 남친 집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학교는 어디 나왔나?’ oo 대학입니다. 지방의 이름없는 전문학교... ‘아버지는 뭐 하시는가?’ ‘농사짓고 있습니다’. ‘직장은 어디인가?’ 몇가지 질문을 받고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너는 무슨 배짱으로 우리 아들과 사귀나?’ 심한 상처와 모욕을 받고 맨발로 뛰쳐나와 골목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남친이 곧 따라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발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친의 옆에 섰습니다. 여친의 마음이 아픔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 여친의 손을 잡고 골목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상처입은 사람은 상처입은 사람이 그 마음을 만져줄 때, 치유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상처든지 상처입은 우리 주님이 그 마음을 아십니다. 그 주님이 여러분을 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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